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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차문화연구회는 2012년 10월 20일 부산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사당에서 회원들과 함께 발표회가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는 회원 개개인의 사정이 많아서 참석 인원은 적었지만 부산 해동 저수지 부근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사당에서 돌로 만든 둥근 차석에 둘러 앉아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발표문 첫 번째는 김봉건 회장의 방외지사(方外之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유학사상을 중심으로 연구한 내용이며, 두 번째는 필자로서 이번에 출간한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에서  16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기록을 엮은 책에서 참가자 전원 혈액으로 구분하여 차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와 차를 마시는 이유, 즐겨마시는 차 등등을 통계학적으로 분류한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저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이유와 결과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아래 발표문의 전체 원문은 향후 간행될 연구지를 통해 보급될 예정이다.

방외지사(方外之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김봉건

<동양차문화연구회 회장>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하였으면서도 또 가장 불우한 생애를 보낸 선비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세종(世宗) 임금으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아 다음에 크게 쓰일 것이라는 전지(箋紙)를 받고 오세(五歲)라는 호로 불리었을 정도의 천재였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목도한 후 무도한 세상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방외(方外)의 길로 접어든 인물이다.

때로는 승려의 행색으로 팔도를 유람하는가 하면, 세상이 바뀌자 다시 관직에 진출하고자 경전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불경을 가르친 일로 탄핵을 받고 끝내 사환(仕宦)의 길은 좌절되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자(儒者)였지만 때로는 산수에 묻혀 차나무를 기르는 유인(幽人)이 되었다가, 다시 환속하여 결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가의 양생술에 심취하여 도교의 내단(內丹)과 외단(外丹)을 닦기도 했다.


그의 한 평생은 도무지 대요를 파악하기 힘든 회오리 같은 생애였으나 지조는 오히려 뚜렷하여 후세인들에 의해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다. 그의 시문(詩文)을 접해보면 뛰어난 시재(詩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얼마나 경서(經書)에 해박한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끝내 조정의 동량이 되지는 못했지만 유자로서의 비분강개는 조선 중기 이후 사림(士林)의 절의정신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산수에 묻혀 유유자적했던 삶의 자세는 걸릴 것 없는 진인(眞人)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매월당 김시습을 통해 난세에 처한 지식인의 자세에 대해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으며, 한 인간의 위대함은 반드시 세속적 목표의 달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 또한 유교다, 불교다, 도교다 하는 식의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침착(沈着)되었을 때라야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역설적이게도 김시습은 세속의 뜻이 좌절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인생을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시습의 신세


김시습은 조선 초 세종17년(1435년)에 태어나 성종24년(1493년)에 죽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일성(金日省),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설잠(雪岑), 동봉(東峯), 매월당(梅月堂) 등이 있다. 태어난 지 여덟달 만에 글을 알기 시작하여 집안 어른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비상함을 알아보고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그는 3세에 시를 짓기 시작하고 『유학』『소학』 등을 공부했다 하며, 5세(세종21년) 때에는 세종(世宗)이 승정원을 시켜 그를 시험한 뒤 능력을 칭찬하여 비단을 하사하였다 하여 오세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이후 모친의 정성으로 선비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를 가서 13세까지 이계전, 김반, 윤상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고 역사서와 제자백가를 독학했다 한다.

15세(세종31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른 뒤 18세(문종2년)에 훈련원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고 과거 공부를 했다. 그러나 19세(단종원년)에 과거에 낙방하고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던 중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단종(端宗)의 양위 사실을 전해 듣고는 통곡 끝에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후 방랑길에 올랐다.


22세(세조2년) 때에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묻었다. 24세(세조4년) 때에는 함께 어울리던 인사들과 더불어 정몽주, 이색, 길재의 초혼제를 지낸 장소인 공주 동학사(東鶴寺)를 찾아가 사육신을 위한 초혼제를 지냈다. 이후 수년간 승려 차림으로 팔도를 유람하면서 학문과 유교, 불교에 대해 토론했다. 김시습은 이때 관서, 관동,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백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등 우리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안목을 형성했다. 또 이때 직접 목도한 민초들의 생활에 대해 한없는 연민의 정을 품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많은 불경을 읽으며 여러 절을 전전하기도 했다.


28세(세조8년) 때에 경주에 이르러 정착할 결심을 하고 금오산(金鰲山) 중턱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렀다. 29세(세조9년) 때에는 경주의 유적을 돌아보는 한편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을 읽고 직접 차를 길렀다. 그리고 이 해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서울에 올라 가 열흘 동안 궁중의 내불당에 머물면서 『묘법연화경』의 언해 사업에도 참여했다. 이를 보면 그는 몸은 비록 낭인의 행색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왕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31세(세조11년) 때에는 경주 용장사 부근에 금오산실을 짓고 정착하여 살았다. 다시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석하였고, 세조의 환도(還都) 명령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37세 무렵까지 금오산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리고 38세(성종3년) 때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새 조정에서 임금을 보필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경전을 다시 익혔다. 그러나 관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꿈은 좌절되었고 수락산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41세 때에는 정업원(淨業院)에서 불경을 가르친 일로 탄핵을 받았다.


46세(성종11년) 때에는 『황정경(黃庭經)』을 읽는 등 도교의 내단, 외단 사상을 익히고,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가져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 주목했다.

47세(성종12년) 때에는 다시 머리를 기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환속 후 안씨의 딸과 혼인하나 이듬해 안씨부인이 죽고 조정에서는 폐비 윤씨의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 지방으로 방랑길을 떠났다.


53세(성종18년) 때에는 양양 부사 유자한(柳自漢)과 친밀하게 교유하다가 유자한의 청으로 구황책에 관한 상소문을 대신 짓고, 유자한에게 『장자(莊子)』를 가르쳤다. 이 무렵 유자한이 여인을 주선했으나 돌려보내고, 벼슬에 나가라는 권유도 사양했다.

59세(성종24년) 때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머물면서 절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에 발문을 썼다. 그리고 이곳에서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중종16년(1521) 이자(李耔)가 십 년에 걸쳐 자신이 수집한 김시습의 시문을 모아 책을 만들고,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를 썼다. 선조15년(1582)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집』이 편찬되었고 이이(李珥)가 왕명을 받아 『김시습전』을 지었다. 선조16년(1583) 이산해(李山海)가 「매월당집서」를 짓고, 이 무렵 운각(芸閣)에서 『매월당집』 시집 열다섯 권과 문집 여섯 권이 간행되었다.

정조6년(178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정조8년(1784) 청간공(淸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1927년 김시습의 후손 김봉기(金鳳起)가 『매월당집』 시집 15권 4책, 문집 6권 1책, 부록 2권 1책, 총 23권 6책을 신활자로 간행했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 충남 부여군 무량사 소장)


20대의 아이들이 무슨 차 맛을 알까? http://seoku.com/541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http://seoku.com/442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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