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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많이 대중화되었지만 차(茶)도 커피와 마찬가지로 기호 식품이다. 하지만 커피와 달리 차는 예(禮)를 갖추는 일을 중요히 여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음식에서 예로 발전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20년 동안 차와 함께 하며 살아왔다. 부산, 대구, 서울 등의 웬만한 차인들의 행다법을 지켜봐 왔고, 때로는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회원권을 구입하며 준비된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하기도 수차례 해왔다.

각 차회의 행다법을 자연스럽게 익힐 정도로 수 없이 많은 사진 촬영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이런 일에 이만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가 하는 후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그러한 시간들이 다 소중하고, 그들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 차문화의 발전이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문화의 한 분야가 발전하기까지는 그 분야 관계자들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속된다.

차인의 눈으로 봤을 때도 행다 절차는 까다롭고 어렵다. 다른 사람의 진지한 행다례 발표를 보면서 ‘춤추는 것 같다’ ‘너무 외형적으로 치우친다’고 폄하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혹자는 한복 입고 폼 잡는 것 때문에 차문화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누군가는 ‘과도기’라 이름 짓기도 한다. 하지만 과도기라 명명한다고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미래로 향한 중요한 길에 놓여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학문으로 그 깊이를 논하고, 차를 연구하는 학자는 차의 품종을 연구하여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일에 매진하면서 다 함께 가야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분명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형적 치우침이라고 매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 긍정적 대안이 아니다. 좋은 대안을 놓고 함께 연구하고 노력한다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차회의 흠집 내기 발언보다는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을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행다 발표에 있어서는 그 동안 수련했던 것을 자신 있게 하면 된다.


우리나라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를 보자. 태권도가 세계인의 스포츠로 자리 매김 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이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태권무(跆券舞)라는 것도 생겨났고, 한편에서는 전통 태껸을 지켜온 이도 있었다. 무엇이 원류이고, 무엇이 본질인가? 문화는 다양성의 산물이다. 문화가 물이라면 시대의 삶은 그를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변화면 물은 거기에 비추어 유연하지 않은가?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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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주에 걸쳐서 매주 점촌에 내려가서 점촌과 문경지역의 전통 장작가마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위해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 곳에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실측을 하면서 지난 2004년 <사기장이야기>를 발표하기전의 가마 구조와 조금씩 달라진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사기장들이 그만큼 연구를 한다는 입장에서 긍정적이다. 2004년 부터는 문경지역의 차도구에서는 큰 변화를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답습의 연속에서 정체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전통 흑유다완을 만들고 연구하는 사기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목다완이 아니라 천목이 완성되기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무광택에 가까운 한국의 고려흑유는 유적천목과 같이 광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질감이 투박하며 소성후 유약의 변화가 감칠 맛이 나는 것이다. 철분이 많은 분청소지로 만든 이 흑유 다완은 현재로서은 다완으로서의 성형은 미흡한 점이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온 것 중 하나인 흑유를 소재로한 찻그릇의 개발은 정체되어 가는 지역에서 활역소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사기장이 만들어 놓은 여러 점을 보면 중국의 천목 다완과 비슷한 형태는 한 눈에 의도된 것으로 보이면서 우리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보였다. 현재 흑유로 만들어진 결과를 보면 우리 나라의 다완 형태(웅천에서 만들어진 다완)로 보이는 것에 오히려 더 정감이 갔다.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을 보면 사토질이 많은 흙으로 설익어 나온 다완을 무조건 이도다완이라고 흉내내어 만들진 것을 보다가 찻그릇의 변화와 전통을 볼 수 있는 사기장을 만났을 때 장작 가마를 조사하는 과정의 힘들고 어려운 마음에 위로가 되고 흥이 났다. 그것은 분명히 끊어졌던 전통이었다. 그런데 문경 땅 안에 숨쉬며 싹이 돋아 나고 있었다. 진정 그칠 줄 모르는 우리의 예맥을 또 한번 확인했다. - 2007년 7월 19일 석우.

  3주간 조사한 장작가마는 문경요 포암요 갈평요 황담요 월봉요 가은요 부광요 고려천목요 주월요 묵심요 백두요이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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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기억에서 문화적 자각으로 가야만 할 전시... 야나기展

2006년 11월부터 2007년 2월25일까지 두 차례나 전시 기간이 연장되고 있는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전은 근래 보기드문 좋은 기획전이다. 이 번 전시를 두고 각 언론사에서 나온 글이나, 주요 잡지에서 다루는 것을 보면 야나기가 남긴 우리나라의 미에 대한 글에 무조건적인 찬사의 글들만 주목받고, 전시내용에 관한 글이 그다지 없음은 아쉬운 일이다. 특히 야나기의 평을 중심으로 가감없이 인식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우리문화에 대한 지평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필자는 야나기가 우리나라의 미를 전반기에는 ‘비애의 미’라고 하고, 후반기에는 ‘무작위의 미’라고 ‘한국의 미’를 단편적으로만 평가한 점은 시대적 한계 면에서는 인정하지만 한국이라는 역사를 통틀어 통시적인 美의 맥락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중략 -
필자와 같은 차를 좋아하고 다도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면 꼭 한 번은 봐야하는 전시라고 본다. 가능한 여건이 되는 분의 관람을 권한다. - 석우.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와 민예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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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3월 21일 아버지 나라요시, 어머니 가쓰오의 3남으로,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효에정 2초메 13번지에서 출생.
1891년 1월 14일 아버지 나라요시 사망
1901년 9월 12세의 나이로 가쿠슈인 중등학과에 진학, 시가 나오야 등 《시라카바》 도인들과 교유 시작. 하토리 다노스케 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이 싹트다.
1907년 4월 가쿠슈인 고등학교에 진학(18세). 스즈키 다이세쓰, 니시다 기타로, 간다 나이부, 노야나기 시키타 등의 여러 교수에게 지도받았다.
1909년 2월 고오리 도라 히코 등과 회람(回覽), 잡지 《도엔(桃園) 》 발행. 9월 4일 일본에 온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의 집을 무샤노코지 사네야쓰 등과 함께 방문하여 동판화 기법인 에칭의 실연을 보고 이야기를 듣다. 이 무렵 골동품 가게에서 처음으로 조선 항아리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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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있는 다기’라고 하는 것은 격(格)을 갖춘 다기라는 말과 상통한다.

만든이의 정성과 기술에 속됨이 없어야 한다. 장인의 작품으로 재료의 선택에서 마무리까지 정성이 묻어나야 한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사용하면 할수록 격조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이를때 우리는 품격있는 차도구라고 한다. 비싼다기는 무조건 값이 비싼 것을 말한다. 비싼 다기를 수준이 높은 찻그릇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값이 비싸다는 것은 이벤트와 함께 브랜드의 인식을 심어주고, 그후 값을 마구 올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비자들에게 비싼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게 하며 판매되는 물건이다.

그래서 ‘품격있는 다기’라는 말과 ‘비싼다기’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

‘좋은 것을 들여 놓았다’와 제일 비싼 것을 사왔다‘는 말로 구입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과 같다. 모나리자는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화면 앞에 서면 잘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런 그림을 명화(名畵)라 하는데, 그 당시에 가장 비쌌던 그림이라는 설명은 어디에 찾아보아도 없다.

노블(noble)과 익스펜시브(expensive)는 뗄 수는 없지만 구별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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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애호


차는 기호품이다. 그에 따른 도구들도

사람들의 이호에 따라 선택되는 기물이다.

그저 하나 있어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재미있고, 가지고 싶어서

여럿을 둘 수도 있고, 가지각색으로 가질 수도 있다.


그 선을 넘어 어느 한 가지에 애착을 가지고

좋아하는(好) 것은 애호이다.

더불어 그러한 기물을 빚는 이와의 담소 속에서

허물없이 애정어린 물건을 본다는 것은

실상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매니아가 되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외면 받을 만한

기행(奇行)을 한다.

누가 찻잔에 루페를 들고 감상하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즐겁다. 그 순간만은 세상에서 최고로 즐겁다.

기물을 만든이와 함께하고, 또 전문적인 매니아가 함께한다.

주인도 기분이 좋은을 것이다.

그는 마이스터(Meister)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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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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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행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더욱 깊어진다. 내년에도 전국에서 한국차를 배우기위한 노력보다는 중국차를 배우거나 중국차와 관련된 자격증을 발급하는 사업이 사업성과 명분을 가지고 각단체가 경쟁적으로 주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는 일본 다도를 배우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전국적으로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 글은 지난 2005년 10월 월간다도에 기고 한 원고이지만, 12월31일 한 해를 보내면서 2006년에는 우리의 행다법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한국 行茶의 주체성’다시 한 번 올려본다.

금년에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국내외에서 여러 사건이 일어나고 마무리되고, 어떤 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진행이 되고 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시기에는 문화가 기를 펴지 못한다. 현대의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고 급히 지나가기에 전통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높이 숭앙된다.

전통중에서도 예의를 다한 것은 그 나라 그 민족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밀레니엄도 5년을 넘기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행다는 과연 어디에 서 있을까?
이 글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솔직히 말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행다(行茶)와 다법(茶法)의 용어 선택에 대해서는 행다로 정하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행다 : 차를 내기 위해 정해진 동작에 의해서 행동을 모범적인 법칙에 맞게 한다.
다법 : 차를 내는 행위뿐 아니라 차 맛이나 차의 정신까지를 포함하며, 차 따는 법, 차 우리는 법, 차 마시는 법 모두를 포함한다.

주지하는 바,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우리의 행다는 참으로 묘한 형상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순 조선식도 아니고, 순 일본식도 아니었다. 수많은 차 선생의 입장은 든든한 반석이 아닌 눈총을 받는 입장인 경우가 더 많았었다. 양반 가문에서 차(茶)를 통한 전통은 미미했고, 일본식 차 마시는 법이 올바른 법도인 양 행세를 해 왔다.
 
차 마시는 일과 그 주변적 행위가 문화적인 형태이기에 평범한 가정에서는 흉내도 내지 못했고, 속칭 상류에서의 유형이 근년에 이르러서야 여러 계층이 공유할 수 있도록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는 사람만 알던 보이차의 이론이 흔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차인 확대의 결과라 하겠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는 역사적 배경 속에 사람들이 살아오던 정신적, 물질적, 생활적인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일본은 실생활에서의 음료로 굳혀진 중국에 비해 역사적, 지배 이념의 특수성, 계층의 분화 등 철학적, 이념적 특성을 가지고 있되, 그 근본적 외양과 형태로 중국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차 마시는 일에 굳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끌어 들이지 않더라도 한 . 중 . 일 세 나라가 가까우면서도 참으로 특성이 고유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어떤 이념과 방식을 가지고 차 마시는 행위를 완성시켰을까? 진실로 골똘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다법을 배우고, 중국에 가서 이국적인 것에 자격증도 가지고 오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나라 이 땅의 사람들이 가지고 또 공감하는 우리네 전통 행다법은 어디에서 배워오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가? 일부 우리식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발표한 것은 외면당하거나, 정통이 아니라는 식의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다법이 일본식(日本式)이라는 현실은 그러한 바탕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주변은 확대되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진실된 전통성이 있는 행다법을 보여줄 의무가 차인들에게 있다. 우리는 유가식(儒家式) 행다가 있었고, 전통 가내(家內) 행다법이 남성, 여성을 구분하여 존재 했었다. 관혼상제에 존재했으며, 그 의식의 수준과 차의 선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연습은 많이 되었다. 이젠 우리의 행다법이 나타날 차례가 아니겠는가? 외국의 형식이 모방되어 펼쳐진다 해도 그 내면에 우리의 정신이 표출될 수 있을까?

혹자는 일본식 다도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시간적인 이유를 들어 한국식 행다법을 형성케 했다고 한다. 일부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30년간 차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초창기 차인들이 일본의 전차도 및 말차 행다를 모방하면서 행다 발표를 해 왔다.

양반 문화가 소멸되다시피 한 근대화 이후 식민 산업, 그 후의 전환, 다시 산업화된 사회의 조류는 그 이전의 전통성을 까마득히 망각하게 만들었던 것의 주된 이유라 하겠다. 현재 우리의 행다법은 일본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100% 우리식도 아니다. 일본식 행다법에서 생략되고, 사찰에서의 선다법이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에서 표현되고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서의 전차도는 각 유파마다 국지적인 특성이 나름대로의 철저한 동작이 이미 굳혀졌고, 그 본질인 차의 맛과 사용되는 기물의 수준을 논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은 차의 맛으로까지는 접근치 아니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면에 치중하고 있다. 혹여 비판받을 현실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발전은 긍정적인 것이다. 의례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외양상의 절차와 격식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런 형식적인 면이 굳어져야만 그 후에 차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형식을 멀리한 경우에는 높은 평가의 기준이 차 맛에 있겠지만, 행다법에 있어서의 1차적 급선무는 형식의 정립임에 두말할 나위 없다. 중국에서의 선차와 불차,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일련의 중국식 다예표현의 일면을 살펴보자. 생활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튀어나온 문화상품의 성격도 성격이려니와 화려한 동작은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성에 의거했지만 실제로는 근래에 만들어진 행다에 그치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에 따라 행위 하는 것이 수준이다. 우리의 수준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또 외면하면 안 된다. 우리의 수준을 똑바로, 눈 부릅뜨고 봐야 한다.
그리고 다음 계단이 무엇인지 착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런 후에 우리의 격식과 예절을 지니고 의례가 넘쳐나고,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기품 있고 잘 갖추어진 한국의 행다법을 만들고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내면에 철저히 다듬어진 우리의 철학과 의식이 살아 숨 쉬고 찻잔에서도 한국차의 향과 맛이 그득히 넘쳐흐르는 한국의 행다법이 자연스레 정립이 될 것이다.

무조건 모방하고 제 것인 양 만들어 보이는 일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과 역사적 유구함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중국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이다. 한국의 행다법이 무엇이 될까,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행(行)하고 생각(思)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렵게 베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과 몸으로 체득하여 이루어지는 생활이며, 더 나아가 전통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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