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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17 자연주의, 첫 번째 찻자리 <홍인(紅印) 과 와인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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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홍인과 와인의 만남은 2006년 10월21일 처음으로 참가인원 전원 회비 10만원을 내고
차맛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인터넷으로 공지하고 신청받은 최초의
찻자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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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인급 보이차 홍인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차 꾼으로서는 복이었다. 평범한 찻자리에서 벗어나 이름난 명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茶人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그러한 명차들을 순례하며 그 자리를 만들어 가질 수 있는 첫모임이 대구 수성구에 있는 자연주의에서 만들어졌다.

지금껏 무엇을 보았네, 어떤 것을 마셔 보았네, 어디에서 그런 자리가 있었네 하는 마치 전설같은 말들이 있어 왔다. 차인중에 유독 그 깊은 세계에 빠져 궁극의 차를 좇아 매진하는 이들을 흔히 차꾼이라 하는데 바로 그와 같은 애호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진정한 차의 세계에 빠져보았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찻자리가 다수 있어 매니아들의 순례가 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찻자리가 자리매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같은 모임과 차후 정례적인 운영이 약속된다면 유한한 세상사의 가장큰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줄 차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우리도 이런 찻자리가 만들어 질 때가 되었으며 일반을 넘어서기에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시대는 지났다. 국제적으로도 접하기 힘든 이러한 찻자리가 만들어 진다는 것은 우리 차꾼들도 만만치 않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까?


찻자리를 마치고 주인의 후기


2006년 10월 21일 오후 6시 20분부터 시작된 <자연주의>에서의 찻 자리는 분명 새로운 시도였다. 10여명 정도의 참석을 예정하고 기획된 찻 자리였으나 의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21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규모의 찻 자리가 되어 주관하신 분들이 꽤나 땀을 흘리셨다. 

5시 30분부터 한분, 두 분 모이신 참석자들은 행사의 시작을 앞두고 몇 가지 건강약초를 넣어 달인 우리토종 대추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셨다. 멀리 서울과 경기도 광주에서 그리고 부산에서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행사의 시작은 예정보다 조금 늦은 6시 20분부터 잣죽과 궁중떡복기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로 시작 되었다. 식사후 찻 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참석하신 분들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보이차 관련 영상물을 30분정도 관람하였는데 이 영상물은 2002년 10월경 국내에서 촬영된 것으로 복원창을 포함한 100여편의  호자급 인자급과 중다패 번체 칠자병자 까지 국내의 모 소장가가 가지고 계셨던 보이차를 통채로 개봉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으로 이제 국내에서 두 번 다시는 찍을 기회를 가질 수가 없는 희귀 자료이다. 정식 찻 자리는 대만 청차인 ‘대우령’  2가지를 같이 우려서 그 맛과 향의 차이를 느껴보며 입안의 침샘을 개운하게 자극시켜 놓고 드디어 오늘 찻 자리의 주인공인 50년대 인급 푸얼차, 홍인을 우리기 시작하였다.

팽주로 앉으신 광덕사 주지, 경원스님께서 차에 대한 좋은 말씀을 하시면서 홍인 70g을 커다란 은주전자에 넣어 우려내셨고  우려진 홍인은 그야말로 인급차의 왕자답게 웅장한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 주전자 속에서 우려진 홍인은 4개의 숙우에 옮겨져 참석자들의 찻잔에 담겨졌다. 홍인의 맛과 향은 참석한 모든 이들 의 입 안 가득, 마음 가득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다.(참고로 2004년 3월 13일 홍콩 신성다장의 보이차 음다회 에서는 참석인원 120명에 람인 철병(50년대) 반편(180g가량)이 쓰여 졌다.)

홍인의 향기가 아직 입안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경원스님께서 다음 찻 자리에서 품다할 차로 1930년대의 조기 경창호를 주최자에게 요구하시며 오늘 가볍게 맛보야 되지않느냐고 강한  압력을(?) 가하신 덕분에 한편의 완벽한 상태의 온전한 경창호가 찻 자리에 등장하였고 그 한편에서 뜯어진 30g의 경창호는 은주전자로 들어갔다. 첫잔을 마시자 홍인의 장중함이 남아있는 입안에서 경창의 깊은 은은함이 느껴지며 순간 시원함이 목 줄기를 타고 흘렀다. 참석한 분들은 경창의 오묘한 맛과 향을 칭찬하며 홍인과 경창을 함께한 오늘의 이 찻 자리는 이젠 전설과 역사라고 하신 어느 분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차를 품다하는 동안 경원스님은 ‘차는 건강에 도움을 주는 작용을 하지만 결코 약이 아니며 심신의 수련에도 분명하게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차는 차일뿐 이지 결코 약이나 특수한 물질이 아니다. 이것은 보이차도 마찬가지이다. 차의 본질은 덤덤한 가운데 오미를 품고 있는 차의 성품이다. 우리는 오미를 모두 담은 차의 성품을 통해 수신하고 수심하기위해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다.’ 하시며 차를 마시면서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들에 대한 지적을 해 주셨다.


 10시가 조금 넘어 보이차 품다를 마치고 주최 측 안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다구들 중, 다관중심으로 진열된 전시품과 호자급, 인급 보이차들의 내표와 내비가 한권 가득 담겨진 스크랩북과 함께 10여 편의 보이차를 감상하는 동안  와인 테이블이 셋팅 되었고  매다옹 선생님의 건배로 잔을 부딪히며 치즈와 함께 홍인처럼 붉은 와인을 가볍게들 나누었다. 어느 듯 11시가 훌쩍 넘어서자 멀리서 오신 분들은 한분 두 분 다음번 찻  자리를 기약하시며 일어 나셨고 아쉬움의 끝을 끝까지 붙잡은 최후의 일곱 분이 산정무한에서 제다한 청유차 산·정·무·한 으로 깊은 가을밤 속 풋풋한 봄의 향기를 맡음으로 즐겁고 건강한 차 문화를 만들어 가는 그 첫 걸음인 찻집, ‘자연주의’의 <홍인과 와인의 향기>를 마시며... 라는 주제를 가진 가을밤  찻 자리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그렇게 끝을 맺었다.




홍인紅印 이란?  ----------<다른 방식으로 구분하여 정리 박스 처리해도 됩니다>


푸얼차(보이차)가 오늘날까지 신드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홍인과 같은 인자급 보이차의 공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인자(印字)’란 보이차 겉 포장지에 글자를 인쇄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소위 호자급의 골동보이차 에는 포장지 자체가 없었습니다. ‘호자(号字)’란 개인 차 상점의 상호를 뜻하는 것으로 차 상점들은 자신들의 상호와 제품에 관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새겨 찻잎과 함께 압제하였으며, 이러한 종이를 가리켜 ‘내비(內飛)’라고 합니다. 내비와 함께 7편 1통의 대나무 껍질 포장에 넣는 ‘내표(內표)’는 모두 차 상점의 선전물로 사용됐으며 때로는 차의 진위를 살피는 징표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만약 당시 보이차에 이러한 내비와 내표 마저 없었다면 보이차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이차가 겉 포장지에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52년부터로, 중국이 공산화된 후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 재산의 공유를 실현하여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이상이자 신념에서 시작된 것으로 차를 관장하는 각 지방의 국영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중국차를 대표할 수 있는 심벌마크를 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1950년 보이차를 관장하는 회사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 개명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 조승후(趙承煦)라는 사람이 설계한 도안인 ‘팔중차(八中茶)’가 중국내의 모든 차상품의 공식로고로 등재됩니다.


상표 등록된 이 도안은 8개의 붉은 ‘중(中)’자로 둥근 원을 만들고 그 중앙에 녹색 ‘차(茶)’자를 새긴 마크로 되어있는데 여기서의 ‘중’자는 중국을 말하고, ‘팔(八)’이란 발(發)의 음을 빌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색상에 있어 ‘중’자를 붉은 색으로 택한 것은 공산당의 상징적 빛깔과 길상(吉祥)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차’자를 녹색으로 쓴 것은 찻잎의 원색에서 비롯된 발상입니다.


(그런데 홍인은 ’차‘자를 비롯한 포장지 전체가 붉은색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의 낙후한 인쇄술과 작업자의 나태한 자세에서 비롯된 합작 탓으로 그렇게 몇 년간 ’차‘자도 홍색으로 인쇄된 포장지의 차가 후일 홍인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이후 등록 도안대로 ’차‘자가 정상적으로 녹색인쇄 되어 포장된 차는 녹인 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차제품의 특성상 그 생산 년대가 다르기에 당연히 홍인과 녹인의 맛은 다릅니다)


‘팔중차’ 로고가 탄생된 후 보이차는 모두 개별 포장되어 출하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개인 차 상점의 무포장지 보이차 제품(호자급)의 근거지가 이무(易武)였다면 공산화 이후 국영업체의 포장지 있는 보이차 제품(인자급)의 중심지는 맹해 라는 점입니다. 중국의 공산화는 보이차에 있어 포장지의 유무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기점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인자급 보이차의 하나인  홍인은 근대 신기술(쾌속발효공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완전한 의미의 전통적 보이차입니다. 즉 악퇴(고온다습한 곳에 쌓아두어 발효를 촉진하기)라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것이 홍인이며, 철저하게 건창(乾倉)으로 보관된 것이 홍인인 것입니다. 홍인은 그래서 보이차의 전통적 맛을 상징하는 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 맛은 매우 시원하며! 달고 부드럽습니다. 또한 악퇴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50년이 넘게 흘렀어도 우리고 난 차의 찌꺼기가 왠 만큼 맑은 풀빛을 띱니다. 따라서 오늘날 홍인은  많은 이들이 현대 보이차의 기준으로 삼기도하는 매우 귀한 차 가운데 하나로 그 년대가 이미 50년을 훌쩍 넘어서 이제는 골동급의 차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참고자료: 고천(孤荈) 짱유화(姜育發)  <보이차속  인자  보이차> **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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