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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2-3년 전부터 차를 내는 법, 즉 행다법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과거에도 행다법 연구는 계속되어 왔지만 5년 전부터 중국 다예사 제도가 한국 차문화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차의 위상이 흔들리는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중국 다예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단체로 중국을 다니고, 이젠 그것을 영업으로 하는 단체들도 성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차를 공부하는 차인들이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한국차의 행다법 연구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주최, 한국차문화포럼에서 행다법의 비교 연구를 1월 23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 회의실에서 손연숙 교수의 개회사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사진 좌, 가예원 행다법 시연] 이번 행다법 비교 연구에는 ‘가예원’ 전정애(원광대 한국문화학과 박사과정),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은 윤지인(원광대 한국문화학과 박사 과정), ‘한국차문화협회’는 이순옥(전남도립대학 초청 교수), 한국차인연합회, 김길령(원광대 예문화와 다도학과 교수)의 해설로 구분하여 행다법의 시연과 해설이 있었다.

방법으로는 찻상보 걷기, 다관을 예온하여 찻잔에 따르기 등의 동작을 구분하여 각각의 해설 담당자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다법의 비교 연구를 보면서 중요하게 느낌 점은 단순히 행다법을 비교한다고 비교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박정희 교수의 사회로 진행] 참가한 팀에 따라서 다법에 숙련된 사람이 나와서 아주 자연스럽게 시연을 보이는 곳과 법인체 이름으로 참가하였지만 법인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을 보면서 아쉬운 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행다법 연구는 어려운 것이다. 어떤 수준으로 비교 연구를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 즉, 방법론적인 면을 더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행사 마지막에는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이 행사에 참여한 많은 분들도 느낄 수 있는 궁금한 점을 필자가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질문을 하였다.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의 행다법에서 물 항아리와 화로의 위치가 찻상 앞으로 나와 있는 것은 차를 내는 사람의 동선에 상당한 무리가 있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공개 질의를 하였다. 답변은 찻자리에서 손님이 찻상을 마주하는 자리가 아니라 손님 옆에서 차를 내는 것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질문으로 차를 다 내고 나서 주인의 찻잔을 찻상 아래에 두는 것을 겸손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질문이 있었다. 이 부분은 멀리 광주에서 참여하신 혜명다례원 장문자 원장님께서 답변을 하였고, 설옥자 원장님도 보충 설명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블로그에서 상세한 글을 올리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두 분 답변의 핵심은 원칙적으로 겸손이라는 입장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지만 아직까지 이론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점도 하나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세대보다 좀 젊은 축에 든 사람의 입장에서 겸손의 한계를 생각하고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도 좀 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아서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오랜 기간 행다법을 연구한 사람들까지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사진, 설옥자 원장의 행다법에 대한 설명] 이번 행사에 가예원 설옥자 원장이 참여하여 비교 연구 발표장에 열기를 더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더 다양한 방법으로 발표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설옥자 원장님의 1분 인터뷰/

원장님, 오늘 비교 행다법을 보시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하나 부탁드립니다.

설옥자 원장 답변 : 하나의 행다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둘째 정신 상태가 바로 서야 하고, 셋째 한국의 차를 영원토록 남기게 하려는 마음과, 넷째 우리 옷 바로 입기, 다섯째로 우리 절 바로 하기 등이 모두 어우러져야 한다. 단순히 손 동작 연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였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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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음악이 있는 다회를 지난 금요일 포스팅을 했지만

블로그 사정으로 그 글을 삭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포스팅 했는데 다음뷰에 홍차에 대한 제목이 삭제되지

않고 이미 검색에서 제목이 변경되지 않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그래서 신규 포스팅 한 글을 삭제하고

이 공간은 조만간 홍차에 대한 다른 글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혹시 홍차에 대한 제목을 보고 찾아오신 분께는 사과드립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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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길령
출생 : 1961년생
현재 : 원광디지털대학교 외래교수
         청백다례원 실장
학력 :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 (예절다도학 전공)
        
원광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문화학과(예다학 전공)
        
문학박사

<논문>
박사학위논문: 嶺南地域 不遷位祭禮에 관한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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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文抄錄

嶺南地域 不遷位祭禮에 관한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한국문화학과
김 길 령

朱子學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는 유교적 예학이 강조되는 사회였다. 이에 따라 국가사회의 지도자격인 수많은 인물과 명문거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忠孝를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와 함께 조정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있어서도 崇慕의 대상으로 이른바 不遷位祭禮를 받게 되었다.

불천위제례는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덕이 높아 그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실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조상의 기제사를 일컫는다. 본래 4대조 이상이 되는 조상은 묘제의 대상이 되는데 불천위에 해당하는 조상과 그 배우자에 대해서는 영구히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본 논문은 불천위제례의 성립과 전개 현상을 특히 嶺南地域을 중심으로 연구 조사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우선 영남지역 문헌가운데 불천위제례의 개념과 내용을 담고 있는 禮書를 고찰하여 그 특징을 규명하고, 영남사림의 학자들로 현재까지 불천위제례가 이어지고 있는 영남지역 종가들을 대상으로 그 사례를 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불천위제례의 원형을 탐색하고 관련 문헌과 비교 분석하여 사상적 특징과 생활문화적 의의를 밝혀본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남지역에는 조선사회에 활약했던 사대부 종가가 많았던 만큼 禮學에 관한 수많은 문헌이 찬술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가운데 불천위제례와 관련된 대표적인 문헌으로 柳長源의『常變通攷』(1783)에 기술된 通禮와 祭禮, 許傳의『士儀』(1870)에 포함되어 있는 如在篇, 宋浚弼의『六禮修畧』(1918)의 祭禮 부분에서 영남지역 불천위제례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본 것이다.

이들 문헌에 나타난 불천위제례의 특징으로서 사당은 의례를 위한 공간의 중심으로 정침이나 제청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또한 불천위제례를 지내기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경건하게 갖는 재계는 조상의 기운과 감통하기 위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준비절차였으며, 제구는 성실과 공경으로 관리해야 하므로 절대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남에게 빌리거나 파는 일이 없도록 경계되었다. 참례자들의 제복은 지위에 따라 구별되며 불천위제례에 참여하는 후손들은 제복을 갖추어 입고 고요한 마음으로 정갈하게 조상을 뵙는 준비를 하였다.

제수는 세 문헌 모두 해가 밝으려는 새벽인 궐명에 진설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으며, 절차는 參神, 降神, 進饌, 初獻, 亞獻, 終獻, 侑食, 闔門, 啓門, 辭神, 納主, 徹순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불천위제례의 전 과정은 후손이 조상을 섬기는 奉獻의 의례인 동시에 그것은 제례를 행함으로써 조상으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는 일종의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둘째, 영남의 지역별 불천위 현황은 안동 50위, 성주 3위, 경주 8위, 고령 1위, 현풍 2위, 함양 4위였다. 조선초기에는 국불천위, 도불천위로 분류되었으나 현재는 각 종가마다 구분하지 않고 불천위제례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천위를 모시는 것은 해당 문중이나 가문의 영예일 뿐 아니라, 그 지역에서 학덕을 갖춘 현인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자부심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므로 불천위제례의 행례를 통해 유교적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반영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본 사례조사에서는 영남지역 사림파인 고령 일선 김씨 文忠公 金宗直(1431~1492)종가, 경주 월성 손씨 蘘敏公 孫昭(1433~1484)종가, 함양 하동 정씨 文獻公 鄭汝昌(1450~1504)종가, 현풍 서흥 김씨 文敬公 金宏弼(1454~1504)종가, 안동 영천 이씨 孝節公 李賢輔(1467~1555)종가, 경주 여강 이씨 文元公 李彦迪(1491~1553)종가, 안동 진성 이씨 文純公 李滉(1501∼1570)종가, 성주 청주 정씨 文穆公 鄭逑(1543~1620)종가를 대상으로 不遷位祭禮의 행례절차를 살펴보았다.

주요 특징을 간추리면, 각 종가별 祠堂의 위치는 정침의 동쪽 혹은 동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불천위제례의 장소는 정침이나 祭廳이었다. 또한 제사를 모시기전 몸과 마음을 정결히 준비하는 齊戒에 대해, 김굉필종가에서는 3일전에 하고 있음에 반해, 나머지 7종가는 문헌에 명시된 대로 모두 하루 전에 재계에 임하고 있었다. 祭具는 8종가 모두 유기를 사용하였다.
 
祭器의 보관은 안채, 안방, 대청, 주방 등에 보관하며 하루 전 깨끗이 씻어 준비하였다. 祭服의 경우 8종가 종손의 제복은 갓 혹은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는데 소재나 색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종부는 천담복이나 한복, 평상복인 화려하지 않는 옷으로 성복을 하였다. 祭需의 경우 이황 종가에서만 4열로 진설한 반면, 7종가 모두 『육례수략』에 제시된 바와 같이 5열로 진설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종가별로 제수를 장만하는 규모와 분량은 다른 기제사와 구별되어 성대하게 준비하며 최대의 정성과 최고의 솜씨를 발휘코자 한다. 節次는 공통적으로 제상설치, 신주출주, 제수진설, 참신, 강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유식, 합문, 계문, 사신, 납주, 철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셋째, 불천위제례의 대상은 유교사에 있어 성인의 반열에 선 현자나 영웅들이다. 이러한 불천위제례의 정신적 가치는 忠誠과 孝敬의 실증적 귀감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불천위를 둘러싼 종가와 그 문중, 혼인과 학제는 유교적 생활의 연장선에 있고 유교의 변화와 혼란 속에서 문화생활을 지속시켜갔다. 사림과 문중이 불천위로 추대해온 수백 년의 노력이 제례문화의 상징성으로 지역의 민속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현대사회에서 불천위제례의 생활 문화적 의의를 찾는다면, 조상의 행적과 공훈을 되새기고 그 분을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귀감의 대상으로 여기게 됨으로써 孝에 대한 교육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장이 된다.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화 사회에서 불천위제례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뿌리의식을 고취시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또한 그것은 生과 死를 일관하여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종교적 의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나아가 불천위제례는 삶과 죽음이라는 큰 관문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삶의 근원과 순환성을 알아 현실 속에서 경각심을 일깨우며, 제례에 참석하는 가족, 친지, 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맡은 구실을 생각하며 나아가 질서와 조화로운 인간관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ABSTRACT

The Study on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n Youngnam Province

Kim, Gil-Ryeung

Dept. of korean Culture

The Graduate School of Wonkwang University

Josen dynasty which chose Juja learning as ruling spirit is a society emphasizing Confucian ideas. The Confucian ideas made the dynasty produce many celebrities and mighty clans as a leader. Since the Joseon dynasty emphasized the loyalty, they were regarded as a respectful group in court and local society. As a result, they were celebrated in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s a meaningful ceremony authorized by a nation for the people who contributed to a nation or a moral person so a nation permanently preserves these people in a specific place. Originally, some older ancestors are regarded as a memorial service and some of them are celebrated permanently every deathday.

This dissertation was written for researching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n Youngnam province.First of all, I will examine some books including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among bibliographs related to Youngnam province and research some Youngnam families which have been succeeding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Based on such materials, I will examine the archtype of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and at the same time research some characteristics of this ceremony by comparing with other bibliographs. The results of my dissertations are as follows

First, since there were many powerful illustrious officials in Youngnam during the Jeoseon dynasty, many books related to courtesy learning have been succeeded. Among them, I referred to three bibliographs: Sangbyuntonggo(1783) written by Ryu Jangwon, Sawu(1870) written by Heo Jeon, and Yukraesuryak(1918) written by Song Junpil.

The characteristics of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n each bibliograph are that a shrine is the central place for the ceremony and it usually located in the East side. Cleaning one's body and spirit called 'purification' before the ceremony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is a procedure for communicating with their ancestors. Furthermore, ritual utensils which need to be preserved very carefully can not be used as other purposes and these can not be sold to others. Ritual robes are different form each position in the ceremony and descendants who participate in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prepare for the ceremony by cleaning their body and spirit through the ritual robes. The three bibliographs that I referred to in this paper show that things needed in the sacrificial service should be prepared at dawn and the procedure is as follows: Chamsin, Gangsin, Jinchan, Choheon, Aheon, Gongheon, Usik, Habmun, Gaemun, Sasin, Nabju, Cholwui.The whole procedure of the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s that descendants respect their ancestors and at the same time they are auspicious ceremonies.

Secondly, the present condition of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n Youngnam is as follows: Andong(50th), Sungju(3rd), Kyungju(8th), Goryung(1st), Hyunpung(2nd) and Hamyang(4th). In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divided into both Kukbulchunwi and Dobulchunwi, but now each family does not distinguish these two services. Worshipping Bulchuwi sacrificial ceremony is regarded as the pride of a family and it shows there were many sages in the area. On top of that, it also shows descendants' passion to preserve and develop Confucian culture.I studied the procedure of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based on some famous families in Youngnam province and they are as follows: the family of Kim Jongjik(1431-1492) with goryung Ilsun Kim, the family of Sohnso(1433-1484) with Kyungju Wulsung Sohn, the family of Jung Yochang(1450-1504) with Hamyang Hadong Jung, the family of Kim Guningpil(1454-1504) with Hyunpung Sohong Kim, the family of Lee Hyunbo(1467-1555) with Andong Youngcheon Lee, the family of Lee Unjeok(1491-1553) with Kyungju Yugang Lee, the family of Lee Hwang(1501-1570) with Andong Jinsung Lee, and the last family of Jung Gu(1543-1620 with Sungju Chungju Jung.

The main characteristic of each example is that each family's shrine is located in the east or northeast side. The place of the ritual ceremony is the main rome in the house and the term "purification" means one cleans body and spirit. The family of Kim Guningpil(1454-1504) started the purification procedure three days earlier, and the rest seven families did it one day. The whole eight families used brass ware as ritual utensils. Dishes used in the ceremony were usually preserved in hall, room or kitchen and these were cleaned before doing the ceremony. In case of robes, eight families wear Korean hat or black hat made of black cotton, but both materials and colors for these robes were different form each other. Especially, wives usually wore Korean clothes called Hanbok or casual clothes. In case of things needed in the ceremony, only the family of Lee Hwang arranged in forth line and other families did it fifth line as the book. Yukraesuryak(1918), indicates. Each family carefully prepared for the whole things in the largest scale because it is the most important ceremony. The procedure is ordered as follows: Sinjuchulju, Gaesujinsul, Chamsin, Gangsin, Choheon, Dokchuk, Aheon, Gongheon, Usik, Habmun, Gaemun, Sasin, Nabju, Cholwui.

Third, the focus of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s sage respected as a holy man, a humanistic person, or heroes. The phenomena of this ceremony is based on faithfulness and respectfulness and it is consolidated as a role model for people and descendants Family, marriage, and the education system related to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s a part of Confucian life and such a valuable system have been preserved while experiencing changes in Confucian values.

Bulchunwi which many powerful ancestors have been preserved for hundreds years are now maintaining local customs as a symbol of traditional culture. If we find some values of Bulchunwi sacrificial ceremony in modern life, it is educational value that many people remember their works and respect them sincerely. This meaningful ceremony makes us realize the self-existence in a nuclear family society and at the same time strengthen unity. Moreover, the ceremony links life and death. It is also beneficial because the ceremony makes us realize the true meaning of life, learn the originality of life. By doing so, we will be able to be aware of our life in a society. Lastly, the ceremony also plays an important role in forming harmonious relationship among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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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논문의 초록은 원광대학교 한국문화학과 예다전공 문학박사 김길령의 학위논문의 초록입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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