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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Y-W_tQw-OU

명나라 초기 선덕년제
[청화백자 해수운용문 편병]이다.
태질이 순정하고 시유한 백색 바탕이 온화 한데다 기물의 전체를 장식한 청화 발색 역시 푸근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다

목덜미는 당초문과 
길상吉祥 화훼문을
둘렀고 어깨는 견장문, 몸통 전체는 소마리 青料로 바다의 푸른 파도를 가르며 솟구치는 역동적인 두마리의 龍이 앞뒤로 비늘을 번쩍이며 구름을 이고 있으니 이름하여
青華白瓷海水雲龍纹扁瓶이다

현제 중국 南京박물관에도 이와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선덕년제 작품이 한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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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댓글

세련된 미나 정교성은 우수해 보이는데 예술성이라는게 그런것보다는 독창성, 개방성, 해학성, 추상성, 창작성, 상징성등등을 고려해보면은 국뽕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중략>-

잘모르는 남의나라 도자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도자기들도 소개하실 수 없는지요.

 

댓글에 대한 답변 / 김덕기

사실 고려 청자나 조선시대 자기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흉내낼 수 없는 깊은 정서가 배어있음을 부인 할 수 없겠습니다 서화.건축.공예품 역시 그 섬세하고 질박한 격조는 절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자연미가 베어있지요.. 순한 마음에서 출발한 艺 보여주기 위한 교묘한 技 차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것이라는 애국적 발로 가 아니고, 손 재주와 심성에서 우러난 내공의 차이로 봐야할 것입니다. 좋은의견 반갑고 고맙습니다. 아울러 명나라 선덕황제는 1326년이 아닌 1426년 부터 시작된 것임을 바로잡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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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다석tv

산센케(三千家)에 관하여

산센케는 다도유파 중 오모테센케(表千家)우라센케(裏千家)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를 총칭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센리큐(千利休)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1591년 할복을 명받고 죽게 된다. 이후 그의 계보를 이어받은 자손은 리큐의 양자였던 쇼앙(少庵)이었고, 쇼앙은 그의 아들 소탄(宗旦)에게 대를 물려주게 된다. 소탄은 조부가 권력을 가까이하여 할복을 당하게 된 이유에서 인지, 평생을 권력에 가까이 가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소탄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모두 권력자의 집안에서 차선생을 하게 하였다. 이후 에도시대가 되면 첫 번째 아들을 제외하고 둘째는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셋째는 오모테센케(表千家), 넷째는 우라센케(裏千家)로 나누어져 산센케가 생겨난다.

유파명의 유래를 보면 소탄이 셋째 아들과 큰 길가에 후싱앙(不審庵)을 짓고 살다가 셋째에게 다실을 물려주고, 후싱앙 뒤편에 곤니치앙(今日庵)을 짓고 넷째아들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곤니치앙을 넷째아들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그러한 연유에서 생긴 유파가 오모테센케와 우라센케이다.

다실이 길가 앞쪽에 지어졌다하여 오모테라는 명칭이 붙었고, 뒤쪽에 다실을 지었다고 하여 우라라는 명칭이 붙게 된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다른 집안의 일을 보다가 무샤노코지(武者小路)라는 지역에 칸큐앙(官休庵)이라는 다실을 짓고, 센케집안을 이어가면서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라는 유파가 만들어 지게 된다.

youtu.be/LPHmj-CzIBE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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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TV 메인

2020319일 밤, 유튜브 다석TV 계정을 잘못 다루어 4년간 작업한 169개의 영상이 삭제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최근 작업한 영상 외에는 백업해두지 않아서 복원이 불가능하여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938명의 구독자는 ‘0’이 되었습니다.

긴급히 계정을 만들어 최근 작업한 내용만 복원하고있습니다. 그 외 교육용 자료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좀 더 수준 높은 교육용 자료로 만들어나가겠습니다. 그동안 참여해 주신 선생님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우선 긴급히 공지를 드립니다.

박홍관 배상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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