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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익보이차 여의도점

차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보이차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다. 그래서 중국, 대만, 홍콩에서 보이차 마니아들은 보이차를 상시 마시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한국에도 보이차 광풍이 분지 10년이 되는 시점에 층층이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지 차를 접하는 수준에 따라서 보이생차나 숙차를 마시고 있다.
이제는 골동보이차는 옛날 이야기로 생각할 정도가 되었으며 생차가 주류를 이류는 현상이다.

대익보이차 여의도점 김경우 대표

이 시점에 중국에서 보이차 차업으로는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는 "대익보이차"가 한국에 정식 수입되고 이제는 전국 규모의 영업점을 늘려나가고 있다. 특히 맹해차창이 민영화 되면서 '대익그룹’으로 변경된 대익보이차는현재 국내외의 보이차 상표 가운데 가장 지명도가 높은 회사가 되었다.

대익그룹은 차업계에서 보이차에 투자를 한다면 “대익보이차”라고 인식할 만큼의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고 한국 보이차 시장 확대를 위해 서울에 지사가 설립되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큰 베팅을 한 사람은 서울 조계사 옆에서 운영하는 명가원 김경우(사진) 대표이다.
김경우 대표는 보이차 전문점 “명가원”은 그대로 두고 직장인이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국회의사당 건너편 상가지역에 대익보이차 여의도점을 오픈하였다. 보이차 가운데 흔히 골동보이차라고 하는 노차를 전문적으로 취급한 사람으로서 ‘보이생차’, ‘보이숙차’를 취급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인데 김대표는 커피 일색인 우리나라 음료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싶다고 한다.
직장인 들이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테이블

보이차에서도 원두커피점 같이 메뉴를 개발하여 우리나라 젊은이 들의 입맛에 맞는 차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다. 향후 여의도점 뿐 아니라 서초동에서도 오픈을 준비하는 것에 기대를 많이 하게 된다. 
이번 일의 성패에 따라 한국의 차업에 큰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대익보이차 관련 지난 기사
2013/12/25 - 대익 보이차 한국지사장 증신생(曾新生) 인터뷰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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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 시장에서 보이차의 열풍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그 시장 파괴력은 상당했다. 일반 사람들이 녹차 다음으로 차 이름을 이야기하라면 ‘보이차’라고 말할 정도로, 차를 마셔보지는 않았어도 그 이름은 알고 있다고 할 정도다. 과거 최고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맹해차창이 민영화되면서 ‘대익그룹’이란 이름으로 변경되었고, 현재 국내외의 보이차 상표 가운데 가장 지명도가 높은 회사이며 ‘대익보이차’로 많이 불려진다.

최근 서울 종로구에 있는 보이차 전문점 명가원에서  ‘대익보이차’ 대리점을 1월 초순 여의도에 오픈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인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대익한국지사가 설립되었고 한국지사장으로 발령받은 증신생(曾新生, 38세, 사진) 대표를 12월 24일 서울에 오픈한 한국 지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요약 정리한 인터뷰 내용이다.

1. 한국에 진출한 대익의 공식 명칭이 어떻게 되는가? ‘한국총판’인지 ‘한국지사’인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한다.
공식 명칭은 “대익인터내셔날코리아 주식회사”이다.

2. 대익집단에서 한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직접 진출한 이유가 있는가?
한국은 최근 보이차 시장이 크게 형성되고 있으며, 차와 그 문화 전반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거 같다. 보이차에 대한 인식도 좋은 편이고 수요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판단되어 정식으로 법인이 설립되었다. 한국의 차 소비자는 보이차와 함께 차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높고 차와 그 문화를 좋아한다는 점을 이전에 조사를 해보았다. 그래서 이번에 서울 진출을 결정하게 되었다.

 3. 한국에서 “대익인터네셔널코리아” 지점은 몇 개로 제한되는가?
중국에서도 전체 8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방의 특성에 맞게 지점 수를 제한하는 정책을 써왔다. 한국은 아직 지방마다 지점의 총 개수를 몇 개로 할 것인지를 정하지 않았다. 지역별로 차 소비량을 검토하고 임대료나 대리점 유지비용 등을 참고하여 내년에는 지역별로의 대리점 할당을 정할 것이다. 아직은 정해진 것이 없다.

4. 대익대리점 운영방식에서 대리점과 특약점은 어떻게 다른가
대리점은 대익보이차의 비중이 80%이상 되고 20% 정도는 그동안 판매해 왔던 차도구 관련 제품들을 그대로 전시판매 할 수 있다. 특약점은 이와는 반대로 기존에 판매해온 제품을 그대로 판매하는데 대익보이차 제품이 20% 정도는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5. 중국에는 보이차 전문 생산공장이 많은데 유독 ‘대익집단’에서 생산된 차와 대리점에 수요가 몰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맹해차창은 1938년에 설립되었다. 차창 설립당시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만들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무엇보다도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사명감과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차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70년의 역사가 '품질 보장'이라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중국에서 핸드폰 하면 한국의 삼성에서 만든 갤럭시S 시리즈를 구입한다. 왜 그렇겠는가 삼성이 만들면 품질이 좋다는 인식이 지배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맹해차창의 품질을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에 민영화가 되어 그 DNA를 그대로 '대익그룹'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대익'하면 믿을 수있는 보이차로 인정되어 많은 소비자들의 사랑받는 차가 되었다고 본다.

6. 대익에서는 요즘 많이 유행하는 노반장 제품이 없는 이유가 있는가?
 차 산지에서 보면 노반장 고수차 산지의 비중은 상당히 작은 편이다. 대익에서는 중국 전체를 볼 때는 극 소주의 노반장 차를 만드는 것 보다는 큰 범위에서 보면 모두 포랑산 지역의 차이기에 포괄적으로 포랑산에서 생산된 순수 찻잎으로 만든 차를 제품화 하였다. 그것이 ‘포랑유가체’. ‘포랑공작’, ‘춘조’라는 차가 중국에서 생산되어 판매되었다. 한국에는 이 제품을 공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7. 한국에서 대익보이차 문화교실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서울에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 예정인가. 교육을 하게 되면 유료인가 무료인가?
지금까지는 본사에서 모든 것을 관리해 왔다. 내년에는 ‘대익다도원’을 설립될 계획이다. 한,중,일 차에 대한 전문교육기관으로 장기교육이 가능하다.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은 유료로 하지만 대익보이차에서 신제품이 나오거나 일반적으로 보이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교육은 무료로 진행된다.


[석우미디어 동영상] 증신생 한국지사장의 인사말을 관리부장 반리(PAN LI)의 통역,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위 사진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증진생 한국지사장은 중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차학을 전공했고, 1998년부터 보이차 공장에서 몸을 담고 보이차를 연구해 왔다. 맹해차창이 민영화되고 2년 뒤인 2006년 입사한 후 7년 만에 한국지사장이 되었다. 향후 한국의 보이차 시장의 교두보가 될 서울에서 그의 역량을 기대하게 된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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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생산, 대익보이차 칠성인월(용인 8582)

중국에서 보이차 생산 차창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대익(구, 맹해차창)에서 칠성인월(용인)고급 선물용 세트가 발매되었다. 시중가 100만원. 실제 이 상품을 들어보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무게와는 전혀 다르다. 건장한 남자가 들 수 있는 무게로서 안의 내용물은 2단 포장이다.

차 이름은 ‘용인 8582’ 2013년 생산품이다. 한국에서는 선물용 세트 형식으로 만든 보이차는 판매가 쉽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중국에서 구매해 오는 것은 있겠지만 보이차 전문점에서는 만나기 어렵다. 이번에 이 상품이 ‘차도구옥션’www.tauction.net 에서 시작가 450,000원부터 경매가 시작된다.(사진 참조) 2단 중앙에 보이는 차는 메인차로서 357g 그 외는 100g이다.

대익보이차 칠성인월 고산운상
칠성인월 301, 순향사계

대익보이차에서 출시된 칠성인월 시리즈 중에 '칠성인월 단청' 차는 시중가 60만원 경매 시작가 250,000원이다. 그 아래급으로는 칠성인월 '고산운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거래될 수 있는 것은 '칠성인월301' 순향사계(醇香四季) 말리청병(茉莉青饼)으로 전체 세트 중량은 537g으로 운남 맹해 대엽종 쇄청모차엽원료로 하였다.

차우리나라 정서와는 좀 다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보이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제조회사에서는 서로 경쟁이 되는 가운데 좋은 아이디어로 즉시 즉시 신상품이 출시되고 있다. 이런 선물용 세트는 중국에서는 연말에 기업체 선물용을 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도구의 이해
국내도서
저자 : 박홍관
출판 : 형설출판사 2013.09.25
상세보기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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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맹해차창 생산 7572]

보이차에서 숙차의 계념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굳이 그에 대한 구분을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즘 차인들 사이에 부는 변화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한 때 보이숙차는 먹을 것이 못되고 생차가 좋다고 했던 사람들도 숙차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거나, 숙차도 오래되면 진기가 있다는 말들을 하면서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생차 가격보다 비싼 숙차가 시장에 나오고 있다.

필자는 3월 중순 맹해차창에서 숙차로 만든 7572를 보고 그 중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것을 사진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조명을 설치하고 그 외관을 보면서 느낀 점은 숙차도 이렇게 어린 잎으로 만들면 특별한 맛을 낼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평소 그 차를 마셔왔지만 사진 작업을 위해서 부분 해체하여 병배된 차를 하나하나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삼인행에서 7572 사진 작업을 하고 맛을 본 느낌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차를 시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우리집[삼인행]에는 1992년도에 생산기된 7572가 있다고 하며, 한 번 마셔보자고 하며 통에서 한 편을 꺼내어 맛을 보게 되었다. 숙차를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차와 1992년 즉, 맹해차창이 민영화되기 전에 제작된 차의 맛이 세월 만으로만 비교할 수 없는 맛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차의 외관을 보게 되면 92년도에 생산된 차가 잎이 거칠어 보이지만 병배 기술에 있어서 과거 숙병의 장점을 말 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진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숙차이지만 엽저를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달리 말하면 생차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보이차는 그래서 찻잎이 여리다고, 순료만으로 했다고 해서 다 좋은 차라고 할 수 없는 비법이 있는 것 같았다. 중국의 차연구소에서는 숙차는 5년에서 10년 전후의 차가 가장 보건효과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맛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숙차의 보편적인 약리작용을 떠나서 거부감을 느끼는 점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숙차라도 잘 만든 깨끗한 차들도 많이 있다는 점을 최근 사진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 날 맑고 깨끗하면서 깊이 있는 차 맛을 내준 1992년 생산 7572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늘 편하게 차 한잔 마시고 나오지만 건강한 차 한잔 마시고 나올 때면 주인장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차는 서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끼리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차를 접해가며 서서히 차꾼이 되어가는 동질감은 통(通)이라는 말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20대의 아이들이 무슨 찻 맛을 알까? http://seoku.com/541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 http://www.seoku.com/523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http://seoku.com/442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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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다예연구소(원장 이영자)에 설치된 "보이생차"로 만든 차벽의 일부, 2010년 5월 설치]

보이차에 대한 자료를 알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하면서 많은 책들을 새롭게 보게되었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그 당시엔 그때의 관심사만 보았을 뿐이다. 이젠 차학이란 분야에서 접근해 보면 “차의 선진국(필자 주)”에서 만들어진 중국차에 대한 관심은 보이차에 집중되는 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는 차지하고 차에 대한 비전문가 들이 알고 싶어하는 차(茶)가 ‘보이차’라고 하면 믿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이다.

 

특히 홍인이 언제부터 제조되었는가 대한 논리는 ‘호차급(號茶級)’ 차(茶) 생산 이후에 만들어진 ‘인급차(印級茶)’ 포장 인쇄술에까지 그 시대 상황이 반영된 내용으로 볼 때 박창식 선생(필명 죽천향)의 블로그(죽천향실)에 올려진 2009년 8월 28일 ‘인자급 홍인의 진실’에 대한 글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동안 여러 논저에서 나온 인급차(홍인, 녹인 등)의 생산 기간을 (1938-1970)에서 [인급차(印級茶) : 1951-1970]으로 하게 되었다.

박창식 선생의 논저를 믿는 것은 첫째 ‘호차급과 인급차’를 수년 전만 해도 실제 생활에서 완편을 쪼개어 마셔온 차꾼으로서 ‘등시해 교수 책과 짱유화 교수의 논저’ 및 중국내 신문을 인용하여 그 근거가 매우 논리적인 점이다.  http://blog.daum.net/36254598/13385065

『푸얼차(普洱茶)』의 저자인 ㄷ교수의 설명.
“찻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紅印)’이라 했고,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이를 ‘녹인(綠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붉은 차자(茶字)의 푸얼원차(普洱圓茶)는 맹랍의 제일 좋은 찻잎으로 만들어졌고 이무진(易武鎭)은 맹랍현(勐臘縣)에 속해있기에 붉은 색으로 찍힌 차자(茶字)의 찻잎은 가장 좋은 찻잎으로 인정받은 이무차산(易武茶山)의 대엽종 차나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곁들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홍인푸얼원차(紅印普洱圓茶)는 40년대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50년대 공산당정권(共産黨政權)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조기홍인은 이무차산에서 생산된 최고품질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으로 품질면에서 조기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홍인에 대한 판별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인급차(홍인)에 대한 이야기
홍인에 대한 의혹 풀이는 먼저 제작연대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1950년대, 내란을 겪은 후의 중국은 전쟁의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맹해 지역은 중국의 변방이기에 그 참상은 더욱 심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맹해의 물품거래는 현금이 아닌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이곳에서의 화폐는 가치가 없으며 돈이란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 불해차창(佛海茶廠) 오늘날 맹해차창 복원에 참여했던 탕렌량(湯仁良) 선생의 인터뷰

“1949년 중국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이곳에서 철수한 후 맹해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맹해차창의 경우 생산설비들이 모두 도난 또는 파괴가 되어 차 생산은 물론 기초 작업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었다. 당시 우리는 맹해차창의 복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차창(茶廠) 작업장의 복원에만 매진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맹해의 현황에 대해 “당시 맹해의 인구 구성원을 보면 소수민족이99%이며 이곳의 한족은 모두 외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뿐이다. 소수민족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건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생활하는데, 당시는 무척 빈곤했던 터라 모두들 곡물을 시장에 내놓아 교환할 처지이지 차를 만들어 내다 파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설사 있었더라도 그 양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맹해현 정부자료실을 들췄으나 당시 이곳의 차에 관한 그 어느 자료도 찾지 못했다.

:현 운남성 서쌍판납 맹해현 차엽판공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까지 맹해는 무척 혼란하기에 차를 만들고 상품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운남성의차의제조 및 판매에 관한 유통은 모두국영형태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시는 모두주관 부서인‘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부터 받았다. 설령 생산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들이 만든 가정용 형태의 차일 뿐 상업제품은 아니다.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맹해에는 푸얼차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정확한 일기는 갖고 있지 않다.” 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운남성의 푸얼차에 관한 모든 자료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에 보관되고 있다.

필자는 현 중국운남성차엽협회(中國雲南省茶葉協會) 회장이신 쯔어우자쥐(鄒家駒)씨의 도움으로 당시의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다 .운남성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맹해차창은 1956년부터 푸얼차를 만들었으며 당시 출하했던 이 제품은 모두 광동성으로 갔는데, 이 제품이 바로 후일 ‘홍인’이라는 푸얼차다.

그럼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혹은 어떠한 연유로 정식으로 등록된 녹색‘ 차(茶)’자의 마크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출하된 것이냐의 문제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950년대 맹해는 무척 낙후된 지역이기에 인쇄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에 당시 맹해차창에서 출하한 모든 포장지는 가장 가까운 지역인 푸얼현(보이현)에서 인쇄됐으며 이러한 작업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50년대 당시 푸얼현의 인쇄는 원시형태인 목판으로 이뤄졌다. 목판인쇄(木版印刷)란 목재의 엇결이나 절단면에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볼록하게 또는 오목하게 조각한 판목에 안료를 첨가한 수성잉크를 칠하고 인쇄지를 놓고 종이 뒷면을 문질러 인쇄하는 방법이다. 인쇄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잉크를 배합하는 과정에서 색상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다. 즉 사용된 색상의 배합비율의 정확성이 바로 인쇄의 품질을 좌우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얼차 포장지의 인쇄는 단순한 색감 즉 붉은 색과 녹색 등 2가지 색감의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보통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로 치부하고 있으나 필자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오늘날 인자급 푸얼차를 판별하는데 에 있어 포장지의 글씨체뿐만 아니라 인쇄된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즉 붉은 색의 진하고 엷음에 따라 도홍판(桃紅版)과 주홍판(朱紅版)로 나뇐다.

여기서 말하는 ‘도(桃)’란 복숭아와 같은 엷은 붉은 색, ‘주(朱)’란 주사(朱砂)와 같은 짙은 붉은 색을 말하는데, 이러한 색상의 차이는 염료의 배합비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2가지의 색상 즉 녹색과 붉은 색을 한 가지의 색으로 통일되어 인쇄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업자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 운남성공사의 직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부각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운남성공사는 맹해차창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질책을 받은 맹해차창은 푸얼현의 인쇄소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포장지의 ‘차(茶)’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된다. 이 포장지로 출하한 제품이 바로 ‘녹인’이라는 푸얼차다.

이상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이 나온다.

홍인과 녹인의 구분은 찻잎 원료의 생산지 즉, ㄷ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홍인’은 맹랍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며, ‘녹인’은 맹해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 라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러한 포장지의 차이는 단순한 인쇄상의 착오일 뿐 찻잎의 생산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맹해차창에서 ‘팔중차’ 로고로 출하한 첫 번째 푸얼차의 연도는 1956년도 이다. 글. 짱유화

죽천향의 첨언:
그럼 도대체 인급차 홍인은 몇 년도부터 생산된 차인가요!
첫째, ㄷ 교수의 말대로 1942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아니다” 입니다.
그 이유는 운남성 차엽 진출구공사<云南省茶叶进出口公司志>의 기록에 따르면 “云南中国茶叶贸易公司”는 1950년 9월 이름을 “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로 개명한 바,

1942년-1949년 만들어진 소위 조기홍인의 포장지에 1950년 에 바뀐 이름인“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라는 명칭이 절대로 인쇄되어 찍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짱유화 교수의 말대로 홍인은 맹해차창에서 1956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인급차가 맹해차창에서 1956년 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사실은 위 여러분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맞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인급차는 1952년부터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가요 ........
그것은 바로 맹해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으로 보내 하관차창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래 중국의 인터넷 자료를 보면 현 운남성서쌍판납맹해현차엽판공실(雲南省西雙版納勐海縣茶葉辦公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 중에 나와 있는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씀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중국 인터넷 자료중에서...
http://www.puertea8.com/html/259.html
下关茶厂的制式茶品

(상략)
饼茶篇 印级圆茶 自上世纪50年代初,下关茶厂生产了现在称为“印级圆茶”的红印、绿印、蓝印甲乙级圆茶。这些产品,长期以来的普洱茶书籍中都误解为勐海茶厂生产。但前不久,在早期勐海、下关厂的相关史料中,发现了勐海厂早期只有经营原料收购、调配业务,而印级茶都是下关茶厂生产的相关证据。并且,坊间所称的印级茶年代承接也被进出口公司的纪录所修正。印级圆茶,最早生产的是绿印(蓝印)系列,后因绿色原料在卫生检疫中未能过关,而改印全红包装。

"인급원차
20세기 50년대 초,하관차창은 현재 “인급원차”로 불려지는 홍인、록인、람인 갑을급 원차를 생산하였다。이 생산품은 오랫동안 보이차 서적에는 맹해차창이 생산한 것으로 잘못되어있는데 맹해, 하관차창의 상관사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맹해차창은 초기에 경영과 원료를 거두어 사들이고 배급을 조절하는 업무를 보았다. 이는 인급차가 하관차창에서 생산되었다는 관계있는 증거이다 (하략)....。 "


그리고 1949년 12월 중국차엽공사 정식성립, 1950년 9월 중국차업공사 운남성공사의 성립 1951년 말 팔중차 로고의 (중차패) 등록, 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중국차업공사 운남성공사“의 지시로 맹해차창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차창으로 보내어 1952년부터 인급차를 생산하였다는 정황이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해서 초기에 하관 차창에서 만든것이라 하여도 인급차의 역사는 아무리 빨라도 1951년 말 - 1952년 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여기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의 진실과 거짓 5 - 홍인 에서 발췌한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푸얼차’서적에 따르면 홍인원차의 역사 기원은 40년대 국민당정부(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 50년대 공산당정권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괴력이 발휘되어 1950년에 설립된 회사의 명칭이 40년대의 제품에서 등장하게 되고 1951년에 설계한 로고가 40년대의 제품에 인쇄되어 출하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이 홍인에 관한 기록이자 역사이며 진실과 거짓에 대한 답이다.

상품이라는 존재는 비록 자신의 능력껏, 재주껏 파는 것이 상술이라고 하나 상술에도 격이있어야 한다. 있지도 않는 제품을 존재하는 것처럼 고가에 판매해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것은 분명히 격이 결여된 상술이다.

푸얼차 상술에 관한 대가들은 모두 홍콩과 타이완에 모여 있다. 세계 푸얼차 상품의 출고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이들을 가리켜 푸얼차계의 큰손이라 한다. 이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필자는 이 모임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푸얼차에 관한 상업적 정의는 대부분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필자는 이들과 푸얼차의 역사에 대해 적잖은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학자의 논거에 대해 귀를 기울여 지난날의 실수를 대부분 인정하는 반면 이들을 통해 푸얼차를 취급하고 있는 개인상점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부정하는 것을 보면 푸얼차의 진실을 가리는 것이 얼마나 험난하고 요원한가에 대해 한탄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인급차의 역사가 10년 정도 뒤쳐졌다고 해서 보이차의 왕자로 불리는 인급차 홍인의 명성과 품격이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등시해 선생의《普洱茶》에 쓰여진 자료에 오류들이 있지만 운남보이차에 대한 전고가 미비했던 시절, 나름대로 수많은 보이차를 접하고, 그에 대한 자료들을 수합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어냄으로 보이차에 대한 지평을 보다 넓게 만들었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에 대해 알게 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오늘의 보이차세계가 있게 한 그분의 공로는 결코 퇴색될 수 없다는 점과 더불어 홍인이라는 이름의 보이차는 그 생산 년대를 떠나서 현대보이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명품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차는 그저 차일뿐이고 홍인의 맛과 향은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죽천향_()_

참고 (중국신문의 기사)

http://www.yxdaily.com/yxnews/cate/xxb/2007_5_18/239399.shtml
http://www.yuxinews.com 2007-5-18 8:07:00

富豪陈茶庄里的印级茶
玉溪新闻网讯(实习记者 马瑞华 文/图)说起来应该算是缘分,才第一次去富豪陈茶庄,店家就给我介绍了三款市场上很少见的印级茶,分别是八十年代朱砂红印铁饼、八十年代大红印生茶饼和八八九二生茶饼。

据了解,印级茶指的是上世纪五十年代初至六十年代后期下关茶厂生产的红印、绿印、蓝印甲乙级圆茶,以及后来的蓝印铁饼等茶品。(인급차 지적시 상세기 오십년대 초 지 륙십년대 후기 하관다차창 생산적 홍인、록인、람인갑을급원다,이급 후래적 람인철병등 차품)。印级圆茶的外包装纸,上方自右向左横书大字“中国茶叶公司云南省公司”,下方为小字“中茶牌圆茶”,中间为八个中茶商标,内有印刷了八个中茶商标的方形小纸条,没有其他字样。
印级圆茶整体品质优异,尤其以红印、无纸红印等为佳品。这些茶的原料主要来自西双版纳勐海地区的班章、巴达、布朗等茶山的野生、野放型老茶园,所以茶质厚重、茶韵深沉。印级圆茶,是由石磨手工压制而成的。

印级圆茶有着悠久的历史,它见证了中国普洱茶国营生产及社会主义计划经济时代的开始,凭借着为“红火江山,生生不息”创造的高品质,成为市场中高级普洱茶的代称,是普洱茶中高陈期、高价位的杰出典范。在经历了四五十年的陈化后,他们现在的身价都已超过了万元,所以渐渐从流通市场上退出。印级茶是陈茶中的陈茶,精品中的精品。因其用料考究、做工精细,除了饮用之外,也是一款馈赠、珍藏佳品。

[2010년 5월에 <보이생차>로 설치된 차벽이다. 사진은 벽면 전체의 일부, 1년이 지나면서 벽에 조금씩 틈이 생기는 현상이 보인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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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간 “공부차도”가 출간되었다. 발행인은 중국차 전문점 “공부차” 박성채 대표다. 국내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책을 발행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기존 경륜이 깊은 잡지와 비교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교대상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그런 쪽을 기대한다면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문헌에 의존한 글은 담지 않는다는 것이 발행인의 주관이다. 차를 학문으로 공부하거나 그러한 정보를 학문적으로 얻고자 한다면 기존 발행되고 있는 잡지가 그 기능을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보다 사진에 대한 비중을 늘리고자 하며, 현재 차 시장이 정체되어가고 있는 시점에 살아있는 차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차를 이론으로 배우고 보이차 품평을 이론에 의존해서 하는 것은 진정한 품평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확실한 신념이 앞으로 "공부차도"에서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9월에 출간될 2권에서는 확실한 전투복을 입고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된다.

예를들면, “차 시음기”다. 차 자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발행인 이름으로 시험기를 공개한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공개적으로 받게 되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이 분야에서 차를 취급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이번에는 26종류의 차를 시음하고 시음기를 올렸지만 다음엔 더 다양한 차가 나온다.


01년 8653 철병 / 생산연도: 2001년 / 제품명: 8653 / 종류: 철병 / 생/숙: 생차
중량: 357g / 차창: 하관차창 / 권장소비자가격: 1편 35만원
품질대비가격: 8점, 탕맛: 8점, 수장가치: 8.5점

1번 해괴를 잘 해서 우렸습니다. 하관 특유의 향과 적절한 고삽미가 매우 좋습니다. 뒤에 살짝 남는 단맛과 고미의 느낌이 좋습니다. 하관차는 고미가 삽미보다 높은 편인데, 하관차가 주는 고미는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 맛 빠지면 하관차창 보이차 마니아가 됩니다.

2번~5번 충족된 고삽미가 매우 좋고, 회감과 회운도 빠른 편입니다. 입안에 차 맛이 감도는 느낌이 부드러운 가운데 톡톡 쏟아주는 고미는 감칠맛을 끌어내어 주어 쉼 없이 차 한 잔 더를 외칠 수 있게 해 줍니다. 6번~8번 뒤로 갈수록 감도는 단 맛은 은은하니 좋습니다. 약 3그램 넣고 연하게 우려서 마시면 감칠맛 나게 즐길 수 있는 내포성 좋은 철병입니다.

*철병은 우릴 때 최대한 해괴를 잘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차 후에 진정한 맛을 느끼기에 부족하고 매우 연하게 우려 나옵니다. 해괴가 잘 안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세차 시간을 늘리거나 첫 번째 차를 우리를 시간을 길게 하여 탕 맛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사진, 정복초당]
그외 중요 기사를 보면, 보이차 전문 생산업체인 두기차창 소개와, 중국 차예를 연구하는 동양차예연구소 오명진 소장의 차예란 무엇인가? 한국 차도구 작가의 작품소개로 우해요 정재헌, 단장요 강영준의 작품세계, 중국 차관문화를 볼 수 있는 "동리고진의 야경을 배경으로한 정복초당" 기사가 나온다.  
한국에서 중국차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곳을 취재한 처음 삼인행을 향했던 날" / 박예슬, 드립으로 보이차를 마시는 법을 상품화 시킨 부산대유정차관 최정림/중국 북경차시장에 대한 현장이야기/ 보이차 애호가에게 희소식이 될 것으로 보는 보이차가격/맹해차창, 하관차창 제품의 가격 공개 등이다.
 [사진, 두기차창에서 보이차 제조 과정]

두기차창 창업 목적과 생산 이념
두기의 출발은 비록 06년부터이지만 창업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보이차 제작에 깊은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보이차에 대한 깊은 열정과 지식을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2006년 보이차 대표 고급 브랜드인 ‘두기’를 창업하였다고 한다. 두기의 생산 이념은 ‘용심주차, 주호차(用心做茶, 做好茶)’로, ‘정성을 들여 차를 만들면 좋은 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특별한 기사로는
차예란 무엇인가 / 오명진(동양 차예연구소 소장)

차예는 결국 다도, 다례와 같은 것이며 어느 부분을 좀 더 드러내는가가 다를 뿐이라고 본다.는 의견을 낸 것으로 스스로 중국 육대다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입장에서 단순 기예는 차예가 아니라는 내용의 글이 있다.

-차를 최상으로 우려내기 위해서는 좋은 차를 가릴 수 있는 눈이 있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육대 다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한다. 또한 각각의 차에 어울리는 다구에 대해서, 우려내는 물의 성질과 온도 등에 대해서도 많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 잔의 차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포차의 예술 적인 손동작, 기물의 아름다움, 단아한 차실의 분위기, 아울러서 예술적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차문화 전반에 학문적으로 접하고 반복수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철학적 소양이 따르지 않으면 이 모두는 공허한 것으로 남고 만다. 이는 차예 뿐 아니라 ‘다도’, ‘다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다도의 완성자라 칭송되는 센리큐도 다도는 예술적 안목 없이는 완성되기 어렵다고 간파했으며 차에는 마음의 행복이 있고 이로 인해 도로서 성행할 수 있었으며 하나의 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차의 미의식을 말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차예는 결국 다도, 다례와 같은 것이며 어느 부분을 좀 더 드러내는가가 다를 뿐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한국의 차가 다도나 차예가 될 수없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때에 따라 다도, 다례라는 말을 종종 쓰기도 한다. 그리고 차예 표현은 지금도 꾸준히 새로운 창작으로 변신하고 있다.- 

보이차가격/차시장 가격표는 향후에는 다양한 차류의 가격이 공개되겠지만 창간호에서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맹해차창과 하관차창의 차 가격을 중국차 시장 소비자 가격으로 올렸다. 예를들면 아래와 같다.
맹해/7572의 2011년 생산한 숙차/병차 357g 33,000원
맹해/보토영재 2011년 생산한 생차/병차 357g 58,000원  
맹해/오채광작세트 2008년 생산된 생차/병차 2000g 250,000원

박홍관의 자사호 이야기 (양장)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박홍관
출판 : 도서출판이른아침 201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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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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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네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의 문화와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기행문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남겼다. 견문, 즉 ‘보고 들은’ 경험은 곧 지식인 사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동방견문록』의 발간은 문화 교류를 앞당긴 세계 문화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중국은 한국과 가까이 위치하지만 사실상 접근이 매우 힘들었기에 근대화 이후 문화 교류가 거의 끊겼었다. 때문에 베일에 싸인 나라이자 차(茶)의 종주국인 중국과 한국 차 문화 사이의 큰 격차는 여타 문화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 책의 제목으로 감히 ‘견문록’이란 말을 붙였다.

이 책은 단순히 중국을 여행한 중국여행기가 아니라 중국차(中國茶)를 견문한 것이다.

필자는 이 시대의 차꾼으로서 차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순수한 시각으로 중국 대륙을 견문했다.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교통과 과학의 발전 덕분에 현지의 풍광을 생생한 사진으로 찍어서 책에 담아낼 수 있었다.

『중국차 견문록』은 차와 차 도구에 관심을 가진 필자가 22년간 우리 시대 차 문화 코드를 만들어가는 큰 틀 속의 한 분야로 계획한 책이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 동안, 차를 생산하는 중국 12개 성(省)을 중심으로 필자가 발을 내디딘 땅과 호흡한 공기,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는 차의 기운을 느끼며 기록한 내용을 이 책에 담았다.

[대만, 당성 도예 죽계 선생의 차 내는 모습]

1장 복건성
복건성을 대표하는 무이암차 15 / 무이산 정산소종홍차의 탄생 27 / 정산소종홍차의 찻잎 수매 현장 35 / 정산소종홍차의 가온 위조 39 / 백차 공장에서 만난 자연 위조 43 / 철관음을 품평하고 수매하는 사람들 57 / 유명한 차만 명차가 아니다 63 / 옛날 방식의 안계철관음 유념 67 / 복안에서 만난 고급 말리화차 69 / 평온한 시골의 철관음 차 농가 75 / 철관음 살청기 79 / 무이암차와 대홍포 85 / 대홍포 모수 주변 찻집의 변화 91 / 무이산 무이구곡 풍경 95 / 금준미 은준미 101

2장 절강성
청하방 옛 거리와 태극차관 107 / 항주에서 만난 화차관 113 / 항주 국가차엽연구소 117 / 서호용정차 보관법 123 / 서호용정 홍보관의 뛰어난 상술 127 / 안길백차 모수가 있는 곳 133 / 차엽박물관과 1950년대 유념기 139

3장 북경 · 상해
다예사의 다예표연 감상기 145 / 세월을 품은 육보차 151 / 마련도 차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153 / 반가원 시장 사진 갤러리 159 / 소수민족이 운영하는 보이차 전문점 163 / 인도네시아에서 재배한 철관음 165


4장 안휘성
기문홍차의 위조와 유념 공정 169 / 안휘성에서 본 품평실과 품평용 도구 177 / 보이차로 둔갑한 미전차 181 / 육안과편 공장 견학 187 / 신이 지켜주는 신차 나무 193 / 안휘농대 차 문화 교류 197 / 황산에서 만나는 황산모봉 199 / 희망의 차 태평후괴 23호 203

5장 대만
당성 차 도구점의 위폐 감식기 211 / 대만차의 건강한 유통 구조 219 / 동방미인 작업장에서 223 / 남투현 오룡차 유산차방 229 / 차 맛 기행에서 만난 귀인 233 / 순인다장의 멋 241 / 작지만 멋진 차관에서 30년 된 문산포종을 245 / 작은 것이 아름다운 기고당 249 / 대만 초등학교의 다도 교육 253 / 양가죽으로 포장한 육보차 259

6장 강소성
남경 시내의 찻집 263 / 이 시대의 명차 남경우화차 267 / 새소리와 함께한 숲속의 차나무 273 / 중국 최대의 차 유통점 천인명가 275 / 자사호의 고향 의흥 279 / 자사호를 만드는 사람들

7장 광동성
다예낙원에서 만난 거상 진국장 291 / 방촌 시장의 무이암차 전문점 297 / 봉황산의 봉황단총 301

8장 호남성
청량감 가득한 천량차 313 / 찻집에서 만난 흑전차·복전차·화전차 319


9장 운남성
보이차에 관한 아찔한 기억 327 / 보이차의 역사를 간직한 맹해 차창 331 / 보이차와 소수민족 다법 335 / 보이차, 100년 만의 호황? 341 / 한정판 생차로 승부하라! 345 / 최대 규모의 민족다예관 347 /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명원 351

10장 귀주성
벌레의 배설물을 차로 마시는 충시차 357

마치며 362 / 찾아보기 364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 http://seoku.com/442

박홍관의 중국차 견문록 (양장)
국내도서>가정과 생활
저자 : 박홍관
출판 : 도서출판이른아침 201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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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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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에 대한 담론은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만 보아도 더 이상의 특별한 모범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자료는 나올만큼 나왔다. 여기서 기존의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나는 보이차에 대한 자료적인 접근에 가능한 사람은 중국인으로서 전문 차학자이거나 언론만이 가능하리라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대만과 홍콩의 차시장에서 거래되는 차를 구매해서 마셔보지 않았다면 현실과는 [사진, 대만 보이차 전문점에서 차를 내는 모습] 동떨어진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실제 홍인을 차의 수준별로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동급의 다른 차들도 다양하게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과의 대화는 같을 수가 없다.

즉 흔히 골동보이차에 대해서는 죽천향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박창식 선생님의 의견을 믿고 있다. 위에 말한 인급, 호급의 모든 차들을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이고, 늘 중국의 실제 동향을 관찰하면서 우리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블로그에 여러사람의 글을 비교해서 올려진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석우여담에 올려본다.

아래 글의 원본 보기 http://blog.daum.net/36254598『푸얼차(普洱茶)』의 저자인 ㄷ교수의 설명. “찻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紅印)’이라 했고,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이를 ‘녹인(綠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붉은 차자(茶字)의 푸얼원차(普洱圓茶)는 맹랍의 제일 좋은 찻잎으로 만들어졌고 이무진(易武鎭)은 맹랍현(勐臘縣)에 속해있기에 붉은 색으로 찍힌 차자(茶字)의 찻잎은 가장 좋은 찻잎으로 인정받은 이무차산(易武茶山)의 대엽종 차나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곁들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홍인푸얼원차(紅印普洱圓茶)는 40년대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50년대 공산당정권(共産黨政權)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조기홍인은 이무차산(易武茶山)에서 생산된 최고품질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으로 품질면에서 조기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홍인에 대한 판별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인급차(홍인)에 대한 이야기 - 홍인에 대한 의혹 풀이는 먼저 제작연대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1950년대, 내란을 겪은 후의 중국은 전쟁의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맹해 지역은 중국의 변방이기에 그 참상은 더욱 심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맹해의 물품거래는 현금이 아닌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이곳에서의 화폐는 가치가 없으며 돈이란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 불해차창(佛海茶廠) 즉 지금의

맹해차창(勐海茶廠) 복원(復原)에 참여했던 탕렌량(湯仁良) 선생의 인터뷰 “1949년 중국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이곳에서 철수한 후 맹해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맹해차창의 경우 생산설비들이 모두 도난 또는 파괴가 되어 차 생산은 물론 기초 작업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었다. 당시 우리는 맹해차창의 복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차창(茶廠) 작업장의 복원에만 매진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맹해의 현황에 대해 “당시 맹해의 인구 구성원을 보면 소수민족이99%이며 이곳의 한족은 모두 외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뿐이다. 소수민족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건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생활하는데, 당시는 무척 빈곤했던 터라 모두들 곡물을 시장에 내놓아 교환할 처지이지 차를 만들어 내다 파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설사 있었더라도 그 양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맹해현 정부자료실을 들췄으나 당시 이곳의 차에 관한 그 어느 자료도 찾지 못했다. :현 운남성 서쌍판납 맹해현 차엽판공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까지 맹해는 무척 혼란하기에 차를 만들고 상품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운남성의차의제조 및 판매에 관한 유통은 모두국영형태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시는 모두주관 부서인‘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부터 받았다. 설령 생산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들이 만든 가정용 형태의 차일 뿐 상업제품은 아니다.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맹해에는 푸얼차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정확한 일기는 갖고 있지 않다.” 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운남성의 푸얼차에 관한 모든 자료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에 보관되고 있다. 필자는 현 중국운남성차엽협회(中國雲南省茶葉協會) 회장이신 쯔어우자쥐(鄒家駒)씨의 도움으로 당시의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다 .운남성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맹해차창은 1956년부터 푸얼차를 만들었으며 당시 출하했던 이 제품은 모두 광동성(廣東省)으로 갔는데, 이 제품이 바로 후일 ‘홍인’이라는 푸얼차다.

그럼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혹은 어떠한 연유로 정식으로 등록된 녹색‘ 차(茶)’자의 마크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출하된 것이냐의 문제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950년대 맹해는 무척 낙후된 지역이기에 인쇄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에 당시 맹해차창에서 출하한 모든 포장지는 가장 가까운 지역인 푸얼현(普洱縣)(보이현)에서 인쇄됐으며 이러한 작업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50년대 당시 푸얼현의 인쇄는 원시형태인 목판으로 이뤄졌다. 목판인쇄(木版印刷)란 목재의 엇결이나 절단면에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볼록하게 또는 오목하게 조각한 판목에 안료를 첨가한 수성잉크를 칠하고 인쇄지를 놓고 종이 뒷면을 문질러 인쇄하는 방법이다. 인쇄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잉크를 배합하는 과정에서 색상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다. 즉 사용된 색상의 배합비율의 정확성이 바로 인쇄의 품질을 좌우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얼차 포장지의 인쇄는 단순한 색감 즉 붉은 색과 녹색 등 2가지 색감의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보통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로 치부하고 있으나 필자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오늘날 인자급 푸얼차를 판별하는데 에 있어 포장지의 글씨체뿐만 아니라 인쇄된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즉 붉은 색의 진하고 엷음에 따라 도홍판(桃紅版)과 주홍판(朱紅版)로으 나뉜다. 여기서 말하는 ‘도(桃)’란 복숭아와 같은 엷은 붉은 색, ‘주(朱)’란 주사(朱砂)와 같은 짙은 붉은 색을 말하는데, 이러한 색상의 차이는 염료의 배합비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2가지의 색상 즉 녹색과 붉은 색을 한 가지의 색으로 통일되어 인쇄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업자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 운남성공사의 직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부각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운남성공사는 맹해차창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질책을 받은 맹해차창은 푸얼현의 인쇄소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포장지의 ‘차(茶)’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된다. 이 포장지로 출하한 제품이 바로 ‘녹인’이라는 푸얼차다. 이상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이 나온다.

홍인과 녹인의 구분은 찻잎 원료의 생산지 즉, ㄷ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홍인’은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며, ‘녹인’은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 라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러한 포장지의 차이는 단순한 인쇄상의 착오일 뿐 찻잎의 생산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맹해차창에서 ‘팔중차’ 로고로 출하한 첫 번째 푸얼차의 연도는 1956년도 이다. 글. 짱유화

죽천향의 첨언: 그럼 도대체 인급차 홍인은 몇 년도부터 생산된 차인가요! 첫째, ㄷ 교수의 말대로 1942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아니다” 입니다.

그 이유는 운남성 차엽 진출구공사<云南省茶叶进出口公司志>의 기록에 따르면 “云南中国茶叶贸易公司”는 1950년 9월 이름을 “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로 개명한 바,1942년-1949년 만들어진 소위 조기홍인의 포장지에 1950년 에 바뀐 이름인“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라는 명칭이 절대로 인쇄되어 찍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짱유화 교수의 말대로 홍인은 맹해차창에서 1956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인급차가 맹해차창에서 1956년 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사실은 위 여러분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맞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인급차는 1952년부터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가요 ........ 그것은 바로 맹해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으로 보내 하관차창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래 중국의 인터넷 자료를 보면 현 운남성서쌍판납맹해현차엽판공실(雲南省西雙版納勐海縣茶葉辦公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 중에 나와 있는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씀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중국 인터넷 자료중에서...   http://www.puertea8.com/html/259.html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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