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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도부장

 

샹주칭과 빙도, 화주량즈 등을 탐방하고 귀국하신 팀을 뒤이어 2차로 티월드의 김정순 위원장님을 비롯한 12분의 차인이 멍하이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번엔 한국의 석가명차 이과장이 손님들을 인솔하고 왔는데 저는 징홍 공항에서 밤늦게 손님들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음날 먼저 라오반장을 방문하고 내려오면서 저희 집에 있는 초제소에서 살청과 유념 등을 체험하였습니다. 다음날은 징마이를 방문하여 천년만묘고차원의 중심인 따핑장에서 고수차 숲을 거닐며 최근에 위장병 등에 특효하다고 알려진 방해각찾기에 몰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운산과 계약 관계에 있는 노강의 차농집을 방문하여 올해의 여러 가지 상황을 점검하였습니다.

 

최근에 갑자기 징마이 일대에 우박이 솟아지면서 생잎 가격이 폭등할 조짐이 보입니다. 매년 봄차 때가되면 윈난성 일대에 꼭 한 두 번씩은 우박이 솟아집니다. 작년에는 작황도 좋지 않은데다 우박피해까지 심해서 생산량이 감소한 탓에 가격을 부채질하곤 했습니다. 올해는 비교적 날씨가 순조로워서 차맛은 예년에 비해 좋고 생산량도 조금은 증가할 것 같습니다.

 

징마이 노강차농은 눈동자가 유난히 큰데 딱 보면 순박하고 착하게 생겼습니다. 부모님과는 사정이 있어서 떨어져 있고 올해로 83세인 할머니 86세인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봄철이면 같이 찻잎을 따고 밭일도 같이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소수민족 언어로 할머니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참 정겹습니다.

 

때론 박장대소하고 서로의 어께를 두드려 주는 모습을 보면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이전에 순수한 인간의 참 모습을 보는듯해서 저도 덩달아 흐뭇해지곤 합니다.

 

소수민족들의 축제

 

오늘이 마침 저희와 옌종2015년부터 기획해서 하고 있는 4회세계차우문화축제의 날입니다. 징마이 차산을 거니는 틈틈이 오후에 옌종 차창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부를 노래와 춤을 연습합니다. 곡목은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아리랑과 전 국민의 애창곡 남행열차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들 부끄럽다고 하시면서도 즐겁게 동참해주십니다.

 

징마이 고차산에 합창으로 울려 퍼지는 아리랑 선율이 너무나 아름답고 가슴 뭉클합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오신 오운산 손님들을 합하여 40여명이 차창 대문에 줄지어 늘어서서 각종 악기를 불고 두드리며 맞이해주는 소수민족들의 깜짝 영접을 받으며 축제에 참가하였습니다. 따이족, 하니족, 라후족, 뿌랑족 등의 순서가 끝나고 저희 차례가 되어 아리랑을 부릅니다. 그리고 남행열차 그리고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마무리합니다.

 

이번에 오신 손님 중에 가장 연로하시지만 한국인 특유의 흥은 넘치시는 안 선생님의 안무에 모두들 한데 엉켜 열광의 도가니입니다...

 

마지막에 모두들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스텝을 맞추어 추는 뿌랑족의 단결무를 끝으로 축제를 마무리합니다. 행사를 기념하여 준비한 100그람 병차를 참가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번 축제에 참가한 팀중에 장원에게는 특별히 일키로 대병을 주기로 했는데 한국 팀에게 돌아갔습니다. 제가 심사위원장이기에 그냥 멀리서 오신 한국 손님들에게 모두 한편 씩 드렸습니다. 이런 걸 흔희 주최 측의 농간이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매년 행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소중하고도 감동적인 자리입니다. 윈난의 차산아래 차를 생산하는 차농, 만드는 차상, 그리고 차인들이 어울려서 아무른 격식과 사심 없이 그냥 하루 쉬면서 차 마시고 노는 자리입니다. 모두들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행사 끝나면 그냥 헤어집니다. 다시 또 각자에게 주어진 생업에 열중하고 내년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는 것이지요!

 

올해까지는 이곳의 소수민족과 한국에서 온 손님이 주객이었지만 내년엔 윈난의 차산지 곳곳에서 차 관련 일에 열중하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도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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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축제장에서 연주하는 태족

 

오늘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윈난성과 시쐉반나 멍하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할까 합니다. 윈난성은 중국 남서부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북회귀선이 통과합니다. 면적은 394,100 km2로 남북한 합친 크기의 두 배 정도 됩니다. 성의 북쪽은 고원지대로 티베트, 귀주성 등이 있고 동쪽은 광시 장족 자치구, 서쪽은 미얀마, 남쪽은 라오스 베트남등과 접하고 있습니다.

 

남부의 저지대에는 아열대성 기후도 있으며, 북부의 고산 지대에서는 아한대성 기후도 있어 다양한 기후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동식물 상이 풍부하고 특히 원예 분야에서는 신종 화훼의 산지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1월 평균기온은 8~17 °C이고 7월 평균기온은 21~27 °C입니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2300mm이고 이 중 절반이 7월과 8월에 집중됩니다. 윈난은 민족전시장이라고 일컬을 만큼 많은 종류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공인된 55개의 소수민족 중 25개 민족이 윈난에 살고 있는데, 윈난성 전체 인구는 2016년 기준 4800만명 정도이며 그중 소수민족은 1800만 명정도 입니다. 또한 다른 지역에는 없고 오로지 윈난성에만 거주하는 소수민족이 15부족 정도 됩니다.

 

그중에서도 시쐉반나는 태족자치주로서 전체 인구는 120만 전후입니다. 징홍시를 중심으로 크게는 이무지역인 맹랍현과 포랑산지역인 맹해현으로 나뉘어지고 그 외 맹송, 파달, 격랑화 등이 있으며 다수의 유명 차산을 품고 있습니다. 한족 40, 태족35, 하니족20만명 정도와 기타 포랑족, 라후족, 이족 등 십여개의 소수민족이 골짝골짝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특히 멍하이는 보이차 산지와 공장, 상가 등이 밀집된 지역으로 최근에 보이차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봄이 되면 전 세계의 보이차 애호가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윈난성의 네 가지 기둥 산업은 담배, 농업, 광업, 관광산업이었습니다. 아직은 윈난성 전체에서 보이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차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점점 중요성이 확대되리라 예상합니다.

 

중국차엽유통협회에서 2016년 발표한 윈난성의 2016년 차 생산 통계자료에 따르면 차엽 총생산량은 36만 톤이며 그중 녹차16만톤, 보이차13만톤, 홍차7만톤으로 나와 있습니다. 전 중국에서 복건성(38만톤) 다음으로 차엽 생산량이 많은 지역이 바로 윈난성입니다.

 

윈난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선 보이차를 떠올리는데 오히려 녹차 생산량이 조금 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 중국으로 확대해보면 아직도 녹차 생산량이 63%이고 보이차는 7%정도입니다. 열배정도의 차이인데 윈난성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윈난성의 보이차 생산량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이시에 가보면 보이차보다 녹차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가게가 더 많습니다. 홍차의 생산량도 생각보다 많은데 주로 임창지역의 봉경현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전국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디엔홍(滇紅)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전이 윈난성의 옛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전홍은 곧 운남홍차란 뜻입니다. 지금은 전홍집단이란 회사에서 상표등록을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이차 생산량은 올해 일기불순과 과채엽등의 원인으로 봄차 생산량이 급감하였는데 전체적으로는 이천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초에 3톤정도이던 것이 0607년도 보이차 붐을 타고 10톤 가까이 급증하였다가 0809년 오히려 감소하더니 10년 이후 현제까지는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고수차의 생산량 또한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변경지대인 미얀마. 라오스. 태국. 라오스 등지의 차들도 계속 유입량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럼 보이차 생산량에서 고수차가 차지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넉넉하게 보아서 전체 생산량의 5%정도로 추산합니다만 시장에선 흔한 것이 고수차입니다...고수차의 생산량과 종류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다시 자세히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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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삼년째 경매산 근처의 경익차창에서 손님들 환영식을 했습니다. 2015년 한국 손님들 40여분을 모시고 차산 여행을 할 때 위잉빙의 남편인 옌종의 제의로 우연찮게 이루어진 행사입니다. 태족, 하늬족, 포랑족, 라후족, 등의 소수민족들이 자발적으로 각 민족의 고유의상을 갖춰 입고 같이 즐기며 노는 한마당을 여는 것입니다.

 

작년엔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에서 오신 손님까지 합하여 10여개 민족이 함께하는 자리가 연출되었습니다. 모두들 전문적인 배우가 아니라서 서툴고 진행 또한 허술하지만 다함께 즐긴다는 마음으로 참여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해가 더해갈수록 조금은 세련되게 연출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만 아직은 춤도 노래도 그야말로 동네가수입니다. 때론 춤추는 중간에 음악이 꺼져버리고 노래를 하다가 부끄러워서 웃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함께하기에 즐겁습니다.

 

매년 시솽반나 최대의 축제날인 포쉐이지에(물뿌리기 축제) 415일을 전후하여 거행하였는데 올해는 한국 손님의 일정에 맞추어 조금 빨리 하게 되었습니다. 경매산을 둘러보고 내려오니 대문 입구에 오색 찬란한 복장의 소수민족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들이 각종 악기를 요란하게 울리며 저희를 맞이해 줍니다. 저는 몇 번 경험하는 일이라 웃으며 들어갑니다만 다른 분들은 웬일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리번두리번 우쭐우쭐 입구로 들어갑니다.

 

널찍한 차창 마당에 저녁 햇살이 비취고 노동에 지치고 그을린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하나 둘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맑고 밝게 웃으며 마당을 돌고 춤추며 노래합니다. 한국 손님들도 답사로 마당으로 나와서 한판 놀아보라고 합니다. 마침 저희 오운산 한국 대리상인 모여사님의 민요 실력이 가수 못지않다고 소문이 자자한지라 박수로 모셨습니다. 밀양아리랑으로부터 시작한 답가가 박수 속에 그칠 줄 모릅니다...마지막엔 마당 중앙에 커다란 화분에 심은 차나무를 세워 놓고 손에손잡고 둥글게 원을 그려가며 라후족의 단결댄싱을 추어봅니다. 댄싱 스텝을 밟으며 빙빙도는 춤인데 처음엔 자꾸만 스텝이 꼬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익숙해집니다.

 

매년 이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주는 옌종에게 뭐라 감사 표시를 하고 싶은데 같이 노는데 무슨 비용이 필요하냐는 한마디로 딱 자릅니다. 내년에도 많은 외국인 친구들 모셔오면 그걸로 충분하답니다. 다음날은 저희 오두막으로 먼 길 오신 손님들을 모셨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지붕에 중국 국기와 나란히 펄럭이는 태극기를 발견하고는 탄성을 지릅니다. ‘사드문제 때문에 이번 여행 내내 말씀들은 안하셔도 불편한 심정이었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다행이 우려했던 상황들은 한번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곳의 대부분인 소수민족들은 대도시와는 달리 정치적 현실에 무관심한 편입니다. 가게를 찾아오는 대도시 사람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지 않습니다. 혹여 사드문제 등을 거론하더라도 당당히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면 대부분은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제 논리의 주체는 항상 사람입니다.

 

전세계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뿐입니다. 나와는 크게 상관도 없는 일시적 정세에 일희일비 하고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저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원하는 정직한 차 열심히 만들어 국적 불문하고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과 향기로운 마음을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아직도 완성이 덜된 초제소 마당에 둥근 탁자 몇 개 놓고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며칠간 입맛에 맞지 않는 중국 음식 억지로 드시느라 고생하신 것 같아서 과일과 채소 위주의 상을 차렸는데 너무너무 잘 드십니다. 다락방차모임 회장 사모님은 망고를 얼마나 열심히 먹었던지 입 주위까지 노랐습니다...중국이 음식 천국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윈난의 요리는 향신료가 비교적 강한 편이라서 여간해서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생활한지 삼년이 되어 가는 저도 소수민족의 식사 초대에 기꺼이 응하지만 아직도 불편한건 사실입니다. 아무리 적응하려해도 한국 사람인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가게 냉장고에 된장과 고추장을 넣어두고 식사 때마다 조금씩 꺼내먹고 있습니다.

 

마을 주위에 있는 저희의 생태 차밭에서 채엽해서 그늘에서 적당히 말린 찻잎들로 각자 돌아가면서 살청(殺靑) 체험을 합니다. 비비기를 해서 널따란 광주리에 널어두고 맑고도 깨끗한 윈난 햇살에 꼬들꼬들 말라가는 찻잎들의 비틀기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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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같이 지내는 거위

 

멍하이 일기 5

오늘은 짐승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산길을 오르다보면 종종 작은 돼지 새끼들을 만납니다. 소수민족 집에서 기르는 것들인데 거의 방목입니다. 멍하이 대로에서도 소나 염소 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엔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소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중국 특유의 여유로움이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돼지 풀 뜯는 소리하지마라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실제로 멍하이 에서는 돼지가 풀을 뜯어 먹고 삽니다...길가의 잡초나 흙, 뿌리 등을 닥치는 대로 먹고 나대지 등에서 뒹굴고 있는 동과주라고 부르는 체형이 작은 돼지입니다. 육질이 졸깃해서 수육을 하면 좋고, 숯불에 구워 먹어도 아주 맛있습니다.

 

후이꽁신짜이(回貢新寨)”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차산을 다니다보면 흔히 신짜이(新寨), 라오짜이(老寨)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말 그대로 이해하면 노채(老寨)가 원래부터 있었던 마을이고 신채(新寨)는 나중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일 것입니다. 노반장도 마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원래는 반장이라는 마을이었는데 후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 지역 근처에 새로운 마을이 생기고 이름을 달리할 필요성이 있어서 신반장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원래부터 있었던 반장마을은 노반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한가롭고도 평화로운 이 마을에 오두막을 짓고 들어온 후에 모든 상황들이 마음에 들었는데 다만 한가지 이놈의 닭울음소리 때문에 종종 귀한 새벽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지금은 적응이 되어 (니는 울어라 나는 잔다)지만 한 때는 신경이 예민해 져서 이놈의 달구새끼들 새벽 안와도 좋으니 매가지를 팍 비틀어 가지고 패대기를 쳐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예상 못한 복병을 만났던 셈이지요! 거의 매일 아침 일곱 시에 나가서 이산 저산 헤매다가 밤 열두시가 되어서 들어오는 일정이라 새벽잠이 보약인데 촌닭들의 합창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이생각 저생각 하다보면 만사가 괴롭기도 했답니다.

 

어릴 때 외갓집에서 우연히 목격한 돼지 도살하는 장면이 꿈자리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공포가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이지요. 능숙한 도살 꾼은 숟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돼지를 기절시키고 기타 작업을 하는데 그때 그 무식한 도살 꾼은 헴머로 도대체 몇 번이나 돼지 대가리를 후려치는지 나중엔 자기도 지치고 구경꾼도 지칠 때 쯤 더 이상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더이다.

 

여기서는 아예 기절시키지도 않고 그냥 송곳 같은 걸로 목을 땁니다. 돼지는 당연히 죽는다고 꿱꿱거리고 곁에서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세숫대야 같은 걸로 피를 받아 냅니다. 잔인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렇게 기른 짐승이므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새벽네시 어스름하게 그리운 닭울음소리가 들립니다...더불어 오리, 거위, 돼지들도 함께 꼬끼오~끼오끼오, 꽉꽉, 꿱꿱, 꿀꿀... 이놈들의 합창은 밥 때가되면 더욱 요란합니다. 주인이 먹이를 주고나면 좀 잠잠하다가 다 먹고 나면 또 한바탕 패악을 부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절이나 큰일이 있고 나면 이놈들이 비교적 조용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이 제일 시끄러운 놈부터 ...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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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다예연구소(원장 이영자)에 설치된 "보이생차"로 만든 차벽의 일부, 2010년 5월 설치]

보이차에 대한 자료를 알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하면서 많은 책들을 새롭게 보게되었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그 당시엔 그때의 관심사만 보았을 뿐이다. 이젠 차학이란 분야에서 접근해 보면 “차의 선진국(필자 주)”에서 만들어진 중국차에 대한 관심은 보이차에 집중되는 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는 차지하고 차에 대한 비전문가 들이 알고 싶어하는 차(茶)가 ‘보이차’라고 하면 믿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이다.

 

특히 홍인이 언제부터 제조되었는가 대한 논리는 ‘호차급(號茶級)’ 차(茶) 생산 이후에 만들어진 ‘인급차(印級茶)’ 포장 인쇄술에까지 그 시대 상황이 반영된 내용으로 볼 때 박창식 선생(필명 죽천향)의 블로그(죽천향실)에 올려진 2009년 8월 28일 ‘인자급 홍인의 진실’에 대한 글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동안 여러 논저에서 나온 인급차(홍인, 녹인 등)의 생산 기간을 (1938-1970)에서 [인급차(印級茶) : 1951-1970]으로 하게 되었다.

박창식 선생의 논저를 믿는 것은 첫째 ‘호차급과 인급차’를 수년 전만 해도 실제 생활에서 완편을 쪼개어 마셔온 차꾼으로서 ‘등시해 교수 책과 짱유화 교수의 논저’ 및 중국내 신문을 인용하여 그 근거가 매우 논리적인 점이다.  http://blog.daum.net/36254598/13385065

『푸얼차(普洱茶)』의 저자인 ㄷ교수의 설명.
“찻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紅印)’이라 했고,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이를 ‘녹인(綠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붉은 차자(茶字)의 푸얼원차(普洱圓茶)는 맹랍의 제일 좋은 찻잎으로 만들어졌고 이무진(易武鎭)은 맹랍현(勐臘縣)에 속해있기에 붉은 색으로 찍힌 차자(茶字)의 찻잎은 가장 좋은 찻잎으로 인정받은 이무차산(易武茶山)의 대엽종 차나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곁들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홍인푸얼원차(紅印普洱圓茶)는 40년대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50년대 공산당정권(共産黨政權)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조기홍인은 이무차산에서 생산된 최고품질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으로 품질면에서 조기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홍인에 대한 판별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인급차(홍인)에 대한 이야기
홍인에 대한 의혹 풀이는 먼저 제작연대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1950년대, 내란을 겪은 후의 중국은 전쟁의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맹해 지역은 중국의 변방이기에 그 참상은 더욱 심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맹해의 물품거래는 현금이 아닌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이곳에서의 화폐는 가치가 없으며 돈이란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 불해차창(佛海茶廠) 오늘날 맹해차창 복원에 참여했던 탕렌량(湯仁良) 선생의 인터뷰

“1949년 중국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이곳에서 철수한 후 맹해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맹해차창의 경우 생산설비들이 모두 도난 또는 파괴가 되어 차 생산은 물론 기초 작업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었다. 당시 우리는 맹해차창의 복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차창(茶廠) 작업장의 복원에만 매진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맹해의 현황에 대해 “당시 맹해의 인구 구성원을 보면 소수민족이99%이며 이곳의 한족은 모두 외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뿐이다. 소수민족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건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생활하는데, 당시는 무척 빈곤했던 터라 모두들 곡물을 시장에 내놓아 교환할 처지이지 차를 만들어 내다 파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설사 있었더라도 그 양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맹해현 정부자료실을 들췄으나 당시 이곳의 차에 관한 그 어느 자료도 찾지 못했다.

:현 운남성 서쌍판납 맹해현 차엽판공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까지 맹해는 무척 혼란하기에 차를 만들고 상품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운남성의차의제조 및 판매에 관한 유통은 모두국영형태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시는 모두주관 부서인‘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부터 받았다. 설령 생산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들이 만든 가정용 형태의 차일 뿐 상업제품은 아니다.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맹해에는 푸얼차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정확한 일기는 갖고 있지 않다.” 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운남성의 푸얼차에 관한 모든 자료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에 보관되고 있다.

필자는 현 중국운남성차엽협회(中國雲南省茶葉協會) 회장이신 쯔어우자쥐(鄒家駒)씨의 도움으로 당시의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다 .운남성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맹해차창은 1956년부터 푸얼차를 만들었으며 당시 출하했던 이 제품은 모두 광동성으로 갔는데, 이 제품이 바로 후일 ‘홍인’이라는 푸얼차다.

그럼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혹은 어떠한 연유로 정식으로 등록된 녹색‘ 차(茶)’자의 마크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출하된 것이냐의 문제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950년대 맹해는 무척 낙후된 지역이기에 인쇄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에 당시 맹해차창에서 출하한 모든 포장지는 가장 가까운 지역인 푸얼현(보이현)에서 인쇄됐으며 이러한 작업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50년대 당시 푸얼현의 인쇄는 원시형태인 목판으로 이뤄졌다. 목판인쇄(木版印刷)란 목재의 엇결이나 절단면에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볼록하게 또는 오목하게 조각한 판목에 안료를 첨가한 수성잉크를 칠하고 인쇄지를 놓고 종이 뒷면을 문질러 인쇄하는 방법이다. 인쇄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잉크를 배합하는 과정에서 색상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다. 즉 사용된 색상의 배합비율의 정확성이 바로 인쇄의 품질을 좌우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얼차 포장지의 인쇄는 단순한 색감 즉 붉은 색과 녹색 등 2가지 색감의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보통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로 치부하고 있으나 필자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오늘날 인자급 푸얼차를 판별하는데 에 있어 포장지의 글씨체뿐만 아니라 인쇄된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즉 붉은 색의 진하고 엷음에 따라 도홍판(桃紅版)과 주홍판(朱紅版)로 나뇐다.

여기서 말하는 ‘도(桃)’란 복숭아와 같은 엷은 붉은 색, ‘주(朱)’란 주사(朱砂)와 같은 짙은 붉은 색을 말하는데, 이러한 색상의 차이는 염료의 배합비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2가지의 색상 즉 녹색과 붉은 색을 한 가지의 색으로 통일되어 인쇄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업자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 운남성공사의 직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부각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운남성공사는 맹해차창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질책을 받은 맹해차창은 푸얼현의 인쇄소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포장지의 ‘차(茶)’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된다. 이 포장지로 출하한 제품이 바로 ‘녹인’이라는 푸얼차다.

이상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이 나온다.

홍인과 녹인의 구분은 찻잎 원료의 생산지 즉, ㄷ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홍인’은 맹랍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며, ‘녹인’은 맹해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 라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러한 포장지의 차이는 단순한 인쇄상의 착오일 뿐 찻잎의 생산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맹해차창에서 ‘팔중차’ 로고로 출하한 첫 번째 푸얼차의 연도는 1956년도 이다. 글. 짱유화

죽천향의 첨언:
그럼 도대체 인급차 홍인은 몇 년도부터 생산된 차인가요!
첫째, ㄷ 교수의 말대로 1942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아니다” 입니다.
그 이유는 운남성 차엽 진출구공사<云南省茶叶进出口公司志>의 기록에 따르면 “云南中国茶叶贸易公司”는 1950년 9월 이름을 “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로 개명한 바,

1942년-1949년 만들어진 소위 조기홍인의 포장지에 1950년 에 바뀐 이름인“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라는 명칭이 절대로 인쇄되어 찍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짱유화 교수의 말대로 홍인은 맹해차창에서 1956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인급차가 맹해차창에서 1956년 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사실은 위 여러분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맞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인급차는 1952년부터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가요 ........
그것은 바로 맹해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으로 보내 하관차창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래 중국의 인터넷 자료를 보면 현 운남성서쌍판납맹해현차엽판공실(雲南省西雙版納勐海縣茶葉辦公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 중에 나와 있는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씀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중국 인터넷 자료중에서...
http://www.puertea8.com/html/259.html
下关茶厂的制式茶品

(상략)
饼茶篇 印级圆茶 自上世纪50年代初,下关茶厂生产了现在称为“印级圆茶”的红印、绿印、蓝印甲乙级圆茶。这些产品,长期以来的普洱茶书籍中都误解为勐海茶厂生产。但前不久,在早期勐海、下关厂的相关史料中,发现了勐海厂早期只有经营原料收购、调配业务,而印级茶都是下关茶厂生产的相关证据。并且,坊间所称的印级茶年代承接也被进出口公司的纪录所修正。印级圆茶,最早生产的是绿印(蓝印)系列,后因绿色原料在卫生检疫中未能过关,而改印全红包装。

"인급원차
20세기 50년대 초,하관차창은 현재 “인급원차”로 불려지는 홍인、록인、람인 갑을급 원차를 생산하였다。이 생산품은 오랫동안 보이차 서적에는 맹해차창이 생산한 것으로 잘못되어있는데 맹해, 하관차창의 상관사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맹해차창은 초기에 경영과 원료를 거두어 사들이고 배급을 조절하는 업무를 보았다. 이는 인급차가 하관차창에서 생산되었다는 관계있는 증거이다 (하략)....。 "


그리고 1949년 12월 중국차엽공사 정식성립, 1950년 9월 중국차업공사 운남성공사의 성립 1951년 말 팔중차 로고의 (중차패) 등록, 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중국차업공사 운남성공사“의 지시로 맹해차창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차창으로 보내어 1952년부터 인급차를 생산하였다는 정황이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해서 초기에 하관 차창에서 만든것이라 하여도 인급차의 역사는 아무리 빨라도 1951년 말 - 1952년 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여기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의 진실과 거짓 5 - 홍인 에서 발췌한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푸얼차’서적에 따르면 홍인원차의 역사 기원은 40년대 국민당정부(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 50년대 공산당정권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괴력이 발휘되어 1950년에 설립된 회사의 명칭이 40년대의 제품에서 등장하게 되고 1951년에 설계한 로고가 40년대의 제품에 인쇄되어 출하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이 홍인에 관한 기록이자 역사이며 진실과 거짓에 대한 답이다.

상품이라는 존재는 비록 자신의 능력껏, 재주껏 파는 것이 상술이라고 하나 상술에도 격이있어야 한다. 있지도 않는 제품을 존재하는 것처럼 고가에 판매해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것은 분명히 격이 결여된 상술이다.

푸얼차 상술에 관한 대가들은 모두 홍콩과 타이완에 모여 있다. 세계 푸얼차 상품의 출고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이들을 가리켜 푸얼차계의 큰손이라 한다. 이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필자는 이 모임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푸얼차에 관한 상업적 정의는 대부분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필자는 이들과 푸얼차의 역사에 대해 적잖은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학자의 논거에 대해 귀를 기울여 지난날의 실수를 대부분 인정하는 반면 이들을 통해 푸얼차를 취급하고 있는 개인상점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부정하는 것을 보면 푸얼차의 진실을 가리는 것이 얼마나 험난하고 요원한가에 대해 한탄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인급차의 역사가 10년 정도 뒤쳐졌다고 해서 보이차의 왕자로 불리는 인급차 홍인의 명성과 품격이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등시해 선생의《普洱茶》에 쓰여진 자료에 오류들이 있지만 운남보이차에 대한 전고가 미비했던 시절, 나름대로 수많은 보이차를 접하고, 그에 대한 자료들을 수합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어냄으로 보이차에 대한 지평을 보다 넓게 만들었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에 대해 알게 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오늘의 보이차세계가 있게 한 그분의 공로는 결코 퇴색될 수 없다는 점과 더불어 홍인이라는 이름의 보이차는 그 생산 년대를 떠나서 현대보이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명품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차는 그저 차일뿐이고 홍인의 맛과 향은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죽천향_()_

참고 (중국신문의 기사)

http://www.yxdaily.com/yxnews/cate/xxb/2007_5_18/239399.shtml
http://www.yuxinews.com 2007-5-18 8:07:00

富豪陈茶庄里的印级茶
玉溪新闻网讯(实习记者 马瑞华 文/图)说起来应该算是缘分,才第一次去富豪陈茶庄,店家就给我介绍了三款市场上很少见的印级茶,分别是八十年代朱砂红印铁饼、八十年代大红印生茶饼和八八九二生茶饼。

据了解,印级茶指的是上世纪五十年代初至六十年代后期下关茶厂生产的红印、绿印、蓝印甲乙级圆茶,以及后来的蓝印铁饼等茶品。(인급차 지적시 상세기 오십년대 초 지 륙십년대 후기 하관다차창 생산적 홍인、록인、람인갑을급원다,이급 후래적 람인철병등 차품)。印级圆茶的外包装纸,上方自右向左横书大字“中国茶叶公司云南省公司”,下方为小字“中茶牌圆茶”,中间为八个中茶商标,内有印刷了八个中茶商标的方形小纸条,没有其他字样。
印级圆茶整体品质优异,尤其以红印、无纸红印等为佳品。这些茶的原料主要来自西双版纳勐海地区的班章、巴达、布朗等茶山的野生、野放型老茶园,所以茶质厚重、茶韵深沉。印级圆茶,是由石磨手工压制而成的。

印级圆茶有着悠久的历史,它见证了中国普洱茶国营生产及社会主义计划经济时代的开始,凭借着为“红火江山,生生不息”创造的高品质,成为市场中高级普洱茶的代称,是普洱茶中高陈期、高价位的杰出典范。在经历了四五十年的陈化后,他们现在的身价都已超过了万元,所以渐渐从流通市场上退出。印级茶是陈茶中的陈茶,精品中的精品。因其用料考究、做工精细,除了饮用之外,也是一款馈赠、珍藏佳品。

[2010년 5월에 <보이생차>로 설치된 차벽이다. 사진은 벽면 전체의 일부, 1년이 지나면서 벽에 조금씩 틈이 생기는 현상이 보인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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