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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도노채

 

멍하이 일기 13 - 린창 차여행 셋째날 빙도 빙다오 -

 

어제 저녁 만찬이 늦어지면서 방동에서 출발하여 솽지앙(双江)에 있는 저희 린창기지에 도착한 시간이 밤 열두시 정도입니다. 도로공사중인 곳이 많아서 더욱 늦어 졌습니다. 현제 보이차가 생산되는 지역은 어디를 가나 공사 중입니다. 특히 고수차가 생산되는 지역은 원료 가격이 폭등하고 자금이 생기면서 차농들이 처음으로 하는 것이 주택 개량입니다.

 

노반장, 빙도 등은 이미 산중의 신도시가 되었고 기타 지역도 덩달아 춤추듯 집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새로 지은 차농들의 집들을 방문해보면 대부분 콘크리트로 비슷비슷하게 지은 2층 양옥집입니다. 3층은 초제소 즉 솥에서 가공한 찻잎을 말리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지붕엔 스레트처럼 생긴 투명한 아크릴 판으로 덮어서 비가 올 때도 찻잎을 말릴 수 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용도에 맞게 설계한 것이지만 집안으로 들어가면 생활하는 방식은 예전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커다란 거실에 덩그러니 TV하나가 놓여 있고 벽에는 가족사진을 비롯한 차나무 사진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간혹 싱크대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현관 입구의 빈 공간에 주방 기구들을 놓아두고 그때그때 손닿는 데로 사용하곤 합니다.

 

솽지앙의 저희 린창기지는 5층으로 지어진 신식 건물입니다. 지금은 샤오미(小米)라고 부르는 이집의 막내딸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데 아주 싹싹합니다. 80년대부터 맹해차창에 원료를 납품하기 시작했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쌍둥이 누나, 오빠까지 네명의 형제자매 전부 차업을 하고 있습니다. 쌍둥이 누나는 시집가서 한명은 푸얼시에서 한명은 멍하이에서 차업을 하고 있고 오빠와 부모님은 린창기지에서 찻잎 가공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샤오미는 일찍이 베이징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간호사로 일하던 중 남편을 만났는데 부모님의 요청으로 함께 하산하여 차업에 열중하게 되었답니다.

 

남편은 약간 내성적이지만 술한잔 하면 노래를 아주 멋있게 잘 부릅니다. 운전도 너무 잘해서 깎아지른 산길을 쏜살같이 달립니다. 앞에 앉으신 분들은 일정 내내 불안불안 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산길도 자주 다니다보면 익숙해져서 평길처름 비교적 빨리 다닐 수 있습니다.

 

한번은 멍하이 저희 오두막에서 바이주를 거나하게 마시고는 앞으로 아버지처럼 모시겠다고 해서 꿀밤을 먹인 적이 있습니다. (삼촌이나 형님이라고 하라고...) 예전부터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만성이 될 법도 한데 가끔 내가 보기엔 나보다 한참 늙어 보이는 촌로들이 나를 할아버지 취급해서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육십대가 저를 형님으로 부르는 분도 계십니다...물론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가끔 남몰래 거울을 들여 보기도 한답니다.

 

셋째날 드디어 빙도를 오릅니다. 빙도(氷島)의 원래 이름은 병도(丙島) 이었는데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 이름에서 오는 신비감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래서 찻값도 올랐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꼭 그렇지는 않고 빙도차는 가격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고유한 특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르는 중간에 빙도호라는 제법 큰 규모의 저수지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차들이 산재해 있는 골짜기를 돌아 나온 물이 모였음으로 물맛도 맛있고 비쌀 것 같다고 농담을 던져봅니다.

 

호수를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도 있는데 시간이 허락하면 물길을 헤치며 빙도차의 진정한 깊이를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임창시 맹고현에 있는 빙도는 빙다오라오짜이(빙도노채氷島老寨), 난포(남박南迫), 디지에(지계地界), 나우(나오糯伍), 빠와이(패왜壩歪) 다섯 개 마을을 말합니다. 해발 1750미터 빙다오라오짜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네게 마을을 포함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를  일반적으로 빙도차라고합니다.

 

빙도라오짜이라고 부르는 본마을은 70%정도가 라후족이며 56가구 300명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많이 알려지면서 봄차철에는 매일 300명 정도가 방문할 정도로 붐비는 촌이 되었습니다. 마을 주변에 2000여 그루의 고수차가 있는데 봄차  생산량은 1톤정도입니다. 적은 집은 열 몇 그루 많은 집은 이백여 그루의 고차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외지인들에게 임대로 차밭을 빌려주고 있는데, 나무 한 그루당 임대비용은 일년에 천만원 전후입니다.

 

모차 가격은 봄차 일키로에 사백만원 기을차 백오십만원정도인데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했더니 방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진짜 고수차는 없어서 못 판다고합니다. 마침 저희가 방문했을 때 광동성에서 온 상인이 현장에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채취해주는 조건으로 단주차 생엽1kg을 이백만원에 구입하는 것을 목격 하였습니다.

 

매년 맛이나 보려고 조금씩 모차를 수매하는 차농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고 고수차는 아직 일러서 중수차 2kg을 이백만원에 구입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수차(수령 백년전후)1kg에 이백만원인데 멀리 한국에서 와서 사업하시느라 고생한다면서 특별히 절반 가격에 준답니다( 매년 좋은 가격에 줘서 고맙긴 한데 올 때마다 왠지 사기 당하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빙도 다섯 개 마을중에서 옛날부터 공수(貢樹나라에 바치는 차나무)로 지정된 일곱 그루의 차나무가 있는데 (빙다오라오짜이1,디지에3,난포1,빠와이1)수령이 약 천년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주변의 네 군데 마을 중에선 난포의 생산량이 그중 많고 나머지 마을은 비슷한데 빙도 다섯 개 마을의 고수차 생산량을 다 합하면 10톤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세 번째 방문하는 띠지에의 맛이 가격이나 맛의 품격 면에서 오히려 빙다오라오짜이를 뛰어 넘는다고 생각합니다. 해발 고도도 1850m로 높고 길이 나빠서 다른 마을에 비하여 개발이 더딘 것이 오히려 환경을 보호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희의 린창기지에서 이곳에 초재소를 짓고 있는데, 올 가을이면 직접 생산한 빙도차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빙도차의 특징은 맑고 달며 삶은 콩 향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혹자는 기운이 좋다고들 하는데 저는 도무지 기운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순환이 잘되어서 그런지 어께 부분이 약간 따뜻해지고 많이 마시면 머리가 띵한 정도를 느낄 뿐입니다.

 

하산 길에 빙도호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송어 회와 민물 칠갑상어 탕을 먹었습니다. 빙도를 올 때마다 매번 들리는 집인데 빙도호 댐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식장의 맑은 물길 속에 노니는 송어를 그물로 건저 올려 즉석에서 회를 썰어 줍니다. 잘 익은 복숭아 속살처럼 발그레한 살점들를 한입 베어 물때마다 신선하면서도 쫀득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웁니다.

 

윈난에서 제가 유일하게 회를 맛보는 집입니다. 작은 칠갑상어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는 탕으로 제격입니다. 중국에서 천연 기념물로 보호하는 종이라는데 양식을 하여 공급하고 있습니다. 궁물 맛이 구수하고 육질이 단단해서 씹는 맛이 아주 괜찮습니다.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근처의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잠시나마 여행의 피로를 풀 수도 있습니다. 혹시 다음에 빙도를 방문하고픈 분들이 계시면 이집은 꼭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빙도차보다 이집이 더 기억에 남을 수 있겠습니다...ㅎㅎ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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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창강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

 

멍하이 일기 12(린창 여행기 둘째날)

 

어제 차왕수를 직접 만질 수는 없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차농 집에서 작년에 생산된 고수차와 야생차들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이 올해 첫차를 수확하는 날이라서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고 옥상에 올라가 가장 가까이에서 차왕수를 촬영할 수도 있었습니다.

 

차맛은 약간 단조로운 편이지만 맑고 깊은 여운이 느껴졌습니다. 마을 주변에 정부에서 표식을 달아놓은 천년이상의 차나무만 2000여 그루가 된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2015년 차왕수 경매 가격이 1kg6억이었다고 하니 35kg이 생산된다고 가정하면 도대체...

 

물론 홍보를 겸한 경매라는 특수 상황에 기인하겠지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일반적인 천년 고수차 가격은 1kg150만원이고 섞여 있는 차들은 30만원 소수차는 10만원정도입니다.(저희 같은 업자는 절대로 이 가격에 구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참고만 하시라고...)

 

둘째날 저희는 윈시엔(云玄)을 출발하여 차팡(茶房) - 따차오샨(大朝山) - 방동(邦東) - 시꾸이(昔歸)까지 산길로 약 세시간을 달려갔습니다. 중간에 차팡이라는 지역에 장터가 벌어져 있어서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돼지랑, 송아지랑, 강아지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각종 먹을거리들이 난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찻집이 있어서 녹차를 조금 구입했는데 100g에 천원입니다.

 

등티아오(藤條)

 

한국의 녹차 산업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에 애국 마케팅만으로 한국의 녹차 산업을 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지역의 특질에 맞는 맛과 문화를 창출하여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등티아오(藤條)차의 대표산지라고 할 수 있는 시꾸이는 란창 강변에 있습니다.


린창시 방동촌은 시꾸이(昔歸),만강춘(曼崗村),마이라이뚜이(賣來對) 10여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주(彛族),한주(漢族),따이주(傣族)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섞여 있으며 700가구에 3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해발3400미터의 스라오후샨(石老虎山) 아래 부챗살처럼 펼쳐진 마을마다 고수차들이 자라고 있는데, 차밭의 평균해발은 1900미터 정도로 고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다른 차산지와 달리 바위와 돌이 많은 토양으로 바위와 고차수의 어울림이 아주 근사합니다. 해발이 가장 낮은 곳(900미터) 란창강 변에 위치한 시꾸이는 등나무처럼 생긴 차나무로 유명한대 가지가 길게 축축 처진 모양이 버드나무를 연상케 합니다. 다른 차수에 비하여 생산량이 떨어지지만 맛의 밀도가 높고 특히 꽃향기가 좋은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시꾸이는 따이주 마을인데, 고차수들이 있는 곳에 따이주 마을이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옛날에 소수 민족들 간의 전쟁에서 따이족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평평한 지역은 대부분 따이족이 차지하고 산골짜기에는 하니족, 포랑족, 라후족 등의 민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보이차의 역사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길 좋고 편편한 곳에 있던 고수차들은 대부분 배어져 경제 작물로 전환되었고 험로라서 개발이 어려웠던 쫓겨난 소수민족들의 터전엔 아직도 성성이 살아남아서 지금의 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서꾸이는 최근의 고수차 붐을 타고 급속히 가격이 올라가고 있는 지역 중의 한 곳입니다. 지난 가을에 왔을 때 비가 많이 와서 도로가 무너져 마을 입구에서부터 걸어서 올라갔었는데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차농집에서 간단히 작년 차들을 시음했습니다. 손님들이 원해서 조금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판매 완료랍니다.

 

죄송하다며 타차처럼 대충 뭉친 시꾸이 가을 고수차를 하나 선물로 줍니다. 250g 정도인데 내가 가지기가 어색해서 즉석에서 재미 경매를 붙였는데, 다른 분들의 아름다운? 양보로 교수님이 낙찰 받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희와 선 계약 관계에 있는 방동의 차농집을 방문했습니다. 저희가 오운산을 오픈 할 때부터 알게 된 젊은 친구입니다.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를 성실히 모시고 두 살배기 사내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착한 청년입니다. 바위에 둘러싸인 고수차밭의 환경은 아주 좋은데 가공 기술이 부족하여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었더니 예전보다 훨씬 좋은 차를 만들고 있습니다. 마을 주변의 몇 그루 단주(單株특별히 오래된 차나무를 따로 부르는 이름)를 계약하고 올해 생산 계획 등을 의논하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내려 갈려니까 완강히 막아섭니다.

 

한국에서 손님까지 모시고 왔는데 절 때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병환중인 아버님까지 나서시니 어쩔 수 없이 주저앉습니다. 오골계와 주변의 산속에서 뜯어 온 신선한 야채들로 차려진 따뜻한 저녁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마침 오늘이 이번 여행에 동참하신 김여사님의 생신이라는 걸 알고는 따로 국수를 삶고 위에 파를 한뿌리 올려 가져옵니다. 국수는 길다는 뜻이고 파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의 의미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라는 뜻이 담긴 것 같습니다. 조그만 정성이지만 머나먼 타국의 산골에서 아름다운 생일상을 마주보는 마음에 조그만 물결이 일렁거렸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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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주칭 차왕수를 만나러 가면서

 

멍하이 일기 11(린창 여행기 첫날)

 

차업을 하면서 줄곧 펑징(鳳慶)의 샹주칭(香竹菁)차왕수를 만나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아 망설여 왔는데 이번에 한국 손님들과 함께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316일 오전 린창(林滄) 공항에 도착하므로

 

저는 315일 멍하이에서 자동차로 출발하여 일곱 시간, 징마이(景邁) - 란창(瀾滄)을 지나 솽지앙(双江) 저희의 린창 기지가 있는 곳에 먼저 도착하여 하루를 쉬었습니다. 란창을 지나면서 변경 검문소를 만나게 되는데 최근에 불거진 사드문제 때문인지 한국 사람은 특별 검색을 합니다. 한 시간여 일일이 출입을 확인하고 나서야 통과시켜줍니다.

 

너무 늦어서 약간 짜증을 냈더니 총을 든 중국 초병이 째려봅니다. 눈싸움이라면 저도 지지 않는 편이라 일 분여 째려보기를 하여 결국 제가 이겼습니다...나중에 초소 책임자가 내려와 늦어서 미안하다며 여권을 돌려줍니다. 점잖게 한마디만 했습니다.

 

저놈 교육 좀 시키세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 싶으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부터 기르라고...” ‘사드의 효용성 논란을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무작정 한국을 폄하하려드는 못된 중국 놈들을 만나면 제가 가진 무기중의 하나인 눈싸움으로 기를 죽이곤 합니다...비록 중국에서 사업을 하지만 망하면 망했지 한국인의 자존심을 내려놓을 생각은 추어도 없습니다.

 

매사에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서면 어떤 중국인이던 저를 존중해줍니다.

잠시 이야기가 곁길로 나갔네요! 다음날 아침 린창 공항에서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모두 일곱 분! 이번 여행은 올해 린창 지역의 모차 상담을 겸해서 준비한 일정이라서 교육학박사님인 고 교수님을 제외하면 대부분 가족 같은 분들입니다. 저희 최실장을 비롯하여 5년 전에도 중국 여행을 함께 했던 분들입니다. 린창 공항에서 린창 기지의 차량이랑 저희 차에 모두 10명이 나누어 타고 두 시간을 달려 윈시엔(云玄)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에 여장을 풀어놓고 근처의 이족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다음 펑징을 지나 쌍주칭으로 향합니다. 좁은 길이지만 도로는 비교적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2000m전후의 고원지대에 새롭게 형성된 대지차밭들이 길옆으로 쭉 이어져 있습니다.

 

대부분 홍차의 원료로 사용되는데, 펑징은 윈난 홍차로 유명한 전홍집단滇紅集團의 차창 및 본사가 있는 곳입니다. 샹주칭의 차왕수 역시 2005년 정식으로 3200년 수령의 세계 최고령 차나무로 인정 받고나서 전홍집단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샹주칭 마을은 이족(이족)이 전체 인구의 60%정도이고 나머지는 여러 소수민족이 섞여 있습니다. 진시우차주(錦秀茶祖)라고 불리는 차왕수는 이미 여러해 전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사방으로 10m정도의 거리를 두고 담벼락으로 둘러쳐 있습니다. 차나무의 높이는 10m정도로 높지 않지만 나무의 형상이 풍성하니 아름답고 뿌리부분의 굵기가 둘레 5m정도로 아주 튼실해 보입니다. 봄차 생산량이 모차로 35kg이나 된다니 크기를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다.

 

마을 입구의 매점에서 도자기 병에 담긴 바이주(白酒)를 한 병 샀습니다. 원래 생각은 한국에서 막걸리나 소주를 가져와서 올리고 싶었는데 이번엔 여의치 않았습니다. 차왕수 앞에 향을 사르고 술한잔을 올리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젊은 시절 못된 성질 탓에 이리저리 떠돌다가 헤질 녘 어느 암자에서 운명처럼 마주한 녹차 한 잔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야말로 흙수저인 내가 성질까지 나빠가지고 차를 만나지 않았다면 뭘해먹고 살았을까 싶습니다.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동지섣달 불목하니

노승과 비켜 앉은 툇마루 나뭇잎만 뒹굴어

머하러 왔노ᆢ

오데로 갈끼고..

우짜잔 말이고..

밥이나 멕여 주이소

마당쓸고 밥묵고

나무하고 밥묵고

절하고 밥묵고

머리나 깍지

부끄러버서ᆢ

그라먼 가야지

갈데가 없어요ᆢ

우짜잔 말이고

차나 한잔 주세요ᆢ

석달열흘 불목하니

이산 저산 다 태우고

갈끼가!

가면 오고 오면 가는 건가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차나 한잔 묵어라!

해는 저물고

마주앉은 툇마루 차꽃 한송이 영글다

 

*옛날 생각하면서 쓴 시 한수 올립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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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도노채

 

멍하이 일기 10

 

석가명차가 어떻게 윈난에서 오운산이란 상표로 유한공사를 오픈 하게 되었는지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처음 윈난 땅을 밟은 것은 2002년경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강육발교수 대구의 오상윤교수님 등과 쿤밍에서 보이차 관련 세미나에 우연히 참석하면서 부터입니다.

 

막 보이차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던 시기에 구미의 다랑무역 사장이 동행을 권유해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시장을 둘러보면서 이차 저차 닥치는 대로 시음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후에 고객들의 요구가 있어 조금씩 보이차를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징의 마렌다오, 광조우의 팡춘시장 등을 기회 닿는 데로 오가면서 따이공이라고 부르는 보따리상을 통해 제품을 들여오곤 했습니다.

 

고객들의 믿음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물량이 늘어나고 2009년 노반장으로 유명한 진승차창의 한국 총대리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보이차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미호’ ‘해만차창’ ‘하관차창등의 한국 총대리를 겸업하면서 자주 중국 윈난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봄 진미호 대리상 회의에 참석차 멍하이에 왔다가 진미호에서 잡아 준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강상무주점이란 호텔인데 당시 봄차철이라 멍하이에서 가장 큰 호텔인 국위호텔에 방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묵게 된 호텔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당시엔 몰랐습니다...호텔 1층 상가에 제법 규모가 큰 모차 판매점이 있어서 시간 있을 때마다 내려가 각 지역의 모차들을 시음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곳에서 우연히 란창고차라는 중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고수차 브랜드의 심천 대리상을 운영하는 젊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허지라는 친구인데 저희가 한국의 명은아트 은제품을 중국에 소개하면서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아직 어린 친구인데 차업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라 보여서 몇 가지 은제품을 특별 가격에 공급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마웠는지 이후 종종 연락이 와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저의 사정도 비교적 상세히 알게 되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나이를 떠나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몇 년 만에 윈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모차상을 운영하는 위잉빙이라는 태족 여인의 오랜 고객이었습니다. 가게에서 오랜만에 만난 정담을 나누고 다음 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다시 멍하이를 찾게 되었는데 봄에 묵었던 호텔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여전히 1층 모차 가게에 들러 이런 저런 차들을 시음 했는데 전에 왔을 때보다 대접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귀한 모차들만 골라서 우려주고 식사 대접까지 해줍니다. 아침까지 챙겨 놓고 올 때까지 안 먹고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며칠간 극진히 대접해주고 친지 결혼식에 초대까지 합니다. 결혼식에 참석하여 그동안 대접 받은 것이 미안하고 고맙기도 해서 홍빠오’(좋은 날에 조금씩 돈을 넣어 전달하는 빨간 종이봉투)1000위안을 넣어서 전달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녁 늦게 가게에서 다시 보았으면 하는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내려갔더니 봄에 가게에서 만났던 심천의 젊은 친구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뜸 가게를 그냥 주고 모든 원료를 제공할 테니 같이 브랜드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정식으로 제의를 합니다. 처음엔 저의 중국어 실력이 아직 시원치 않아서 뭘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귀를 의심했습니다. 당시 곁에서 내 일을 도와주던 상하이의 형님에게 다시 묻고 나서야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호텔의 건물주이자 모차 가게의 주인이기도 한 위잉빙은 이천년 초부터 모차 장사를 시작하여 멍하이 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성공한 모차상입니다. 징마이 근처에 경익이란 차창이 있고 멍혼에는 대형 창고 그리고 징마이, 파사, 반펀, 포랑산에 초재소(찻잎을 따서 가공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민족 대부분이 그렇듯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아서 글을 잘 모릅니다.

 

돈은 어느 정도 벌었고 남들처럼 자기도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던 중에 몇 년 전 대만 상인을 만나 모차를 제공하고 합작 제의를 했었답니다. 그런데 이 대만 상인이 모차만 가져가고 소식이 없답니다. 그래서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용케 제가 당첨된 것입니다...제가 어딜가나 인복이 있는 편이지만 이번일은 순전히 심천의 젊은 친구가 만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차업을 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수 있는 자기 브랜드를 큰 비용 들이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경영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여 저의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초재소와 가게, 공장 등은 이미 준비 되어 있는 시설을 이용하기로 하고 모차도 제공 받기로 했습니다. 다만 박람회 참가비용 및 홍보비용, 홈페이지 구축 등 기타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허가의 편리를 위해 회사의 명의는 위잉빙의 이름으로 하고 브랜드의 지분은 반반씩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운영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제가 가지기로 했습니다.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합의하고 운남의 차산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오운산고차라는 회사를 창업하였습니다. 201510개 지역의 고수 순료로만 만든 첫 제품을 출시하고 의욕적으로 중국 대도시 대부분의 박람회에 참가하며 홍보 활동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동안 위잉빙으로부터 모차를 수매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던 업체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남는 모차를 조금씩 제품으로 만들어 출시하는 것은 괜찮지만 정식으로 브랜드 홍보를 하며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은 자기들 하고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위잉빙의 모차를 수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일년 모차 판매량만 한화로 백억이 훨씬 넘는 위잉빙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차 판매를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제품 생산에만 전념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고 그동안 다져온 세월과 고객들을 자칫 전부 잃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저 또한 방관할 수만은 없는 문제라서 고민 끝에 위잉빙은 그냥 모차 판매상으로 남고 제 명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합작 제의를 위잉빙이 했고 발생한 문제도 위잉빙의 문제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위잉빙은 미안한 마음에 모든 조건을 저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해 주었습니다.

 

한국 석가명차 최정민 실장과 함께

 

각 지역의 초제소를 내가 필요할 땐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현제의 가게도 거의 무료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저로서도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지라 합리적은 방법으로 모든 것은 정리하였습니다. 회사 이름은 한국과 같이 석가명차차업유한공사로 바꾸고 로고는 오운산으로 이미 많은 홍보를 해 왔으므로 제 명의로 이전한 다음 계속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위잉빙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이 모든 과정을 정리하는데 약 2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담당 공무원들마다 윈난성 시솽반나 멍하이 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최초로 설립되는 차업 관련 유한공사라서 모든 것이 생소한 업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 여권 공정 및 중국대사관 인증서, 은행잔고 증명서 등의 서류와 중국에서 이력서 등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60여 가지의 서류를 준비해서 영업집조’(사업자등록증)을 내려 받기까지 정말이지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드문제까지 겹쳐서 될 일도 미루는 지라 속이 새까맣게 탔습니다. 멍하이 공상은행에서 한국인 명의의 회사 통장도 처음 만드는 일이라 하고 국세, 지방세 등의 처리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모든 것이 운명처럼 정리 되었고 앞으로는 오로지 저의 노력만으로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됩니다. 한편으로 힘은 들지만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정신을 담은 차를 만들기에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동안의 과정을 쭉 서술하다보니 마치 한편의 단편소설을 쓰는 것 같습니다...

늘 바쁘게 살다보니 때론 장자의 호접몽처럼 현실 속의 내가 마치 꿈속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멍하이의 나른한 저녁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의 일기를 마칩니다.

 

*내일부터 한국 손님들 일곱 분을 모시고 빙도와 봉경 향죽청 차왕수 친견 등의 일정을 함께합니다. 멍하이 에서 빙도까지 자동차로 여덟시간 거리입니다. 향죽청까지 다시 세시간 손님들 잘 모시고 일주일 쯤 후에 다시 멍하이 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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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반장모차 저울에 올림

 

멍하이 일기9

 

2017년 모차 수급 방안이란 문건을 만들어 그동안 알게 된 모든 차농들에게 문자로 발송했습니다. 그 지역의 환경과 고수차의 분포 맛의 특징 등을 간략하게 메모하여 올해에 생산된 3kg의 모차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근처의 차농들은 직접 가게로 가져와도 되고 멀리 있는 차농은 우편으로 발송하라고 했습니다.

 

발송할 때 전화로 연락하면 모차 값은 바로 입금하는 방식입니다. 도착한 차들은 세밀히 시음한 후 통과된 지역은 직접 방문해서 차산의 환경과 규모 등을 파악한 후 오운산만의 가공법을 설명하고 일정량을 주문합니다.

 

올해도 작년과 변함없이 우선 저희가 일부 투자하여 협조 관계에 있는 초제소에서도 생옆을 직접 수매하여 오운산만의 가공법으로 일정량을 생산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농들이 가져 온 차들 중에서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는 모차는 전부 모아서 당해 연도의 기념병을 제작하는데 사용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작년에 들어 온 각 차산의 모차 셈플들을 모아서 2016년 기념병을 생산합니다. 차창에서 전부 병배하여 무게를 측정해보니 400kg정도 됩니다. 1kg 대병으로 고급 포장하여 400편 한정 출시할 생각입니다. 대부분 고수차이기 때문에 원료 가격이 꽤 높은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출시할 예정입니다. 일부는 차농이 무료로 제공한 원료이기도 하고 기념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관용으로 100편만 남기고 도매, 소매가격 없이 통일가격으로 한국에 150편 중국에 150편 선착순으로 고객 분들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이백여 곳의 고수차를 조금씩 병배한 것이므로 어쩌면 2016년도 고수차의 평균 맛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일부 지역의 생태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 병배는 두 개 지역 내지는 세 개 지역을 섞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맛을 맞추기도 어렵지만 그 과정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모차를 전부 모아 놓고 하나하나 섞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조금 씩 이백여 지역을 확실하게 병배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조금씩 손으로 뿌려가면서 최대한 골고루 섞어보고자 했습니다만 어떤 차는 아주 좋고 어떤 차는 다소 품질이 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복불복입니다...

 

어쩌다보니 기병병차 소개하는 글이 되어버렸네요...이삼년 동안 발로 뛰면서 직접 발굴한 차농도 많지만 가게로 찾아와서 우연히 만난 차농도 적지 않습니다. 짧은 봄차 철에 아무리 바삐 다녀도 모든 차농들의 다원을 방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우선 그해 대부분의 지역에서 출시되는 첫물차를 3kg씩 받아서 시음하고 평가합니다.

 

차맛은 그해의 기후와 강수량 등에 따라 편차가 있습니다. 매년 그해에 생산되는 가장 좋은 원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직접 맛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의 대강을 파악하고 최고의 원료를 구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오운산만의 방법인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하고 각 차산의 가격을 kg단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차농이 가게로 방문했을 때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모차 가격을 정확히 알려줌으로서 모차상들과의 논쟁을 줄일 수 있고 나아가 합리적인 가격을 도출 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가게 앞이 왁자지껄합니다. 멍하이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 관련업을 하거나 보이차를 좋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이 그해의 보이차 시세일 것입니다. 각 지역의 모차 가격을 일일이 방문하여 물어보기도 어렵거니와 차농들 조차도 일정한 기준 없이 부르는 게 값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은 가게 앞에서 각 지역의 관심 있는 차들 가격을 살핀 후 가게로 들어와 전시되어 있는 모차를 시음하고 조금씩 샘플로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저희의 정밀한 제작 방식을 문의하고 합작을 제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합작 제의는 정중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저희 오운산이 오로지 사업을 목적으로만 한다면, 그 목적에 합당한 조건이라면 적극 고려하는 것이 올은 일일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얼마든지 자기만의 정신을 담은 좋은 차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만의 방식과 완전히 일치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운산의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정직한 차 나만의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차를 좋아하는 세계의 여러 다우들과 교류하며 진실한 차의 깊이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이억만리 머나먼 땅에서 홀로 이산저산 헤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차업을 하면서 막연히 꾸던 꿈! 인연 따라 어렵게 만들어진 좋은 기회를 최선을 다해 펼쳐보고자 합니다. 물론 차업도 사업일 수밖에 없으니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지만 지금에 와서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능력의 한도 안에서 조금씩 전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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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인다

 

멍하이 일기8

 

오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가결되었습니다.

석 달여 온 국민의 가슴을 졸여 온 이번 헌제 심판은 한국의 여러 가지를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구름의 남쪽 먼 나라에 와 있지만 국내의 상황과 동떨어져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탄핵 심판 장면을 생중계로 볼 수는 없었지만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문자 뉴스로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저 허망한 느낌입니다.

 

운남이 중국의 변방이라지만 여기 사람들도 최근 사드문제 등으로 한국의 정치 현실에 관심이 많습니다. 박대통령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다소 난감합니다. 나는 그저 차가 좋아서 차 만들러 여기 왔지 당신들과 정치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만 계속 사드문제를 거론 할 땐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어떤 애국심이 투철한? 중국 사람은 나에게 전화까지 해가면서 사드의 불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중ᆞ.미 양국이 사드문제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사드가 북한 핵을 견제하기 위함이란 논리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에 어쩔 수없이 장소를 제공하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드는 방어 무기 일뿐이라고 설득하지만 현대전은 방어가 곧 공격일수 있기에 중국으로서는 전략적 무가가 집결되어 있는 동북 지역을 사드로 낱낱이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묵과할 수없는 침략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개인적으로 정치 현실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인생 마지막 꿈으로 정말 내가 원하는 좋은 차 만들어서 좋은 분들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타국에 있으면 때론 고국이 그립고 김치, 된장찌개가 먹고 싶습니다. 특히 혼란스러운 소식이 들릴 때면 남몰래 잠 못 이루는 날 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공안이라고 부르는 중국 경찰이 두 번이나 다녀갔습니다. 혹시 불미스러운 상황이 발생할까 보호 차원에서 방문한다지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멍하이에서 정식으로 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살고 있는 유일한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어디를 가나 눈에 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더욱 행동을 조심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정성껏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자 노력합니다.

 

사드 배치의 효용성 논란을 떠나서 저는 중국의 변방인 이곳 운남에서 당신들과 더불어 좋은 차 만들고 한국인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을 뿐이라고, 당신들도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고 더 이상 나에게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지 말라고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오두막엔 오늘도 중국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 할 때마다 바라보는 맑은 창공의 태극기가 오늘따라 애처롭기만 합니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서 주권 국가로서 이런 저런 나라의 내정 간섭 없이 당당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으뜸 문명국가로서 세계인을 이끌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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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산고차 생산의 숙차

 

멍하이 일기 7

 

오늘은 숙차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운산은 2015년 첫 해에 10개 지역의 순료 고수차와 2개 지역의 생태차 만을 생산했습니다. 2016년 고객의 요구가 있어 한가지 숙차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포랑산 지역의 여름차와 미얀마 지역의 가을차를 병배하여 생산하였는데 봄 고수차 원료는 가격 때문에 숙차로 생산하기에는 시장의 반응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일반 숙차에 비하여 비싼 편인데도 반응이 좋았습니다. 용기를 내어서 올해는 작년 생산량의 세배인 9999편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숙차와 비교하여 쓴맛이 강한 포랑산 원료를 조금 줄이고 단맛이 좋은 미얀마 가을 고수차 원료를 늘렸습니다. 모차를 먼저 구한 다음 작년에 했던 방식 그대로 같은 발효 기술자를 초빙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생차는 가공이 간단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추구하는 방법에 따라 누구나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숙차는 발효라는 과정이 고난도 기술이라서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대익에서 발효 기술만 20여 년간 연구하시다가 퇴직한 분으로 마침 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 살고 계셔서 인연이 되어 맡기게 되었습니다. 옛날엔 숙차 발효 기술이 일종의 비밀처럼 여겨져서 물어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숙차의 발효는 아직까지 정확한 데이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숙련공들의 경험에 의존하는데 한 덩어리에 많게는 20톤 적게는 2톤 정도의 모차를 발효시킵니다. 잘못하면 모든 차를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최근엔 대익 등 대형 차장에서 퇴사한 사람들이 발효 기술자로 활동하고 있어서 많이 공개된 편입니다. 기술료는 모차의 양에 따라 지급하는데 일반적으로 1톤에 1500위안 전후입니다.

 

발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발효를 시작하면서 모차 무게 33%의 물을 공급하는데 반드시 깨끗한 물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대형 차창에서는 지하수를 많이 이용합니다. 현제 대익에서는 18톤 숙차덩어리 33개를 발효 중이라고 합니다. 발효 개시일로부터 일주일 전후에 첫 번째 뒤집기를 합니다. 발효 정도와 온도 등을 세밀히 관찰하면서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뒤집기를 합니다. 순조로울 경우 보통 네 번의 뒤집기를 거치면 30일 정도가 지나가고 이후에는 넓게 펼쳐서 온도를 낮추어 주고 45일정도가 지나면 건조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54일정도가 지나면 완성된 숙차가 됩니다. 이후 먼지 등을 날려서 없애는 펀사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찻잎이 뭉쳐서 덩어리가 된 차토우등을 속아내면 압병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오로지 발효 기술자의 안목에 따라서 순간순간 판단되는데 예를 들면 물의 량이 많으면 찻잎이 뭉개져서 차토우가많이 생기고 적으면 발효기간이 길어집니다. 고급 찻잎일수록 발효기간이 조금 길고 황편 등은 짧은 편입니다. 그러나 편차는 일주일정도입니다.

 

저급한 찻잎일수록 손실률이 높고(20%정도) 일반적으로 모차 1톤을 발효하면 860kg정도의 숙차가 생산됩니다. ‘차토우5%전후입니다. 온도는 처음 일주일엔 40도 정도이고 23차 뒤집기를 할 때 중심부 온도가 가장 높아지는데 최고 65도 정도까지 올라갑니다. 더 이상 올라가면 탄화현상이 발생하여 새까맣게 변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엔 유익균을 접종하여 숙미를 줄이고 발효 기간도 줄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숙차의 개발 자체가 보이차에 있어서는 옛날엔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보이차 제조 방법 역시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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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이 일기 6

며칠 광조우를 다녀왔습니다. 광조우 팡춘 차엽성에 있는 저희 가게도 둘러보고 쿤밍에서 알게 된 지인이 근처인 동관에서 오운산 대리상을 오픈하는 관계로 두루두루 다녀왔습니다. 현제 팡춘 시장의 가게 수는 약 만개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불황이라고들 하지만 팡춘의 가게 수는 신기하게도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부분 보이차를 판매하는 가게들이고 더러 철관음이나 차용품, 홍차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도 있습니다. 팡춘도 이천년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 철관음이나 대홍포, 녹차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었습니다. 이천년 중반부터 보이차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보이차의 비중이 점점 높아져서 이제는 명실공이 세계 보이차의 수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원료 산지와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멍하이를 중심으로 한 보이차 햇차 시장과 음용 인구의 밀도가 높고 교통이 편리한 방촌을 중심으로 한 노차 시장으로 양분될 것 같습니다.

 

그 시장의 한복판에 차엽성이 있는데 방촌시장의 렌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 3월에 이곳 3층에 저희 가게를 오픈했습니다. 일층은 권리금만 일억씩 달라고 하고 월세 또한 너무 비싸서 형편에 맞춘 것입니다.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많은 업체들이 차엽성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시장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제 석가명차의 중국 상표인 오운산은 멍하이에 본부가 있고 광조우, 상하이, 쿤밍에 빤스추”(총판겸 직영점)이 설립되었습니다. 빼이징은 지금 준비 중에 있고 기타 여러 지역에 주안마이띠엔”(다른 제품과 같이 저희 제품도 전시 판매 하는 곳)이 개설 되었습니다. 중국의 4대 거점 도시에 직영점을 설립하고 기타 지역을 관리하는 방식입니다. 2015년 첫 제품을 출시하고 중국 전역의 대도시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대리상 모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중국 시장이 열리지는 않았습니다. 몇 군데 대리상을 오픈하였지만 판매 실적이 저조하여 결국 저희가 자진 철수 하였습니다. 저희가 정한 대리상의 첫째 조건이 인품인데 좋은 사람들에게 괜한 부담만 주는 것 같아서 모든 제품을 환수하고 이후는 원하는 제품만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근년에 차시장이 불황인데다가 아직은 오운산의 홍보 부족으로 쉽게 소비자에게 다가가지 못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멍하이에서는 각 차산의 길목마다 작은 간판을 세워 오운산 이미지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멍하이에 내려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저희 간판을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러 곳에 이미지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수백 수천억의 거대 자본으로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기존 세력과 새롭게 진입하는 수만은 신생 업체들 속에서 보이차의 변방인 한국의 석가명차는 그저 신기하게 비춰질 뿐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만들어도 마셔보지 않으면 그 차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품질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저희로서는 오운산 차를 마셔볼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늘려 나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생산지인 멍하이에서 진정으로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차농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고 차근차근 전 세계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다행히 한국에서 오랜 지인들과 고객들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신 덕분으로 올해로 3년째 오운산 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차시장의 불황 사드문제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만만치 안치만 저는 늘 위기가 기회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더 바닥을 다져서 굳건한 내일은 준비하겠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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