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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회장, 소녹인칠자원차(73청병)을 준비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

 

아사가 차회에서의 특별한 만남, 이날 100회 기념 차회를 마치고 뒷풀이에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게 되면서, 아사가 차회는 경주라는 지역성을 벗어나 한국을 대표할 차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제부터는 한국에서 유료 차회의 기준은 2015516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질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차를 마시는 모임이 100회 달성했다면, 다음부터는 100회 이전과 이후의 차회 모습을 기대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100회 기념 차회를 위한 특별 연주, 고쟁과 얼루 연주(동영상)

 

이것이 좋은 모델이 되어 한국의 차관문화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게도 된다. 또한 차관 문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차 한 가지만으로는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날 차회를 모두 마치고 김은호 회장은 아사가 차관의 김이정 대표에게 ㅡ회원 일동의 이름으로 공로패를 수여했는데, 비록 상업성 차관이지만 차관 운영을 문화적으로 발전시킨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사가차관의 회원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차인의 한 사람으로 마음속 깊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한국향도협회 정진단 회장 찬조출연(향도 체험)

 

이날 차회는 서울, 대전, 천안, 대구, 울산, 부산, 포항, 청도 등에서 모두 108명이 설레는 마음으로 모였다.

한국향도협회에서는 정진단 회장과 이사(장정희, 전재분, 이경숙, 최송자) 님과 정숙영, 이채로아, 이향지 님이 참석했다. 부산에서 김봉건 교수, 강옥희 금당차문화회 회장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는 크게 A조와 B조로 나누었고, 시작하는 팀도 10시부터 시작하는 A조와 1시부터 시작하는 B조로 나누었다. 그런데 A1차가 일찍 도착하여 940분부터 김은호 회장의 73청병 찻자리가 시작되었다. 김은호 회장은 개인 소장품과 소녹인칠자원차(73청병)의 한통에서 꺼낸 차를 보여주고 보이차의 장점에 대한 충분한 해설을 겸하여 공부가 되는 차회를 열었다.

 

차관 2층, 향도체험과 악기 연주, 말차시음

 

자사차통, 향통, 향합, 상아차측, 은향합, 주전자

호반길에서 봉황단총 찻자리, 선지원, 이슬기 모녀 <문사차회>

 

이슬기 학생의 차 내는 모습

 

두 번째는 차량으로 이동하여 호반길 봉황단총 찻자리에 갔다. 풍광이 아주 좋은 곳에서 현수막을 치고 선지원 씨와 그의 딸 이슬기 씨가 <문사다예>를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이번 다예를 하는 목적과 방법에 대한 설명을 어머니 선지원 씨가 하고, 이슬기 학생은 개완으로 봉황단총 송종을 우려내었다. 그 사이에 선지원 씨가 탄배향이 나는 봉황단총 송종으로 시원한 냉침을 준비하여 먼저 마시게 해주었다. 이 모녀의 차사랑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의 차 생활을 보고 자란 대학생이 중국 품평사와 다예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동양의 차가 서양인들과 융합될 수 있는 찻자리를 연구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문사다예 동영상

이재란 씨의 말차 접대

이재란 씨의 말차 방, 동영상

세 번째는 다시 차관으로 가서 팀별로 움직이는데 필자는 이때부터는 자유롭게 다녔다. 2충에는 말차 방과 향도 체험 방이 있는데, 향도는 한국향도협회 정진단 회장이 찬조 출연으로 108명 전원에게 팀별로 향도 체험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네 번째는 2층 햇살이 잘 들어오는 방에서 말차를 마시는데 일본식 차실로 준비된 방이다.

이곳에서 이재란 씨가 로에서 물을 끓여 말차를 준비하고 시자 역할을 하는 분이 손님께 차를 가져다 놓는 역할을 하면 손님은 말차를 마시는 자리다. 다식은 송화다식과 무우정과다. 지난해 100인 차회와는 다르게 대기 조의 휴식 공간의 찻자리가 준비되었는데, 그 자리는 경주 이영주 선생님이 자리를 잡고 손님을 맞이해 주었다. 

 

이영주 선생

용정차 우리는 모습

 

 자유석으로는 마당에 탁자로 준비했는데 용정차, 황차, 동정오룡을 준비하여 손님을 편안하게 대하여 차를 마시며 지인들과 담소하면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자리로 이번에 이 자리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황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습

인도 홍차 시킴을 마시면서 이야기 하는 김은호 회장 가족

홍윤숙 씨의 홍차 찻자리

 

마당 잔디에서는 좌식으로 자리와 방석을 깔고 손님께 차를 내는 자리가 있었다. 홍차는 입식으로 준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좋은 차를 맛있게 마셨다고 소문난 자리가 되었다. 필자가 마신 차는 인도 시킴 홍차다. 바쁜 와중에도 잔 하나하나를 모두 예열하여, 수제로 만든 호도파이, 마카로니, 포도, 치즈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일스님과 소천 선생

 

1층에서 김은호 회장과 같은 차인 73청병을 내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은 정해사 무일스님과 소천 선생과 함께 손님을 맞이한 자리로, 좋은 보이차 뿐만 아니라 소천 선생의 차에 대한 인문학적 설명을 들으면서 차와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다.

그동안 고생 많이한 수석팽주

찻자리에서 만난 학교 동창의 밝은 미소

 

마지막으로 녹차를 마시는 찻자리인 보문정 정자로 가는 팀과 동승해서 갔다. 그곳에는 우리가 차회에서 늘 보는 수석 팽주가 도곡 정점교 백자 다기 세트를 준비하여 우리를 미소로 맞아 주었다. 이곳에서는 하동녹차를 준비했다고 한다. 우리 녹차를 고백자 다기로 우려내는데, 수석 팽주와 학교 동창이라고 하는 분이 참 곱게 나이 들었다며 미소 지으며 차를 내었는데, 팽주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대금연주

 

정자 내에서 울린 박 선생님의 대금 연주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찻자리에서 빠지면 안 될 음악을 선사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차회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참석자의 공정한 경품 추첨까지 끝마쳤다.

아사가 차관의 모든 회원은 봉사하는 자세로 자신의 역할이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참가한 많은 분들께 마음으로 다가갔기에 성공적인 차회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아사가 차관 김이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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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하루 전날에 도착한 일행들은 황용골에서 잠자기 전에 강 선생님이 내어준 70년대 보이 산차와 다음날 아침 630분에 마셨던 용정차 맛을, 아사가 차회의 특별한 찻자리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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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73청병

 

73청병은 오늘날 인급 호급차를 제외하면 보이차 매니아에게는 아주 고급차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가격 또한 인기만큼 높다. 그런데 이 차의 출생을 두고 여러 말이 분분하다. 73청병이라는 이름을 두고 연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이들이 여러모로 말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현재 일부에서는 80년대차라고 하는 추측과 확신이 어우러진 상태이다. 여기에 김 경우 씨는 정식으로 반박하는 입장이다. 이 부분에서 필자가 김경우 씨의 논거에 보편적인 동의를 하고 실제 제작 연도에 대해서는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김경우씨가 정리한 자료를 석우연담에 올린다. - <석우>

 

보이차 73청병

 

73청병은 홍콩 의안차창 창고에서 나온 차이며 대만 옥호헌(玉壺軒)에서 통째로 매입하여 유통한 차이다. 옥호헌에서 수입한 차는 7542(501)이라고 한다. 다음은 옥호헌 대표 황슬금(黃瑟琴, 72)씨의 구술 내용이다. “1973년 가계 오픈 후 처음에는 자사호를 수입하여 싱가포르, 태국 등지를 역 수출하는 영업을 하였다. 자사호 때문에 중국 의흥을 가기위해 늘 홍콩을 경유하였다. 1980년을 전후하여 홍콩을 드나들 때 당시 대만은 오룡차의 소비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 발효차인 보이차가 어느 날 눈에 들어왔다.

 

당시는 오래된 호급이나 인급의 보이차가 창고에서 나오기 전이였기 때문에 홍콩에서는 주로 10년 전후의 세월이 지나 약간의 발효가 진행된 생차 내지는 숙차의 소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1980년 무렵부터 조금씩 가져다가 판매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80년대 중반 무렵 어느 날 의안차장에 있는 7542(501)가 눈에 들어왔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돈과 친구에게 빌린 돈을 합쳐 2000천만원(대만돈)을 투자하여 7542(501)을 수입하였다고 한다. 수입할 당시 자료가 부족하여 홍콩에서도 정확한 연도는 몰라 본인 생각과 홍콩 의안차창에서의 말을 종합하여 70년대 초반차라는 결론을 내리고 단순한 생각에서 생차 계통이니 73청병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현재 시중에서는 73청병의 생산 연대에 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한 때 73청병이 싸여진 바닥에 신문지가 있었는데 신문지의 날짜가 민국 73(서기 연도로는 플러스 11년을 하면 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기 1984년 생산 된 차로 언급되면서 인터넷이나 단행본에서 1984년 생산된 차로 사실로 기정사실화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왜곡된 정보이다. 황슬금씨의 구술에 의하면 신문지와 민국 73년이란 말은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알 순 없으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라고 한다.

 

73청병은 대만 옥호헌에서 홍콩의 의안차창에서 나온 차를 수입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부산의 녹백다장에서 수입하였다. 녹백다장 최윤석 대표의 구술에 의하면 “73청병을 수입하기 위해 통표를 살펴보니 7542(503)으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수입된 73청병은 7542(503)이며 최윤석 대표는 73청병의 발음을 부드럽게 하기위해 073청병(공칠삼청병) 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영남지역에서는 73청병을 073청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73청병을 1975년에 만든 차로 추정하는 이유로는 황슬금 대표와 최윤석 대표의 구술 내용뿐만 아니라 아래와 같이 몇 가지 근거에 의해서이다.

 

내비에 표기된 글씨가 이를 뒷받침한다. 맹해차창에서 생산 된 차의 내비에는 서쌍판납태족자치주 맹해차창출품(西双版納傣族自治州 勐海茶廠出品)이라고 표기되어져 있다. 여기에서 출()자의 위쪽의 산()자가 아래쪽의 산()자 보다 좁아 뾰족하다. 이런 출자를 우리는 첨출(尖出)이라고 한다. 첨출 내비는 1970년대 생산된 차에서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위쪽의 산()자와 아래쪽의 산()자의 넓이가 같은 것을 평출(平出)이라고 하며 평출내비는 1980년대 이후 생산된 차에서 나타난다.

 

종이질감이 1970년대에 사용된 격문지(格紋紙)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격문지로 포장한 보이차의 종류가 없다.

포장지 중앙의 녹색 차()자의 인쇄 방법이 도장으로 직접 찍은 수인이다. 이렇게 직접 자를 수인으로 찍는 방법은 1980년대 차에선 볼 수 없고 오로지 1970년대에 생산된 차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73청병을 1986~1987년 무렵에 수입하였다. 당시 보이차는 10년 정도 발효된 차의 소비가 주류를 이루었고 황슬금 대표 역시 이런 종류의 차를 선택하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1975년에 생산 된 7542(501)인 것이다. 하지만 큰돈을 투자하면서 1984년에 만든 차라면 만든 지 2~3년 밖에 안 된 차를 10년 이상 된 차와 구분하지 못하여 수입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사실들을 근거로 73청병의 생산 연대는 1975년으로 판단하는 것이 맞다. 7542로서는 최초로 생산된 차에 속하며 1975년 이후 7542는 계속해서 생산 되었을 것이다.

73청병은 홍콩의 의안차창 창고에서 나온 차로서 다른 차에 비해 높은 습도에서 보관된 차이다. 그러다보니 차에 따라 습기에 노출된 편차가 큰 차이다. 의안차장의 보관창고는 홍콩에서도 대표적으로 습도가 높은 창고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보관이 양호한 차와 습기에 노출된 차의 편차가 크고 바닥에 눌러져 있든 차는 매변이 심하게 발생한 차도 있다. -<끝>

 

1970~1980년대 생산 된 차들 대부분은 홍콩 보관창고에서 입창이 된 차들이다. 다만 입창의 정도에 따라 습기에 노출 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73청병은 대표적으로 입창이 강하게 된 차이다. 그래서 인지 습기에 노출된 차들이 많고 병면이 깨끗한 차들은 드물다. 습기에 노출됐더라도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하게 거풍이 된 차는 농익은 맛으로 마시기에 편안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보관이 양호하고 병면이 깨끗한 차만 건창차로 인정되며 높은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시장 질서이다. 체질에 따라서 마셔야 될 차가 다르고 선호하는 차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좋다는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2015년 1월 10일 황슬금 대표와 김경우 대표

 

현재 보이차가 역 수출 되는 시점에서 가격 형성으로 본다면 73청병은 대표적으로 1970년대에 생산된 차가 분명하지만 잘못된 정보로 인해 저평가된 차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현재 보이차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중국 유통상인들의 이해 부족과 73청병을 마셔보지 못해 객관적으로 품질대비 가격을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접 마셔 본다면 동일한 연대에 생산 된 다른 종류의 차 보다 맛이 절대 뒤떨어지진 않고 오히려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에 따라 품질대비 가격 평가를 제대로 못하는 현실 속에서 다른 종류의 차에 비해 평가 절하된 안타까운 차이다.

 

73청병의 병면 외형 찻잎을 살펴보면 1980년대에 생산된 7542 계열의 차보다 찻잎의 크기가 작다. 오히려 7532 계열의 차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러한 이유는 숫자급 보이차의 병배방식을 1974년부터 만들어 적용하였지만 생산 초창기이다 보니 기술적으로 완성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차의 무게와 찻잎의 크기가 7542라고 보기에는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생산 된 7432, 7452, 7542, 7572, 7582 등등에서 대부분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며 찻잎의 크기에서 큰 차이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생산 10년을 전후하여 홍콩으로 들어 온 차[보이 생차, 숙차]들은 위 말처럼 당시 대만의 주요 차류로 인정받고 시장에서 판매가 되었던 것이며 그 중에서 80년 중반의 시기에 들어와 있던 7542(501)가 연도를 따져 73청병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니 지금 시중에 퍼져 있는 80년대 차라는 인식은 충분히 잠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옥호헌 대표의 구술 내용처럼 직접적인 판매상의 증언이 있는 기록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김경우 씨의 보이차 관련 지난 기사

2015/03/25 - [인터뷰] 골동 보이차 유통의 전문가 김경우

2015/02/15 - 다미향담(155) 73청병과 97년 7542를 함께 즐기다

2015/02/02 - 다미향담(152) 황인 숙차와 1990년대 맹고의 조합

2014/02/20 - 대익보이차 영웅준마 런칭

2014/01/18 - 중국 대익보이차 서울 여의도점 오픈

2010/09/17 - 다미향담(2) 맛으로 승부하는 차

2010/08/09 - 말복에 마신 보이차와 오동단총

2010/04/15 - 혜산초당에서 만난 김경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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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73청병에 97년 7524를 중차(重茶)해 내는 모습(명가원 김경우 대표)

 

보이차를 섞어서 마시는 부분에서 명가원 김경우 대표가 아주 재미난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29일 오전에 일찍 만나서 977542를 마시다가 맹해차창에서 생산한 73청병을 마시자고 했다. 약간의 습을 먹은 차이지만 맛이 좋다고 하면서 자사호에 73청병을 넣고 그 위에 977542를 섞는게 아닌가?

 

다시 이야기를 하면 필자는 73청병을 그대로 마시지 않고 왜 섞어요 했다. 그런데 김경우 씨는 내가 마시는 방법으로 한 번 마셔보지요 하면서 977542를 넣었다. 이러한 방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칫 잘 못하면 무슨 맛으로 보이차를 마시는가 하는 문제를 안고 가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보이차를 아무 것이나 섞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김경우 씨에게 73청병과 같은 좋은 차를 그냥 마시지 않고 977542와 섞는 이유를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이렇다.

 

차라는 것은 타고난 본성이 제 각각이다. 지역에 따라, 찻잎을 따는 시기와 차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차의 본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차가 좋다 나쁘다라고만 할뿐 차를 다스려 마시는 경우는 드물다. 당연히 좋은 차는 비싸다. 잘 보관되어 충분한 발효가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그 차를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적은 돈을 지불하고도 얼마든지 차의 맛을 끌어올려서 마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섞어서 마시는 재미다.

 

오늘 마시는 73청병은 차가 습을 많이 먹었다고 볼 수 있는 차이다. 이런 차의 특징은 발효가 많이 이루어져 농한 맛은 있으나 쌩한 맛은 약하다. 차 마시는 시간이 오전이라 몸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래서 농한 73청병에 쌩한 90년대 후반 75422:1 비율로 섞었다. 이렇게 해서 마시면 80년대 초반 정도의 발효가 잘 된 차의 맛이 나온다고 한다.

 

차를 마시는 방법을 규범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 요즘과 같이 차가 귀한 시기에 좋은 차를 좀 더 농한 맛으로 즐기고자 한다면, 그만한 가치의 대가를 금전적으로 치루어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일 수 있지만 농한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다소 부족한 차를 서로 섞어서 단점을 보완하여 저렴하게 자신의 기호에 맞는 차 맛을 즐길 수 있다.

 

필자는 차를 마실 때 스스로 그렇게 해서 마시는 경우는 없다. 워낙 차를 마시는 취향의 폭이 넓어서 그런지 몰라도 되도록 어떤 차라도 그 차의 특성을 이해하며 즐기는 편이다. 이날도 손님의 입장에서 두 가지 차를 섞어서 마시는 효과를 경험한 것이다. 이렇게 마시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오늘같이 같은 두 종류의 청병을 보관

73청병을 먼저 놓고 97년 7542를 넣는 모습

 

상태에 따라 각각의 차로서는 좀 부족한 맛을 서로 섞어서 그 맛을 상승시켜 마신다는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여간 내공이 있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것이다. 이런 방법이 음식 메뉴 같이 레시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가 가진 세계는 무궁무진한 맛의 예술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다. 김경우 씨는 자신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차란 즐기는 사람의 몫이다. 즐기는 사람이 그날 마시는 찻자리 분위기와, 시간에 따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중요하다. 부족하면 채우면 되고 넘치면 비우면 된다. 차의 진정한 전문가라면 차를 잘 감평하는 것이 최고가 아니다. 감평을 할 줄 안다면 이것을 가지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즐기는 것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상대방인 것이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중요한 핵심은

차를 몰라서나 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과정을 전부 겪고 난 후의 입장에서 김경우씨는 경제적으로 차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 이렇게 보이차를 섞어서 마시는 법을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혹여 독자의 잘못된 오해가 생길 것이 우려되지만 이런 방법도 있다는 점을 필자도 공유하기에 김경우 씨의 양해를 구하고 포스팅 한 것이다.

 

차를 내는 수준이 높고 내공이 쌓이면 개인적으로 맛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집에서만 맛보는 차, 그 만의 맛이라고 한다. 오늘 맹해차창 샌산의 73청병과 977542의 조화로운 맛은 김경우 씨가 주장하는 80년대 초반의 맛과 연계한 차 맛을 함께 공유하지는 못한다. 이유는 보이차를 섞어서 내는 차를 마시면서 80년대 차맛 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만큼 수준이 안된다. 김경우 씨는 현재 보이노차를 국제적으로 거래를 하는 전문가로서 보이차의 품질 특성을 잘 아는 프로이기에 자신의 취향을 뚜렷하게 맛으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보이차를 종류별로 1020년 이상 발효된 차들을 섞어서 마시며 80년대 차 맛이라고 확정할 수 없지만 후발효차로서의 보이차 맛을 더욱 폭넓게 경험하는 의미에서는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다미향담에서 김경우 씨와 함께한 보이차 관련 지난 기사

2015/02/02 - 다미향담(152) 황인 숙차와 1990년대 맹고의 조합

2015/01/30 - 다미향담(151) 노차의 농밀한 맛, 황인 숙차와 함께

2014/12/31 - 다미향담(143) 다미향담 정리

2010/09/17 - 다미향담(2) 맛으로 승부하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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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 곤명의 보이차 시장에서는 보이차 판매의 호황은 끝났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보이차의 보관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특히 2008년 부터는 보이생차 작업을 위해서 중국 상인들은 차의 보관과 판매에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고 있다.

한국 상인들은 고유 상표를 자신있게 알리거나 다른 상인들과의 구분을 위해서 비슷한 중량으로 비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별도의 규격으로 만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훗날 판매가격에서 높고 낮음에 대해 피해갈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전 보이차 규격을 기초로 하여 357g을 전후로 400g, 500g 중량으로 만들고 있으며, 특별하게 고수차라고 하여 1kg, 2kg 짜리까지 만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 복년차장(福年茶莊)에서 기고한 글을 죽천향실 블로그 운영자 죽천향(박창식) 선생이 번역한 글이 최신 중국 자료이기에 올려본다.

普洱茶的包裝與特征  作者:福年茶莊 작자:복년차장


傳統普洱餅茶規格單位,坊間亦稱”支”。一件十二筒,一筒七餅共八十四餅,整件;爭重30千克。近年普洱茶風盛行,茶餅重量與包裝多樣化,整件重量也隨之改變。

件건: 전통 보이병차의 규격단위로 민간에서는 "支(지)"라고도 한다. 1건은 12통이며 1통은 7편, 해서 총 84편인 1건의 무게는 약 30kg이다. 최근 보이차의 성행으로 차병의 중량과 포장이 다양화해지고 따라서 1건의 무게도 바뀌고 있다.

*** 1편 100g, 200g, 250g, 357g, 400g, 500g등, 또한 1통도 5편, 7편, 8편,10편 등 다양화 되고 있으며 1건도 전통적인 12통 1건이  아닌 6통을 1건으로 하기도 한다.


傳統普洱餅茶規格單位,一筒七餅茶,淨重2.5千克。2000年,昌泰茶行開始大量生產石模400克/餅,開啟茶品規格上另一新風格。

筒통: 전통 보이병차의 규격단위로 1통은 병차 7개, 무게는 2.5kg이다. 2000년 창태차행이 석모를 이용하여 1병 400g 규격의 차품을 대량생산하면서 새로운 풍조를 만들어내었다.

***현재 1통 5편, 7편, 8편, 10편 등 다양화 되고있는 추세이다.

竹殼包裝
又稱”竹箬”,20世紀60年代以前普洱茶傳統筒身包裝,早年采用雲南天龍竹、香竹殼做爲筒身包裝,此類竹殼較爲柔軟無剛毛。近年因銷售量大增,竹殼相對不足,以其他質地較硬、剛毛較多的竹殼替代。

竹殼包裝죽각포장 :竹箬죽약(대껍질)이라고도 함. 20세기 60년대 이전의 전통보이차 통 포장은 운남 천룡죽, 향죽의 껍질로 만들었는데. 이 종류의 竹殼죽각 포장은 비교적 부드러워 뻣뻣하지 않다. 최근 시장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죽각이 부족하여 질이 다른 단단한 죽 껍질을 사용하거나 뻣뻣한 죽각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竹簸
將竹皮削成軟條狀,用以包紮筒身。20世紀60年代以前,爲傳統工藝印級古董茶所使用。1999年開始,在昌泰茶行”易昌號”開始大量使用後,又爲市場所認同。

竹簸죽파: 대나무 겉껍질(竹皮)을 부드럽게 하여 차를 담는 통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20세기 60년대 이전의 인급골동차의 전통공예에 사용되었다. 1999년 창태차행이 이창호에 사용하면서 시장에서 통용되고 있다.

牛皮紙包裝
最早應於1973年開始,國營下關、猛海茶廠用以外銷之茶品包裝,配合牛皮紙筒裝,成件包裝則改以紙箱(七子黃印、七子鐵餅、中茶簡體字、廣雲貢餅等等) 代表性早期茶品如七子黃印、中茶簡體字、七子鐵餅、中茶繁體字8653等等, 後期則以1997年茶商訂制茶品”老樹圓茶”。

牛皮紙包裝 우피지 포장 : 1973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국영 하관, 맹해 차창 에서 수출 차품을 포장시 우피지로 1통을 포장했고 1건 포장은 종이 박스로 했다(칠자 황인, 칠자 철병, 중차 간체자, 광운공병 등)대표적 조기차품은 칠자황인、중차간체자、칠자철병、중차번체자8653등, 후기 1997년 차상 주문차품 인 ”노수원차”가 있다.

大票
廠方標示茶品品名、數量、規格、編號、重量等等,如同茶品說明書。

大票 대표: 차창에서 차품의 품명, 수량, 규격, 편호(일련번호), 무게 등을 표시한 것으로 차품에 대한 설명서이다.

直式大票
1984年以前計劃經濟時代,采用統購統銷制度,省公司旗下所有茶廠茶品居均交由省公司出貨,所以茶品大票均爲省公司名義,下書寫”中國土產畜產進出口公司雲南省茶葉分公司”,市場稱之”直式大票”

直式大票 직식 대표: 1984년 이전, 구매와 판매에 통일적인 제도를 실시하는 계획경제시절, 성공사 에 속한 모든 차품을 성공사에서 출하 시켰다. 때문에 차품의 대표에는 모두 성공사 이름으로 되어있고 아래부분에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라고 적혀 있다. 이를 시장에서는 "직식대표"라고 한다.

橫式大票
1985年以後,省茶司終止統購統銷的模式,廠方可自行接訂單,以致從此時開始大票由以前直式”中國土產畜產進出口公司雲南省茶葉分公司”,改爲廠別”猛海茶廠出品”、”下關茶廠出品”的橫式大票。大票上主要標示商標、茶品、嘜號、毛重、淨重、總箱數、廠別。

橫式大票횡식 대표: 1985년 이후 성차사에 의한 통일적 구매, 판매방식이 사라지고 각 차창별로 구판매가 가능해지면서 직식대표의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라는 명칭이 맹해 차창출품 , 하관차창 출품 등의 횡식 대표로 바뀌게 되었다. 대표에는 상표、차품、마호(마크번호)、모중(毛重 순수 차엽무게)、정중(총 중량)、총 상수(상자 갯수)、창별(차창명)이 표시되어있다.

外包紙
茶餅外包紙,坊間亦稱外飛。從外包紙質、印刷、印色、板模等等,可約略推測茶品制作概略時間。

外包紙 외포지: 차병의 바깥포장지로 외비라고도 부른다。외포의 지질、인쇄、인쇄색、판모등등으로 차품의 개략적인 제작시기의 추측이 가늠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筒票
早期茶品較多,置於筒內,每一筒一張。介紹茶品產區、品種、制作方式、功效或廠方說明等等。

筒票통표: 조기 차품에 많이 있다. 매 1통 안에 1장이 들어있는데 차품의 생산구역、품종、제작방식、효능 혹은 차창의 설명 등이 적혀있다.

內票
可能由筒票演變而來,內容類似筒票,每一餅均有,置於外包紙內。一般分爲大內票與小內票,大內票約15厘米×10.5厘米,小內票約13厘米x10厘米。

內票 내표 : 통표가 변화 된 것으로 ,내용은 통표와 유사하며 매1병의 외포지에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대내표와 소내표로 나누는데, 대내표는 약15mm×10.5mm, 소내표는 약13mmx10mm이다.

內飛
壓在茶菁中的廠方或訂制者標記,可作爲辨識依據。

內飛내비: 압재된 차청안에 차창이나 주문제작자를 표기함으로, 판별의 근거가 된다.

草紙
七子黃印、中茶簡體字、七子鐵餅、73青餅、早期紅帶青餅等等所使用的外包紙張。手工制作,條紋明顯,有厚薄之分,薄者居多。

草紙초지: 칠자황인, 중차간체자, 칠자철병, 73청병, 조기홍대 청병등에 사용한 외 포장지. 수공 제작이며 문양이 분명하고 두꺼운 것과 얇은 것이 있으며 얇은 것이 더 많다.

厚棉紙
以早期8582爲代表,跨期從20世紀80年代中期開始,直至1992年最後一批厚棉紙。其間生產厚綿紙7542、7532、8582、8592、7572等。其特色爲於工制作、單面油光、條紋不明顯,稍有厚薄之分。於1996年開始亦有廠家生產厚棉紙,然紙質差異甚大,容易辨識。

厚棉紙 후면지: 조기 8582가 대표적이며 20세기 80년대 중기에 시작되어 1992년 까지 이다. 이 기간 동안 생산된 후면지를 사용 차품은 7542, 7532, 8582, 8592, 7572 등으로 특징은 수공 제작이며 한 면에만 유광이 있는데 문양이 분명하지 않고 후박지와는 두께 차이가 있다. 1996년부터 다시 후박지를 사용하는 공장이 나타났는데 종이의 질 차이가 커서 분별하기 쉽다.

網格紙
應較厚棉紙稍晚出現,大約出現在1987_1992年間,8582、8592、7532、7542、7572等猛海茶廠常規茶品均有使用這類紙張,下關茶廠代表性茶品則爲1986_1987年間之86530其特征爲手工制作,紙張有明顯之網格點狀。

網格紙 망격지: 그물지(원고지). 두터운 면지 보다 늦게 나타났는데 대략1987_ 1992년간에
8582,  8592, 7532, 7542, 7572등 맹해차창에서 생산한 정규 차품은 모두 이런 종류의 종이를 사용 하였다.

하관차창의 대표적인 차품은 1986_ 1987년간에 생산된 8653이다. 특징은 수공제작이고 종이에 분명한 그물 모양(원고지 줄모양)이 있다.

手工薄棉紙
較網格紙稍晩出現,期間在1990_1994年間,以7542、7572爲代表茶品。其特征在於不規則紙漿紋路,厚薄差異較小,更較網格紙薄,易破損。

手工薄棉紙수공박면지: 얇은 수공면지로 그물지 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는데 1990_ 1994년간의 7542, 7572등의 차품이 대표적 이다. 특징은 불규칙적인 무늬가 있으며 두께 차이가 작고 그물지 보다 얇아 파손이 쉽다.

機器薄紙
大量出現在1995年開始,國營廠時代多數常規七子餅茶品均使用。主要特色爲短細纖維紙漿均勻而無不規則纖維條索。

機器薄紙 기기박지: (얇은 기계지) 1995년부터 대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국영공장시대의 칠자병차에 많이 사용했다. 주요특징은 짧고 세밀한 균일한 섬유지질로 불규칙적인 섬유질이 없다.

外包薄油紙 (黃、白)

專指磚茶外包紙,從1973年之73厚磚開始,至1994年昆明茶廠最後一批7581時期,所使用的磚茶外包紙張均爲亮面油紙,有黃、白色之分,亦有橫條紋紙張。

外包薄油紙 (黃、白)외포박유지: 얇은 기름지 외포장 (황,백) 전차 전용의 외 포장지로 1973년의 73후전 부터 1994년 곤명차창의 7581까지 사용한 전차의 외포장지 모두가 기름기가 도는 종이인데 황색, 백색이 있으며 가끔 횡(가로)무늬 종이도 있다.

薄油紙細字內飛

爲雲南七子餅早期茶品內飛特色,七子黃印以至1995年等猛海常規茶品。主要特色在單面薄油紙,以及不明顯之網格紋。1996_1997年亦出現薄油紙張,然與1995年以前之特色不同。

薄油紙細字內飛 박유지세자내비: 얇은 기름지 가는 글자 내비. 운남칠자병의 조기 차품 내비의 특징으로 칠자황인 부터 1995년 맹해 정규차품 까지 이며 주요 특징은 얇은 단면 기름지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그물 무늬이다. 1996_ 1997년에도 이런 박유지가 나타났지만 1995년 이전 것과는 다르다.

朱砂紅
印級茶品部分茶品外包紙張印刷色料十分鮮豔,市場稱之朱砂色。另一朱砂印刷爲早期8582、7542、7532內飛印刷亦十分鮮紅,尤以早期7532(雪印)爲代表。

朱砂紅주사홍: 인급 차품과 몇몇 차품은 외포장지의 인쇄 색채가 선명한데, 시장에서 주사색이라 불리었다. 다른 주사인쇄는 조기 8582, 7542, 7532의 내비인쇄로 역시 색채가 선명하며 특히 조기 7532 (설인)가 대표적이다.

尖出、平出
雲南七子餅猛海茶廠茶品內飛上注”西雙版納傣族自治州、|勁海茶廠出品”,其”出”字下端”山”字較上端”山”字爲寬者,是爲”尖出”,若上下端”山”字爲相同大小則爲”平出”"。尖出”爲早期猛海茶品特色從七子黃印以至73青餅均爲”尖出”,期間爲1973年直至20世紀80年代中期,後於2001年開始由茶商訂制茶品始再出現。

尖出、平出 첨출,평출 : 맹해차창의 차품 내비에 "서쌍판납 태족자치구 맹해차창 출품"이라 적혀 있는데, 출(出)자중 위와 아래 山자의 크기가 같으면 평출, 위의 산자가 작으면 첨출이라 한다. 첨출은 조기 맹해 차창의 차품 특징으로 칠자황인부터 73청병이 모두 첨출로 기간은 1973~80년대 중기까지이며 후에 2001년부터 차상인들의 주문제품시  다시 출현하였다.

美術字內飛
尖出、粗字體印刷版本內飛,分爲二版本。早期7572生餅、7452熟餅印刷較爲模糊而色料較淡;少數73青餅、少數早期8582、泰國菁水藍印等內飛,印刷色料較爲鮮紅,部分字體有差異。

美術字內飛미술자 내비 : 첨출과, 굵은 글자체 인쇄판 내비, 2개의 판본으로 나뉜다. 조기7572생병과 7542숙병의 인쇄는 색깔이 연하여 분명하지 않다. 약간의 73청병과 소수의 조기 8582, 태국 차청 수남인 등의 내비는 인쇄색깔이 비교적 선명한데 부분적인 글자체에 차이가 있다.

粗字體繁體廠內飛
接續於薄油紙細宇內飛之後,爲粗字體印刷,色料較爲淡而模糊不清,薄油紙質。使用時間約爲1995_1996年間。

粗字體繁體廠內飛 조자체번체창내비: 굵은 글자체 번체 廠(창) 내비 : 얇은 기름지(박유지)에 가는 글자체 내비 이후 나타난 것 으로 굵은 글자체 인쇄의 색이 비교적 옅어 분명하지 않으며 지질은 얇은 기름지로 사용기간은 1995~1996년 이다.

簡體廠內飛
接續於粗字體繁體廠之後,字體較大。使用時間約爲1996_1999年間,1996_1997年爲薄紙,1998_1999年爲厚紙。

簡體廠內飛 간자체창내비 : 굵은 글자체의 번체 廠(창)이후에 나온 것으로 글자체가 비교적 크다.사용 기간은 대략 1996부터_ 1999년간이다.1996년_ 1997년간은 얇은 종이, 1998년_ 1999년간은 두터운 종이이다.

傣文內飛

接續於簡體廠內飛之後,字體變小,於右下角出現傣文。簡體廠、厚紙質。生產時間,原先爲1999年開始至2002年初,2003年底因猛海茶廠接受訂制茶品使用特殊內飛,從此開始至2004茸猛海茶廠改制前都有生產傣文內飛。

傣文內飛 태문(태족문자)내비 : 간자체 내비 이후 나타났는데 글자체가 작아지고 오른쪽 아래에 태문이 있다. 간체厂(창), 두터운 지질이며 생산기간은 1999년부터 2002년 초 까지 인데. 2003년 말 맹해 차창에서 차의 제작 수주를 받아 사용한 특수 내비는 2004년 맹해 차창의 체계가 바뀌기 전까지 모두 태문 이였다.

小七(丁勾七)、大七

專指雲南七子餅外包紙印刷中,”雲南七子餅”中的”七”字印刷版本。”七”字較爲細,字狹長者爲”小七”,較爲寬扁者爲”大七”"。小七”出現時間從七子黃印至1994年止,後於1996年開始又重新制作印刷,然版本與紙質差異甚大。”大七”起至於1993年。

소七(칠),대七(칠) : 운남칠자병차 바깥포장의 “운남칠자병”이란 인쇄글자 중 七자의 인쇄 판본에 대한 것으로 七자의 글씨가 가늘고 긴 것이 소七, 넓은 것이 대七 이다. 소七의 출현 시기는 칠자황인부터 1994년까지이다. 1996년 다시 인쇄하기 시작하였는데 지질의 차이가 너무 난다. 대七은 1993년 부터 시작 되었다.  

죽천향실 원문보기 http://blog.daum.net/36254598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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