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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5월 13일 점촌에 있는 문경다례원(원장 고선희)에서 안팽주 선생을 만났다. 보천사에 다녀오는 길에 들렀다고 했다. 난, 안선생님께 석우연담을 통해서 차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하나 해달라고 했다.

우리나라 차문화계에서는 안박사로 통하는 안선생님은 즉석에서 특유한 화법으로 글을 적어 주었다.

“현대문명이 발전할수록 역할이 세분화된다. 자기 전공도 아닌 사람이 남의 사정을 보고 비평은 하고 충고는 해도 비판과 선언을 해버리면 긴장과 신중함이 없어진다. 신중함을 갖는 것이 차인의 마음이다. 긴장과 신중, 겸손함을 공유하는 것이 이 시대의 차인이다.” 

안팽주 선생은 분명 속아픈 일이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 것에 대한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 말씀이 바로 비평과 충고 그와 반하는 비판과 선언이라는 글귀로 대신하신 것이다.

분명히 관심과 간섭은 다른 것이다. 관심은 사랑이지만 간섭은 질시와 질투이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람에게서 흔히 보는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것은 바로 사회에서의 어느 정도 격식있는 자리에서의 발언은 흔히 비평이 될 수 있고 또 그와 반대로 비판이 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비평이요, 그에 상대하여 나타나는 것이 배려하지 않는 행위 바로 비판이다. 속사정도 모르고, 그 이유가 어찌되었건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나오는 것이 “발언”인데 그러한 언사가 비판과 선언의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은 본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외변적인 곳에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비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비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장원 앞에서 여염집 처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질 수 있지만 그 대화를 비평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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