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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주량즈 계약을 마치고

 

밤 열두시의 쿤밍국제공항은 한적합니다.

출국 수속을 하고 40번 출구에 앉아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립니다. 작년에 백 여섯 번의 비행, 올해는 몇 번이나 탔는지 가물가물합니다. 날아온 거리만큼 다시 날아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내 인생이 날아 온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다시 돌아갈 여비라도 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몸이 물에 젖은 듯 피곤합니다. 잠이 옵니다. 전에처럼 깜박 잠들면 공항 미아가 되어 온 길을 돌아가야 됩니다.

머리를 두드리며 두 눈 부릅뜨고 출구를 지켜봅니다.

빨리 비행기에 타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싶습니다.

 

새벽 다섯시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쿤밍에서 네시간을 날아온 여정이 결코 짧지 않습니다.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이라면 아예 포기하고 잠이라도 실컷 청하겠지만 새벽 두시처럼 네시간은 애매한 시간입니다.

 

어쩌다보니 네시간을 하릴없이 잊은 생각에 젖어 있다가 비실비실 내려서 KTX 역으로 향합니다. 첫차가 일곱시라 아직도 한시간 넘게 기다려야 됩니다. 마침 야생화공원이라고 적힌 문패가 보이기에 밀치고 나가봅니다. 한동안 경험치 못했던 영하 10도의 한기가 확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눈이 내립니다.

마침 흡연구역이 있습니다.

새하얀 연기를 길게 눈 속으로 날려봅니다.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나는 내리는 눈발 속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반백의 엉성한 머리카락 속으로 새하얀 눈이 스며듭니다. 차갑고도 냉철한 이성이 다시 KTX 온실 속으로 나를 이끌고 조금만 기다리면 고속열차는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열차를 타고 다시 가족들과 동료들이 있는 일터로 향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야 겠지요!

눈은 내리고

다시 또 눈은 내립니다.

 

고속열차는 도착하고

나는 7호실 6D 좌석에 앉아 울산역 언양으로 향합니다.

아내는 지금 쯤 일어났겠지요.

어제 쿤밍공항에서 전처럼 혹시 잠에 골아 떨어져 하차 역을 놓칠까봐

도착 시간에 맞추어 전화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나는 잠을 좀 자야겠습니다.

어제도 온 종일 일을 하고 저녁엔 식사 초대를 받아

못 먹는 술까지 두잔을 마셨습니다.

아직 여명은 밝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속으로 내리는 눈발을 뚫고 고속열차는 달리고

나는 보이지 않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열망의 불꽃처럼 거리의 가로등들이 하나 둘 스쳐 갑니다.

잠이 옵니다.

이제는 자야겠습니다.

내가 잠자고 있어도 열차는 가고 눈은 내리겠지요.

일터에 도착하면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다

깨어 있다고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꿈결처럼 자다 깨기를 반복했네요.

남녘으로 내려오면서 먼 산엔 잔설이 남아 있지만

길가엔 모두 녹아버렸습니다.

도착하기까지 내 옆 자리엔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타고 내렸습니다.

모두 눈인사도 없이 말없이 앉았다가 그렇게 말없이 떠나갔습니다.

나도 그냥 좌석에 기대어 깜박깜박 하였습니다.

집으로 바로 가서 좀 쉬고 출근할까?

따르릉 이과장 전화입니다.

잘 다녀오셨어요?

멀리서 오신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화주량즈 선주문이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참여해주신 분들께 그리고 멍하이 일기를 애독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눈물겨운 마음으로 생활시 한수 올립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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