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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대 차역사라고 하면 해방 이후 1960년부터 도시에서 차생활을 즐겼다고 해도 49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것뿐이다. 일본에 비해 차에 관해서 내세울 게 없는 것은 차와 그 문화에 대해서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전해진 역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찻자리의 유형을 가지고 차를 어떤 방법으로 무슨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여 손님께 낸다고 하는 규범적인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아름다운 찻자리’라고 하여, 각 단체에서 두리차회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찻자리가 연출되고 있다. 그리고 실내의 큰 행사장에서는 지역에서 찻자리 심사와 행다법을 시연하는 사례를 흔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만큼 행다법이나 연출된 찻자리를 발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도 유발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예전에 한 번 해보고 싶은 행다법이 발표되고 찻자리에서 사용되는 도구도 직물을 이용하는 것에 관심은 가졌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차인들은 누군가의 행위를 보고 자신도 유사하게 해보게 된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먼저 발표한 사람이 저작권 운운하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같은 색깔의 방석도 만들어주지 못하게 하거나 처음 주문한 사람의 것 말고는 해주면 안 된다고 하는 말도 듣게 된다. 바느질 하는 사람들은 이러저런 이유로 좋은 찻자리에 기품 있게 등장하여 잘 사용되어 수요가 많아지면 좋은 일이다. 그것이 특정인에게만 사용되어야 하는 논리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순진 계명차문화 연구소 소장, 바닦에 다포를 크게 깔고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찻상의 규정도 없었고, 입식이 아닌 좌식일 때, 어떤 상을 차리고 다식과, 찻잔의 규격이 규범적으로 나온 것이 없다. 옛날 선비들이 바닥에서 직물을 깔고 술이나 차를 마시는 경우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바닥에 자리를 깔더라도 반드시 상에 술이나 차를 차리고 마셨다.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직물을 깔고 연출하여 차를 내는 것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전차도 다법 발표장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며, 대만에서는 현대에 와서 직물을 이용한 행다법이 가장 먼저 시행된 나라이기도 한다.

중국은 탁자를 이용한 찻자리가 대부분이라면 대만에서는 바닥에 다포와 유사한 형식이지만 규격이 다양화되어 그날 차를 내는 장소나 손님에 따라 변화를 주는 아주 재미있는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직물의 염색 방식도 다종다양하다. 작은 다포의 경우는 무아차회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다포 색깔과 같은 것으로 차를 내면 안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정로다례원 임미숙 원장의 행다법 발표전, 쪽염으로 염색한 다포에 먼저 향을 피움]

한국에서 누군가 찻자리에 대한 가장 트렌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국 찻자리의 중심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아우라를 펼질 때, 그것이 많은 한국인의 감정의 문을 두드리고 한국인의 정서가 담겨있다면 모두 그를 따를 것이다. 아직은 행위만 보여지는 것이 전국에서 대두되다 보니까 단순히 누가 먼저 했다는 원조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일본과 대만의 다양한 찻자리를 먼저 본 사람이 한국 고유의 색을 응용한 천연염색으로 미적인 감각을 돋보이게 하여 자신의 대단한 창작품인 것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전차도 선생이나 대만의 차선생들이 보면 ‘수고하셨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의 무엇을 보여 주려고 우리와 비슷한 방법으로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한국적인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 옷만 한복을 입었다고 그들이 한국적인 다법을 보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반복된 학습으로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한 번 발표하고 저작권 운운하면서 일본과 대만 차인들에게 더 이상 웃음거리를 주지 않았으면 한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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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학(71)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1세대 차인 가운데 한 분으로 칠순이 넘은 나이 임에도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 개인 차실로 출근하며 우리의 찻자리를 지켜나가는 분이다.

선생님은 지난 3년간 큰 수술을 두 번이나 치루면서 건강하지 못한 가운데도 안국동 화정다례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중국에서 유학중에 논문 발표로 잠시 귀국한 김영숙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화정다례원 차실에서 약속하고 찾아가게 되었다. 주 1회, 화요일 한국차, 일본차 교육이 있다고 한다. 외형적으로는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얼굴은 여전히 고운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님께 즉석 인터뷰라고 하며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 한 마디 요청을 하게 되었다. 신운학 신생님은 그동안 사람과의 관계에서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인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차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뭔가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스승을 모른척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며, 스승을 무시하면 자신의 존재도 무시되는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화정다례원 차실에서 2009년 6월 16일 오후 3시]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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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중앙동에서 20년 이상 중국차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삼소방 이창희 대표를 6월 4일 만나게 되었다. 이영자 선생님의 책 "보이차 세계"에 삼소방 이창희 대표의 사모님이 긴차 다예 표연부분에 나오게 되는데 사진 촬영문제로 의논하러가게 된 것이다. 오후 6시30분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가게로 걸어가는 저 쪽에 환하게 비추고 있는 삼소방 간판은 창원지역 뿐아니라 중국차에 대해서는 전국에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테이블 옆에는 목책철관음이 있었다. 최근 불경기로 중국차 전문점에서 목책철관음 두등을 쉽게 볼 수 없는 차가 20통이나 있었다. [삼소방 이창희 대표]                             요즘같은 어려운 시기에 20통이 있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데 요즘 차시장 경기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지내세요 하고 안부 인사겸, 앉자마자 물었다. 여기 두등이 20통이나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아... 목책철관음 그 차는 3일전에 40통 들어왔는데 20통은 팔고 남은게 20통이다고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대만에서 봄에 만든 목책철관음은 공정한 심사로 특등, 두등 삼등 등으로 등급이 나누어지고 공정한 값이 정해지는 것을,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으로 정확한 유통이 이루어지는 차이며 다른 차에 비에 유통마진이 많지 않은 이런 차를 이만큼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의 거래 실적을 대변해 주는것이다.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설명, 목책철관은 특등, 두등, 이등, 삼등, 우량으로 구분한다]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운영을 어떻게 하시는지? 허허 웃으시며 차(茶)라는 것이   경기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든지 차를 팔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팔리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이 바닦에 있어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오는 손님께 차 대접 잘 해드리는 것이 훗날 경기 좋을 때 나를 찾지 않겠어요 라는 답변이다. 뭔가 차 사업에 달관하신 분 같다.

삼소방은 국내에서 대만 오룡차 계통의 차를 많이 수입하여 판매하면서도 흑차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로 천량차와 보이차를 많이 소장하고 유통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경기가 얼마나 빨리 좋아질지 모르지만 상도를 지키면서 기다리는 자에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 삼소방도 그 가운데서 전문점의 위상을 지켜나갈 것으로 본다. 

사장님은 편안한 찻자리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가지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다. 이 대표는 즉석에서 첫번째, 차는 차가 중심이 되는 것은 맞지만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기본적으로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음식이란 흔히 차인들이 준비하는 다식으로 떡이나, 송화다식, 양갱 등과 같은 것에 국한되지 말고 차와 어울릴 수 있는 음식이 준비되어야 한다. 바쁘게 왔다고 빈속에 차를 마시면서 무슨 즐거움과 기쁨이 있겠는가?

두번째, 대화에 주제가 있어야 한다. 너무 차 이야기만 하기 보다는 대화의 소재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서로가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한다. 고 한다.

요즘은 모든 분야에서 잘 되는게 없다고 한다. 차 관련 업종도 예외는 아니다. 지방에서 20년이상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뢰일 수 있다. 이곳에서 이루어 지는 다양한 찻자리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 차인들에게 희망이 담긴 소식을 블로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2006.06.04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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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진중권 교수의 블로그는 지난주 까지만 해도 순수하게 개인적인 비행기와 관련된 이야기로만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근데 오늘 그의 블로그에서 누군가에 대한 응징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솔질히 나는 어떤 사연인지는 잘 모르지만 범상치 않는 응징에 대한 각오를 보게되었다. 문화평론가로서 자신의 저서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기술한 것을 보며 이 시대 한 분야에서 리더할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 다수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것에 대응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진중권 교수는 평소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 문화에 대한 답론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하였고, 혼돈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명쾌한 답변을 제시하는 것을 보았고, 최근 TV 공개 토론장에서 보여준 그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내리겠지만 자기 주장에 대한 이론과 논거는 확실해 보였다.이제 그에 대한 비판 세력이 교단에서의 자격 운운하는 것에 대해서 진중권은 자신의 교직활동과 저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학문하는 사람으로 여러가지 참고할 점이 많아서 객관적인 부분만 옮겨 보았다.

듣자 하니 인터넷 낭인들이 주제에 나의 객원 자격을 문제 삼는 모양이다.

어느 대학에서나 그러하듯이 한예종에서도 나를 채용할 때 근거로 삼은 것은 두 가지, 교직활동과 저술활동이다. 교원 채용 시에 이 두 가지 활동은 경력으로 환산되어 교수에 대한 처우의 수준을 결정하는 자료로 사용된다. 한예종 측에서 고용시에 작성한 ‘객원교수 경력 환산자료’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는 나의 교직 및 저술의 경력이 ‘전임교수 연구실적물 심사기준’에 따라 ‘몇 년 몇 월’이라는 수치로까지 환산되어 있다. 객원교수 임용의 근거는 이렇게 명확히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 객원 임용의 근거가 된 두 가지 경력을 살펴보자. 먼저 교직경력. 나는 몇 년 전부터 여러 대학에서 Art &Technology 관련 연구와 강의를 수행해 왔다. 먼저 2006년 이후 KAIST Culture Technology 대학원에서 대우교수 혹은 겸직교수로 재직했다. 2007년에는 서강대 영상대학원에서 같은 분야의 겸임교수를 지냈다. 중앙대에서는 2003년 이후 겸임교수로 독어독문과와 문화연구학과에서 미디어 예술, 미디어 미학, 미디어 철학을 강의해 왔다.

연대 커뮤니케이션 학과와 성대의 신방과에서도 미디어 철학을 강의한 바 있고, 대학 밖의 아카데미와 온라인으로 미디어 미학과 예술에 관한 강의도 했다. 이 모든 경력의 증명은 채용 당시에 서류로 제출한 바 있다.

채용의 또 다른 근거는 저술경력이다. 그 동안 미학과 예술학 부분에서 내가 쓴 저서들에 관한 증명도 물론 채용 당시에 근거자료로 제출한 바 있다. 내가 그 동안 어떤 책을 써 왔고, 그 책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어땠을까? 인터넷으로 대충 검색해 정리해 보았다.

미학 오디세이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전문가 100인이 선정한 ‘90년대를 빛낸 100권의 책’ 선정 (2004년) <KBS 책을 말하다>로 방영  -동아일보 선정 ‘열아홉 살의 필독서 50권’ (2005년)

-한국일보 선정 ‘우리 시대의 명저 50’ (2007년) -KAIST 독서마일리지 ‘추천도서 100권’ (2007년)

폭력과 상스러움 제43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사회과학부문 (2000년) 국민일보 문화부 선정 올해의 책 (2002년)

현대미학강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10월의 읽을 만한 책’ 선정 (2003년)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KBS <TV 책을 말하다> 선정 ‘올해의 10권의 책’ (2005년) -문화관광부 추천 도서 (2005년)

서양미술사 I  -문화체육관광부 추천 도서 (2008년) 

<서양미술사I>이 유인촌 장관 산하의 문화부에서 2008년의 ‘추천도서’로 꼽힌 것이 매우 이채롭다. 그밖에 미학과 예술학 분야에서 내가 쓴 책들은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재나 참고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내 책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알아보자. 국립C대학교 영문과 O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 내가 쓴 미학 서적 두 권에 대한 논문을 싣고, 아예 책에 <이론과 이론기계-들뢰즈에서 진중권까지>라며 특별히 내 이름을 부제로 적어 넣기도 했다.

1부 이론에서 이론-기계로

들뢰즈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 유목주의와 자율주의의 비판적 검토

근대와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의심하기 - 가라타니 고진 읽기

세속의 지성과 망명자의 시선 - 에드워드 사이드의 사유와 정치론을 중심으로 재현미학에서 존재미학으로 - 진중권의 미학서 두 권 읽기

매우 황송하게도 들뢰즈, 가라타니 고진, 애드워드 사이드와 나란히 진중권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S대 독문과의 A 교수는 내가 쓴 두 권의 미학서에 자극을 받아 <숭고의 미학>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 책의 서문을 인용한다.

“진중권 선생으로부터 증정 받은 <앙겔루스노부스>와 <현대미학강의>에 풍부하고도 유려하게 서술되어 있는 ‘숭고의 미학’의 역사와 현재성을 호흡하듯 읽어 내려가며 초심의 열정이 점차로 되살아났다. 거기에 이미 상당 부분 정리된 글을, 손질해서 책으로 내놓지 않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협업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만날 때마다 격려와 질책을 술안주로 내놓는 진 선생의 덕담이 조금씩 마음을 움직였다.” (p.10)

-----------------<하략> 진중권 블로그 원본 보기http://blog.daum.net/miraculix/

2009년 6월 5일 04:00 접속해보니 아래와 같은 접근금지 조치된 글로 나온다

=> [권리침해신고 접수로 인해 임시 접근금지 조치된 글입니다.] 로 표시됩니다.

공개된 게시글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것으로 주장하시는 신청인께서는 관련기관에 심의 및 조정을 신청 하실 수 있으며, 해당 기관의 판단에 따라 명예훼손 여부가 결정되면 문제가 되는 게시글은 영구 삭제 되며, 삭제 조치 내용이 공지됩니다.
=> [권리침해신고 (정통망법 제 제44조의2) 에 의해 삭제 조치된 글입니다.] 로 표시됩니다.

그러나, 30일 이내에 관련 기관의 결정을 첨부하여 주지 않으시면, 임시 접근 금지 조치가 해제되어 신고가 접수된 게시글은 복원 조치 됩니다.

2009년 6월 5일 23:00 접속하니까 한국같이 쉽게 제제하지 못하는 구글 블로그로 이사를 했습니다.

  http://ch601.blogspot.com/

2009년 6월 10일 접속 결과 아래와 같은 글이 김경환 법무부 장관께 올리는 글이 있습니다. 본문의 맨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 참조 (http://blog.daum.net/miraculix/18263673

그리하여 김경한 장관께 묻습니다

소송을 취미/레저, 정치투쟁, 사업모델로 이해하는 매우 독특한 법 이해를 가진 사람이 법무부 정책위원이라는 사실은 양식을 가진 국민을 경악시키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위원’이 되어 법무부의 정책에 영향을 끼친다니요. 이 얼마나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일입니까?

 

최후의 수단이어야 할 법을, 최우선의 수단으로 삼아 비판자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휘두르는 사람이 버젓이 법무부 정책위원을 지낸다니요. 이는 선량한 국민들이 보기에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법부터 휘둘러대는 무지막지한 무차별성이 이명박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내세우는 이른바 ‘법치’라는 것인지요?

 

"솔직히 사이버수사대를 통한 고소는 처음이라 절차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빠르게 수사가 진행되지는 못한다. 내가 현재 법무부 정책위원 활동을 하는데, 다음 회의 때, 사이버 수사를 신속처리할 수 있도록 건의안을 제출할 예정이기도 하다."

 

얼마전 변모 위원께서는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사적 감정을 곧바로 정책의 건의로 연결시키는 태도에서 우리는 놀라움과 섬뜩함을 느끼게 됩니다. 법무부 장관께서는 먼저 변모가 어떤 자격과 경력으로 정책위원이 될 수 있었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또 상식을 초월하는 폭력적 법 관념을 자랑하는 사람이 과연 법무부 정책위원으로서 자질이 있는 것인지도 함께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6월 11일 접속 결과 아래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입었던 피해에 대해 적절한 물질적 보상을 하고, 아울러 이제까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며, 앞으로 착한 네티즌, 예쁜 네티즌이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하면 용서해준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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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오후에 김희자 선생을 역삼동에서 만났다. 그의 첫번째 저술인 "백과사전류로 본 조선시대 차문화"(국학자료원)의 책을 받기위해서다. 그의 박사논문을 조금 보완하여 만든 것인데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 받는 이 책이 우리나라 차문화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원하는 바다.

이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중심으로 하여 백과사전류ㆍ전문다서ㆍ제 문집에 나타난 차에 관한 기록을 포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조선시대 차문화의 일면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일부 백과사전류에는 茶에 관한 내용이 세부적이면서도 방대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차문화에 대해서는 茶詩와 茶書 그리고 여러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에는 역사적ㆍ문학적ㆍ실용적인 면 등이 포괄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품격 있는 조선시대 茶문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특히 백과사전류에 보이는 차에 관한 기록들은 조선후기 차문화가 재도약 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필자는 「오주 이규경의 도다변증설 고찰」ㆍ「도다변증설에 나타난 차 종류에 관한 연구」ㆍ「조선시대 百科事典類에 나타난 茶에 관한 연구」 등의 선행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차문화에 대해 주목하였다. 그러나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각종 문헌에서 차 관련 내용을 찾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1,2장에서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荼茶辨證說」ㆍ「種茶薏苡靑蘘辨證說」ㆍ「四時十二時淸趣辨證說」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하여 오주의 차문화관에 대한 면모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였다.

「도다변증설」에서는 茶史를, 「종다의이청양변증설」에서는 茶事를 담고 있으므로 그의 차문화관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지닌다.

3장 「조선시대 백과사전류를 통해 본 차문화」에서는 16세기 이후의 조선 지식인들이 수용한 차문화의 성격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백과사전류에서 다루고 있는 차에 관한 기록이 분량에 있어서 문헌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중국의 茶書나 農書를 참고하고 인용하였으며 우리나라 農書들과도 서로 중복 인용된 부분이 나타난다. 당시의 백과사전류는 사전형식을 빌려 지식의 일대 寶庫를 이룬 문헌이다. 여기에 기록된 차에 관한 내용들은 조선시대 차의 역사를 말해주며, 당시 차문화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4장 「전문다서에 나타난 차문화」ㆍ5장 「諸 文集에 나타난 차문화」는 후속 연구를 위한 자료제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늘날 茶는 학문으로 체계화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茶學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존하고 있는 문헌은 물론, 번역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문헌들이 적극 발굴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체계적인 정리와 연구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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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많은 책이 발행되고 있다. 책의 홍수라고 할 만큼의 책을 두고 옥석이 가려지는 일이 생기지만, 무엇보다 급한 것이 사전류였다. 개인적인 작업으로는 큰 성과를 이루기 어렵지만 누군가 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전류도 전공분야 별로 다양하게 나와야 하인데, 이번에 서원대학교 박병근 교수의 편저로, 대한 차학 사전이 발행되었다. 소사전이지만 발행이 되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녹차, 綠茶, green tea, りょくちゃ, Gruene Tee 신선한 찻잎을 신속하게 수증기로 찌거나 가마솥에 덖어 산화효소 작용을 억제하여 폴리페놀 물질을 발효 시키지 않고 만든 불 발효차. 녹색이 지녀지고 풋풋한 향이 있음. 열처리 방법에 따라 가마솥에 덖어서 만드는 덖음차(釜炒茶)와 수증기로 쪄서 만드는 찐차(蒸製茶)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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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南北朝)시대로 내려오면서 무덤조각이라는 한 대 미술의 전통은 남조에 계승되었는데 이에 대응하는 북조(北朝) 지역에서는 그 문화가 한문에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알려진 자료만으로 보면 일단 단절되었다고 한다.

남조에서는 각 왕조를 통해서 제왕, 귀족의 분묘앞에 석수가 장식되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고고학 전문가의 해설을 들어며 당시의 벽사가 어떻게 생성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들어면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송 무제의 초녕릉을 비롯하여 제(齊)에는 강소성 단양현에 있는 명제의 흥안릉(興安陵), 양(梁)에는 남경 효화문의 숙수(肅秀)묘, 강소성 순용현(旬容縣) 소적(蕭績)묘 등의 여러 예가 있고 금후로 더 많은 유품이 기대되지만 능묘의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하고 땅 속에 묻힌 채로 있는 것도 적지 않다고 한다. 중국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화재로 많이 있지만 그것을 지켜나가는 힘이 대단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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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계파를 초월하여 그들의 차에 대한 정신세계가 한국이나 중국과는 전혀다른 와비정신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자신이 처한 그 순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고 본다.

[일본승려 소고소구 스님] 2009년 5월 28일 조계사 내 찻집 “나무”에서 가진 명가원 번개 모임에 일본에서 오신승려 “소고종구스님”의 일본차 시연과 짧은 질의 응답이 있다. 중간에서 통역을 맡으신 원충스님의 다도 스승이기도 하여 그 인연으로 한국에 오셨고 기념으로 이러한 찻자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본 차인들의 생활속 다도정신은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 날을 예로 든다면 전기로 물을 끓이는 화로의 전선이 눈에 튀어 선생님 앞에서뭔가 선을 숨기고자 하니까 숨길 필요는 없다.                           

실내에서 잘 갖추어진 차실에서 차를 내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외부에서 차실로서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차를 내다 보니까 이렇게 전기화로 선이 노출되었는데 이것은 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봐주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일본 차인들의 생각이라면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로는 미리 준비하여 전기선이 보이지 않도록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런 준비를 전혀하지 않고 그대로 검은 전기선이 노출되어 차를 내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일본 차를 많이 접하지 않은 분들은 이날의 일본 승려의 차내는 법은 여러 가지로 본보기가 되는 자리였으리라 본다. 일본 찻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나는 사진 촬영으로인해서 늦게 자리에 앉아 차를 받았다. 78세의 나이에 이렇게 타국에서 차를 내는 봉사정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 하면서도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건강한 차 생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참가자를 대표해서 두가지 질문을 하였다. 일본에서 고이차와 우스차는 재배할 때부터 구분하여 관리하는가? 또 하나는 고이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차의 값은 얼마정도 되는가? 일본의 차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우스차의 값은 얼마정도인가? 이런 질문은 초보적인 이야기이지만 여기 참석한 분들에게는 한국, 중국, 일본의 3국에서 차생활에 드는 비용부분을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중국차에 대한 열풍과 특히 보이차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신으로 인하여 바르고 건강하게 차생활을 영위하고자 분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심지어는 차생활을 한다면 보이차를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 처럼, 아무리 좋은 차를 대접해도 보이차를 마시지 않았다면 뭔가 대접에 소홀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중국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왜곡된 차생활이 있기에 다도입문 55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차생활을 한 분의 가치관을 조금이라도 엿듣고 싶었다.

그들의 단박하고 참신한 차생활을 참석한 지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고이차용 말차와 우스차용 말차는 재배할 때 구분되어있다고 한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혼돈하는 분들에게 의미전달을 바로하기 위해서 질문하게 되었다. 고이차로 사용하는 찻값은 한 캔에 5,000엔-18,000엔 정도, 우스차는 차 선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차이므로 차를 어떤 방식으로 구입하는가 하는 유통적인 문제가 있기에 가격을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하셨다. 필자가 현지에서 일본 다도의 세 가문인 우라센케, 오모데센케, 무사노코지센케의 차 선생님들이 많이 일반적으로 차실에서 사용하는 말차는 1,4000엔에 5,000엔 정도로 알고 있다.

일본은 찻값의 유통이 건전한 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예상가능한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녹차 가격은 포장지에 표기된 값도 판매처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찻자리에서 많이 등장하고 차인이 아니라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보이차 가격은 유통적인 측면에서 보면 예측이 가능한 것이 되지 못한다. 무조건 비싼 것이 좋을 것이다는 시장 원리와 보이차 값은 다르다. 처음부터 차 자체를 잘 모르는 분들이 이러한 유통 구조를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다. 일본의 다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차의 가격을 볼 때 우리는 너무 비싼 차를 마시고 있거나 비싼 차 값 때문에 차생활을 영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 차의 세계에서는 고가의 차, 특별한 차로서 차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여럿이 있는 가운데 같이 듣고자 질문을 하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고종구 스님은 78세 임에도 곳곳하고 단아한 자세와 밝은 얼굴, 일기일회의 정신으로 차 한잔 씩 모두에게 내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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