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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기억에서 문화적 자각으로 가야만 할 전시... 야나기展

2006년 11월부터 2007년 2월25일까지 두 차례나 전시 기간이 연장되고 있는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전은 근래 보기드문 좋은 기획전이다. 이 번 전시를 두고 각 언론사에서 나온 글이나, 주요 잡지에서 다루는 것을 보면 야나기가 남긴 우리나라의 미에 대한 글에 무조건적인 찬사의 글들만 주목받고, 전시내용에 관한 글이 그다지 없음은 아쉬운 일이다. 특히 야나기의 평을 중심으로 가감없이 인식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우리문화에 대한 지평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필자는 야나기가 우리나라의 미를 전반기에는 ‘비애의 미’라고 하고, 후반기에는 ‘무작위의 미’라고 ‘한국의 미’를 단편적으로만 평가한 점은 시대적 한계 면에서는 인정하지만 한국이라는 역사를 통틀어 통시적인 美의 맥락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중략 -
필자와 같은 차를 좋아하고 다도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면 꼭 한 번은 봐야하는 전시라고 본다. 가능한 여건이 되는 분의 관람을 권한다. - 석우.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와 민예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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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3월 21일 아버지 나라요시, 어머니 가쓰오의 3남으로,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효에정 2초메 13번지에서 출생.
1891년 1월 14일 아버지 나라요시 사망
1901년 9월 12세의 나이로 가쿠슈인 중등학과에 진학, 시가 나오야 등 《시라카바》 도인들과 교유 시작. 하토리 다노스케 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이 싹트다.
1907년 4월 가쿠슈인 고등학교에 진학(18세). 스즈키 다이세쓰, 니시다 기타로, 간다 나이부, 노야나기 시키타 등의 여러 교수에게 지도받았다.
1909년 2월 고오리 도라 히코 등과 회람(回覽), 잡지 《도엔(桃園) 》 발행. 9월 4일 일본에 온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의 집을 무샤노코지 사네야쓰 등과 함께 방문하여 동판화 기법인 에칭의 실연을 보고 이야기를 듣다. 이 무렵 골동품 가게에서 처음으로 조선 항아리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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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있는 다기’라고 하는 것은 격(格)을 갖춘 다기라는 말과 상통한다.

만든이의 정성과 기술에 속됨이 없어야 한다. 장인의 작품으로 재료의 선택에서 마무리까지 정성이 묻어나야 한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사용하면 할수록 격조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이를때 우리는 품격있는 차도구라고 한다. 비싼다기는 무조건 값이 비싼 것을 말한다. 비싼 다기를 수준이 높은 찻그릇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값이 비싸다는 것은 이벤트와 함께 브랜드의 인식을 심어주고, 그후 값을 마구 올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비자들에게 비싼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게 하며 판매되는 물건이다.

그래서 ‘품격있는 다기’라는 말과 ‘비싼다기’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

‘좋은 것을 들여 놓았다’와 제일 비싼 것을 사왔다‘는 말로 구입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과 같다. 모나리자는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화면 앞에 서면 잘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런 그림을 명화(名畵)라 하는데, 그 당시에 가장 비쌌던 그림이라는 설명은 어디에 찾아보아도 없다.

노블(noble)과 익스펜시브(expensive)는 뗄 수는 없지만 구별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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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애호


차는 기호품이다. 그에 따른 도구들도

사람들의 이호에 따라 선택되는 기물이다.

그저 하나 있어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재미있고, 가지고 싶어서

여럿을 둘 수도 있고, 가지각색으로 가질 수도 있다.


그 선을 넘어 어느 한 가지에 애착을 가지고

좋아하는(好) 것은 애호이다.

더불어 그러한 기물을 빚는 이와의 담소 속에서

허물없이 애정어린 물건을 본다는 것은

실상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매니아가 되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외면 받을 만한

기행(奇行)을 한다.

누가 찻잔에 루페를 들고 감상하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즐겁다. 그 순간만은 세상에서 최고로 즐겁다.

기물을 만든이와 함께하고, 또 전문적인 매니아가 함께한다.

주인도 기분이 좋은을 것이다.

그는 마이스터(Meister)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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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丁亥年 황금돼지를 꿈꾸며 마시는 정흥원차鼎興圓茶 -

600년 만에 돌아온다는 황금돼지해인 정해년, 2007년<자연주의> 1월 찻자리는 흔히 골동보이차의 하나인 정흥원차를 품다하는 찻자리이다. 참석인원 14명 완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KTX열차를 예약하고 하루의 일과 중 많은 부분을 사전에 정리하면서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갈 때의 마음은 차에 대한 관심과 열정만으로 그 곳을 향한다. 나는 수많은 차를 마셔왔고, 책에서도 보지 못한 차를 찾아 중국 대륙을 행단하기도 한 차 꾼으로서 중국과 대만 홍콩에서도 건강한 골동 보이차를 접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차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자 함이다. 또한 그러한 찻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향기도 맛고 싶어서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정흥원차(鼎興圓茶), 솥정鼎(존귀하다, 이제 한창), 일어 날 흥興(창성하다, 성공하다) 이라는 좋은 의미의 이름을 가진 老보이차를 품다하며 희망찬 새로운 한해를 연다는 마음이 크게 자리한 자리였다.

일시:2007년 1월 20일 오후 6시 - 11시 / 궁중 떡 볶기를 곁들인 건강 죽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찻자리 시작, 지각하신 분은 옆 자리에서 건강죽(잣죽)을 먹고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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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흥원차를 마시면서 담소하는 모습으로, 남자 7명 여자 7명으로 지난번 참석자와 중복되지만 늘새로운 참석자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고정 참석자가 서로 양보하며 참석하는 경향으로 좀 특별한 자리임에는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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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찻자리의 주인공인 정흥원차(鼎興圓茶), 주인장의 차에 대한 안목을 볼 수 있는 건강한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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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주는 박창식 선생이 했다. (이번 사진이 최악의 상태로 좋지 않다. 더 좋은 디카를 가져갔는데내 손에 익지 않은 것이라, 조명 관리설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또 하나의 카메라로는 흑백으로 촬영했는데 현상과 인하가 될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사진이 좋지 못한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올리게 된 점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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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부인은 두 번째 참석자로서 남편을 모시고 와서 차 맛을 들려놓을려고 하는 것 같다.근데, 남편이 더 진지하게 차에 대한 관심으로 가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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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찻자리에 참석한 분 가운데, 노차 즉 골동 보이차라고 하는 것의 원초적인 맛을 몸속 깊이느끼고 즐긴 분이다. 표정이 그만큼 여유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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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인 이정미 씨의 와인에 대한 간단한 설명, 중간 타임에서 와인을 마셨다.

20시 30분-  황산모봉 긴압차 음다 하기

21시- 치즈와 함께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나누며

장소:대구 수성구 지산동 1054-1 찻집<자연주의>
(TBC방송국 건너편)053-761-5161, 011-825-0949
참석인원: 17명 - 손님 14명, 주인부부, 게스트 박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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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두 번째 찻자리...


일시:2006년 11월 18일(토) 오후 7시 ~12시50분


참여인원: 12명


자연주의에서 주최하는 특별한 찻자리에 두 번째 참석하면서 오늘 마실 차에 대한 궁금증과 누군가 새롭게 만나게 되는 차인의 모습이 또 새롭게 인연 지어질 사람과의 만남이 어쩌면 내게는 더 기다려지는 일인지 모른다.


오후6시 30분~7시 20분: 나는 6시 30분에 도착하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첫 번째 찻 자리에도 참석하신 Y씨가 오셨다. 지난번 찻 자리에서 품다한 홍인의 엽저를 잘 보관하여 자차한 차와 잣죽으로 가벼운 요기를 하는 가운데 “매다옹” 안재한 선생님이 경주에서 “아사가”다원을 운영하시는 김이정 씨와 경치 좋은 산골, 구름 같은 집에 정갈한 차실을 가지고 계신 오누이를 모시고 참석하셨다. “아사가”의 김이정 씨는 초면인데도 첫 느낌이 “천상 茶人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아한 기품이 들어오는 주변에 퍼지는 듯했다.


조금 뒤 한 분 두 분 오셨는데 지난번 참석자 가운데 한부부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지만 이 자리에 참석하려고 다른 이벤트를 모두포기하고 오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원스님과 대구 지역 J국회의원, 피아노를 조율하시는 분, 부산에서 오신 P님을 포함한 12명 전원이 참석하였다.


7시20분~8시: 인터넷 상에서 율리 라고 불리는 닉네임을 가진 부부의 결혼 22주년을 축하하는 간단한 이벤트로(케익, 샴페인으로 축하와 건배) 모듬치즈, 궁중 떡 볶기와 함께한 와인 맛보기가 먼저 진행되었다.


8시~9시: 경창원차(1930년대 경창호 60g)를 내기 전, 경원스님의 자사호 선별에서 필요한 몇 가지 주의 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밖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수준 높은 자사호 감식안을 엿 볼 수 있었다. 많이 사용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연대별 감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일반적인 사용자는 전혀 알 수 없는 진본 사용자의 귀중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격인 경창원차를 품다 할 때, 주인 박창식 씨가 차를 우리게 되었다. 손님으로 앉은 분 가운데 고수들이 많이 있으면 자세가 흔들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도 차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차를 우려내는 것을 보면 그동안 茶人 이정미 씨의 부군으로 활동한 것이 그저 지나간 세월은 아니었다고 보여 졌다.

경창을 60g 넣고 차를 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경창의 맛, 그 순수한 본질의 맛을 찾아서, 그 맛을 보기 위해서 자리에 모인 12명이 한꺼번에 차를 마시며 실하고 농한 차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차를 내는 사람의 경륜의 힘도 함께 실린 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때 쯤에서 각자의 소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 차에 대해서 비슷한 수준의 다른 차와 비교해서 음다를 할 수 있는 분은 4-5명 정도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참석자들에게는 차 마시는 공부를 하는 자리다 하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보이차에 관해서 만큼은...(손에 드는 잔마다 열복이요, 순간 넘김마다 희열이니 자리함만 해도 천복인데 모자란 지식은 뒷 춤에 감출 수밖에)


9시~10시: 신작 보이차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1950년대 녹인(람인) 40g 품다

10시~11시30분: 대홍포를 포함한 암차이야기와 백엽 봉황단총, 백계관 품다

11시30분~12시: 차 도구에 대한 이야기와 안휘성 구화불차 품다로 마무리.


이 시간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많은 찻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 찻자리는 모두 그 순간 최고의 찻자리도 있었을 것이며, 소박한 가족의 잔 나눔도 있었을 것이다. 삶에서는 가족과의 찻자리가 가장 소중하다. 우리는 마치 식구들처럼 둘러앉았다. 그리고 집안의 귀한 차들을 꺼내어 특별한 날을 서로 기꺼워하며 보배들을 나누어 즐겼다. 배움에 즐거워하였고, 만남에 즐거워하였다. 더욱 큰 기쁨은 알고자 하는 것과 배워서 아는 기쁨, 그리고 만나고자 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존재와의 해후에서 보여 지는 확인과 실증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수많은 찻자리에서 이 찻자리는 정신적인 쉼터가 될 것이다.

이에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하였다.

남을 수 있는 찻자리는 흔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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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홍인과 와인의 만남은 2006년 10월21일 처음으로 참가인원 전원 회비 10만원을 내고
차맛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인터넷으로 공지하고 신청받은 최초의
찻자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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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인급 보이차 홍인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차 꾼으로서는 복이었다. 평범한 찻자리에서 벗어나 이름난 명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茶人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그러한 명차들을 순례하며 그 자리를 만들어 가질 수 있는 첫모임이 대구 수성구에 있는 자연주의에서 만들어졌다.

지금껏 무엇을 보았네, 어떤 것을 마셔 보았네, 어디에서 그런 자리가 있었네 하는 마치 전설같은 말들이 있어 왔다. 차인중에 유독 그 깊은 세계에 빠져 궁극의 차를 좇아 매진하는 이들을 흔히 차꾼이라 하는데 바로 그와 같은 애호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진정한 차의 세계에 빠져보았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찻자리가 다수 있어 매니아들의 순례가 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찻자리가 자리매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같은 모임과 차후 정례적인 운영이 약속된다면 유한한 세상사의 가장큰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줄 차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우리도 이런 찻자리가 만들어 질 때가 되었으며 일반을 넘어서기에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시대는 지났다. 국제적으로도 접하기 힘든 이러한 찻자리가 만들어 진다는 것은 우리 차꾼들도 만만치 않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까?


찻자리를 마치고 주인의 후기


2006년 10월 21일 오후 6시 20분부터 시작된 <자연주의>에서의 찻 자리는 분명 새로운 시도였다. 10여명 정도의 참석을 예정하고 기획된 찻 자리였으나 의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21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규모의 찻 자리가 되어 주관하신 분들이 꽤나 땀을 흘리셨다. 

5시 30분부터 한분, 두 분 모이신 참석자들은 행사의 시작을 앞두고 몇 가지 건강약초를 넣어 달인 우리토종 대추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셨다. 멀리 서울과 경기도 광주에서 그리고 부산에서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행사의 시작은 예정보다 조금 늦은 6시 20분부터 잣죽과 궁중떡복기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로 시작 되었다. 식사후 찻 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참석하신 분들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보이차 관련 영상물을 30분정도 관람하였는데 이 영상물은 2002년 10월경 국내에서 촬영된 것으로 복원창을 포함한 100여편의  호자급 인자급과 중다패 번체 칠자병자 까지 국내의 모 소장가가 가지고 계셨던 보이차를 통채로 개봉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으로 이제 국내에서 두 번 다시는 찍을 기회를 가질 수가 없는 희귀 자료이다. 정식 찻 자리는 대만 청차인 ‘대우령’  2가지를 같이 우려서 그 맛과 향의 차이를 느껴보며 입안의 침샘을 개운하게 자극시켜 놓고 드디어 오늘 찻 자리의 주인공인 50년대 인급 푸얼차, 홍인을 우리기 시작하였다.

팽주로 앉으신 광덕사 주지, 경원스님께서 차에 대한 좋은 말씀을 하시면서 홍인 70g을 커다란 은주전자에 넣어 우려내셨고  우려진 홍인은 그야말로 인급차의 왕자답게 웅장한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 주전자 속에서 우려진 홍인은 4개의 숙우에 옮겨져 참석자들의 찻잔에 담겨졌다. 홍인의 맛과 향은 참석한 모든 이들 의 입 안 가득, 마음 가득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다.(참고로 2004년 3월 13일 홍콩 신성다장의 보이차 음다회 에서는 참석인원 120명에 람인 철병(50년대) 반편(180g가량)이 쓰여 졌다.)

홍인의 향기가 아직 입안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경원스님께서 다음 찻 자리에서 품다할 차로 1930년대의 조기 경창호를 주최자에게 요구하시며 오늘 가볍게 맛보야 되지않느냐고 강한  압력을(?) 가하신 덕분에 한편의 완벽한 상태의 온전한 경창호가 찻 자리에 등장하였고 그 한편에서 뜯어진 30g의 경창호는 은주전자로 들어갔다. 첫잔을 마시자 홍인의 장중함이 남아있는 입안에서 경창의 깊은 은은함이 느껴지며 순간 시원함이 목 줄기를 타고 흘렀다. 참석한 분들은 경창의 오묘한 맛과 향을 칭찬하며 홍인과 경창을 함께한 오늘의 이 찻 자리는 이젠 전설과 역사라고 하신 어느 분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차를 품다하는 동안 경원스님은 ‘차는 건강에 도움을 주는 작용을 하지만 결코 약이 아니며 심신의 수련에도 분명하게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차는 차일뿐 이지 결코 약이나 특수한 물질이 아니다. 이것은 보이차도 마찬가지이다. 차의 본질은 덤덤한 가운데 오미를 품고 있는 차의 성품이다. 우리는 오미를 모두 담은 차의 성품을 통해 수신하고 수심하기위해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다.’ 하시며 차를 마시면서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들에 대한 지적을 해 주셨다.


 10시가 조금 넘어 보이차 품다를 마치고 주최 측 안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다구들 중, 다관중심으로 진열된 전시품과 호자급, 인급 보이차들의 내표와 내비가 한권 가득 담겨진 스크랩북과 함께 10여 편의 보이차를 감상하는 동안  와인 테이블이 셋팅 되었고  매다옹 선생님의 건배로 잔을 부딪히며 치즈와 함께 홍인처럼 붉은 와인을 가볍게들 나누었다. 어느 듯 11시가 훌쩍 넘어서자 멀리서 오신 분들은 한분 두 분 다음번 찻  자리를 기약하시며 일어 나셨고 아쉬움의 끝을 끝까지 붙잡은 최후의 일곱 분이 산정무한에서 제다한 청유차 산·정·무·한 으로 깊은 가을밤 속 풋풋한 봄의 향기를 맡음으로 즐겁고 건강한 차 문화를 만들어 가는 그 첫 걸음인 찻집, ‘자연주의’의 <홍인과 와인의 향기>를 마시며... 라는 주제를 가진 가을밤  찻 자리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그렇게 끝을 맺었다.




홍인紅印 이란?  ----------<다른 방식으로 구분하여 정리 박스 처리해도 됩니다>


푸얼차(보이차)가 오늘날까지 신드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홍인과 같은 인자급 보이차의 공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인자(印字)’란 보이차 겉 포장지에 글자를 인쇄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소위 호자급의 골동보이차 에는 포장지 자체가 없었습니다. ‘호자(号字)’란 개인 차 상점의 상호를 뜻하는 것으로 차 상점들은 자신들의 상호와 제품에 관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새겨 찻잎과 함께 압제하였으며, 이러한 종이를 가리켜 ‘내비(內飛)’라고 합니다. 내비와 함께 7편 1통의 대나무 껍질 포장에 넣는 ‘내표(內표)’는 모두 차 상점의 선전물로 사용됐으며 때로는 차의 진위를 살피는 징표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만약 당시 보이차에 이러한 내비와 내표 마저 없었다면 보이차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이차가 겉 포장지에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52년부터로, 중국이 공산화된 후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 재산의 공유를 실현하여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이상이자 신념에서 시작된 것으로 차를 관장하는 각 지방의 국영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중국차를 대표할 수 있는 심벌마크를 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1950년 보이차를 관장하는 회사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 개명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 조승후(趙承煦)라는 사람이 설계한 도안인 ‘팔중차(八中茶)’가 중국내의 모든 차상품의 공식로고로 등재됩니다.


상표 등록된 이 도안은 8개의 붉은 ‘중(中)’자로 둥근 원을 만들고 그 중앙에 녹색 ‘차(茶)’자를 새긴 마크로 되어있는데 여기서의 ‘중’자는 중국을 말하고, ‘팔(八)’이란 발(發)의 음을 빌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색상에 있어 ‘중’자를 붉은 색으로 택한 것은 공산당의 상징적 빛깔과 길상(吉祥)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차’자를 녹색으로 쓴 것은 찻잎의 원색에서 비롯된 발상입니다.


(그런데 홍인은 ’차‘자를 비롯한 포장지 전체가 붉은색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의 낙후한 인쇄술과 작업자의 나태한 자세에서 비롯된 합작 탓으로 그렇게 몇 년간 ’차‘자도 홍색으로 인쇄된 포장지의 차가 후일 홍인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이후 등록 도안대로 ’차‘자가 정상적으로 녹색인쇄 되어 포장된 차는 녹인 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차제품의 특성상 그 생산 년대가 다르기에 당연히 홍인과 녹인의 맛은 다릅니다)


‘팔중차’ 로고가 탄생된 후 보이차는 모두 개별 포장되어 출하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개인 차 상점의 무포장지 보이차 제품(호자급)의 근거지가 이무(易武)였다면 공산화 이후 국영업체의 포장지 있는 보이차 제품(인자급)의 중심지는 맹해 라는 점입니다. 중국의 공산화는 보이차에 있어 포장지의 유무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기점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인자급 보이차의 하나인  홍인은 근대 신기술(쾌속발효공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완전한 의미의 전통적 보이차입니다. 즉 악퇴(고온다습한 곳에 쌓아두어 발효를 촉진하기)라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것이 홍인이며, 철저하게 건창(乾倉)으로 보관된 것이 홍인인 것입니다. 홍인은 그래서 보이차의 전통적 맛을 상징하는 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 맛은 매우 시원하며! 달고 부드럽습니다. 또한 악퇴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50년이 넘게 흘렀어도 우리고 난 차의 찌꺼기가 왠 만큼 맑은 풀빛을 띱니다. 따라서 오늘날 홍인은  많은 이들이 현대 보이차의 기준으로 삼기도하는 매우 귀한 차 가운데 하나로 그 년대가 이미 50년을 훌쩍 넘어서 이제는 골동급의 차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참고자료: 고천(孤荈) 짱유화(姜育發)  <보이차속  인자  보이차> **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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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행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더욱 깊어진다. 내년에도 전국에서 한국차를 배우기위한 노력보다는 중국차를 배우거나 중국차와 관련된 자격증을 발급하는 사업이 사업성과 명분을 가지고 각단체가 경쟁적으로 주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는 일본 다도를 배우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전국적으로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 글은 지난 2005년 10월 월간다도에 기고 한 원고이지만, 12월31일 한 해를 보내면서 2006년에는 우리의 행다법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한국 行茶의 주체성’다시 한 번 올려본다.

금년에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국내외에서 여러 사건이 일어나고 마무리되고, 어떤 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진행이 되고 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시기에는 문화가 기를 펴지 못한다. 현대의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고 급히 지나가기에 전통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높이 숭앙된다.

전통중에서도 예의를 다한 것은 그 나라 그 민족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밀레니엄도 5년을 넘기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행다는 과연 어디에 서 있을까?
이 글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솔직히 말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행다(行茶)와 다법(茶法)의 용어 선택에 대해서는 행다로 정하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행다 : 차를 내기 위해 정해진 동작에 의해서 행동을 모범적인 법칙에 맞게 한다.
다법 : 차를 내는 행위뿐 아니라 차 맛이나 차의 정신까지를 포함하며, 차 따는 법, 차 우리는 법, 차 마시는 법 모두를 포함한다.

주지하는 바,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우리의 행다는 참으로 묘한 형상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순 조선식도 아니고, 순 일본식도 아니었다. 수많은 차 선생의 입장은 든든한 반석이 아닌 눈총을 받는 입장인 경우가 더 많았었다. 양반 가문에서 차(茶)를 통한 전통은 미미했고, 일본식 차 마시는 법이 올바른 법도인 양 행세를 해 왔다.
 
차 마시는 일과 그 주변적 행위가 문화적인 형태이기에 평범한 가정에서는 흉내도 내지 못했고, 속칭 상류에서의 유형이 근년에 이르러서야 여러 계층이 공유할 수 있도록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는 사람만 알던 보이차의 이론이 흔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차인 확대의 결과라 하겠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는 역사적 배경 속에 사람들이 살아오던 정신적, 물질적, 생활적인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일본은 실생활에서의 음료로 굳혀진 중국에 비해 역사적, 지배 이념의 특수성, 계층의 분화 등 철학적, 이념적 특성을 가지고 있되, 그 근본적 외양과 형태로 중국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차 마시는 일에 굳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끌어 들이지 않더라도 한 . 중 . 일 세 나라가 가까우면서도 참으로 특성이 고유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어떤 이념과 방식을 가지고 차 마시는 행위를 완성시켰을까? 진실로 골똘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다법을 배우고, 중국에 가서 이국적인 것에 자격증도 가지고 오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나라 이 땅의 사람들이 가지고 또 공감하는 우리네 전통 행다법은 어디에서 배워오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가? 일부 우리식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발표한 것은 외면당하거나, 정통이 아니라는 식의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다법이 일본식(日本式)이라는 현실은 그러한 바탕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주변은 확대되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진실된 전통성이 있는 행다법을 보여줄 의무가 차인들에게 있다. 우리는 유가식(儒家式) 행다가 있었고, 전통 가내(家內) 행다법이 남성, 여성을 구분하여 존재 했었다. 관혼상제에 존재했으며, 그 의식의 수준과 차의 선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연습은 많이 되었다. 이젠 우리의 행다법이 나타날 차례가 아니겠는가? 외국의 형식이 모방되어 펼쳐진다 해도 그 내면에 우리의 정신이 표출될 수 있을까?

혹자는 일본식 다도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시간적인 이유를 들어 한국식 행다법을 형성케 했다고 한다. 일부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30년간 차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초창기 차인들이 일본의 전차도 및 말차 행다를 모방하면서 행다 발표를 해 왔다.

양반 문화가 소멸되다시피 한 근대화 이후 식민 산업, 그 후의 전환, 다시 산업화된 사회의 조류는 그 이전의 전통성을 까마득히 망각하게 만들었던 것의 주된 이유라 하겠다. 현재 우리의 행다법은 일본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100% 우리식도 아니다. 일본식 행다법에서 생략되고, 사찰에서의 선다법이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에서 표현되고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서의 전차도는 각 유파마다 국지적인 특성이 나름대로의 철저한 동작이 이미 굳혀졌고, 그 본질인 차의 맛과 사용되는 기물의 수준을 논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은 차의 맛으로까지는 접근치 아니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면에 치중하고 있다. 혹여 비판받을 현실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발전은 긍정적인 것이다. 의례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외양상의 절차와 격식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런 형식적인 면이 굳어져야만 그 후에 차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형식을 멀리한 경우에는 높은 평가의 기준이 차 맛에 있겠지만, 행다법에 있어서의 1차적 급선무는 형식의 정립임에 두말할 나위 없다. 중국에서의 선차와 불차,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일련의 중국식 다예표현의 일면을 살펴보자. 생활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튀어나온 문화상품의 성격도 성격이려니와 화려한 동작은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성에 의거했지만 실제로는 근래에 만들어진 행다에 그치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에 따라 행위 하는 것이 수준이다. 우리의 수준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또 외면하면 안 된다. 우리의 수준을 똑바로, 눈 부릅뜨고 봐야 한다.
그리고 다음 계단이 무엇인지 착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런 후에 우리의 격식과 예절을 지니고 의례가 넘쳐나고,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기품 있고 잘 갖추어진 한국의 행다법을 만들고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내면에 철저히 다듬어진 우리의 철학과 의식이 살아 숨 쉬고 찻잔에서도 한국차의 향과 맛이 그득히 넘쳐흐르는 한국의 행다법이 자연스레 정립이 될 것이다.

무조건 모방하고 제 것인 양 만들어 보이는 일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과 역사적 유구함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중국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이다. 한국의 행다법이 무엇이 될까,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행(行)하고 생각(思)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렵게 베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과 몸으로 체득하여 이루어지는 생활이며, 더 나아가 전통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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