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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도 노채에서 햇차 마실 때

 

멍하이 일기 30 - -

맛은 머리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입이 기억합니다. 무슨 맛 무슨 맛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결국 맛의 정확한 표현은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입은 한번 맛보면 그냥 알아버립니다. 표현할 수는 없어도 훗날 다시 그 맛을 보면 예전의 그 맛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려버립니다. 물론 입이 기억하는 맛도 결국 뇌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맛의 실체를 논리로 풀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차는 이런 맛! 저차는 저런 맛!

차에 있어서 맛이란 무엇일까?차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부닥치는 문제이지만

아직도 명확하게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차업을 시작한지 이십여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차를 소개하고 맛에 대해 이야기해 왔지만 돌아서면 어쩐지 모르게 공허한 날들이 있습니다.맛은 기본적으로  매운맛ᆞ, 짠맛, 단맛, 쓴맛, 떫은맛  다섯가지로 분류합니다. 약한 그리고 강한이라는 보조 의미를 넣으면 열다섯가지 정도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것으로 과연 차가 가진 오묘한 맛을 다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차에 있어서는 매운맛과 신맛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공이 잘못되었거나 보관상의 문제로 간혹 돌출하기도 합니다.)쓴맛, 단맛, 떫은맛 세가지가 결국 차맛을 결정하는 중요 조건입니다. , 과일, 꽃 등의 각종 비유를 곁들여서 설명하곤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맛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그 차의 맛을 한정짓고 현학적이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차라리 맛있다. 맛없다.

두 가지로만 표현 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한 같은 차라도 시간과 장소, 사용하는 다기와 물, 개개인의 성향, 당일의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느껴질 수 있고 좋고 나쁨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좋은 차이고 좋은 맛일까?차의 출발은 선사시대의 신농씨로부터라고 합니다. 약초를 시음하다가 생긴 독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 또 다른 약이 차의 시원입니다.

 

애초에 약으로부터 출발한 차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분화되었고, 약으로는 인체의 각 부분을 다스리는 쪽으로 발달하여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었습니다. 반면 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확한 규정이 없이 그저 교양 있게? 마시는 음료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차를 간식처럼 때론 약처럼 음용하고 그 효능 또한 입증되고 있습니다. 차는 수행이라느니! 정신을 다스린다느니! 기운이 어떠니! 하는 개인의 주관에 기인한

 

잡히지 않는 공허한 논리를 나는 펼치고 싶지 않습니다.그러나 중국에서 비롯하여 한국 일본으로 전세계로 확산된 차맛의 핵심을 간단히 정의하라고 하면 나는 조금도 주저 없이 문화라고 하겠습니다. 흔히 문화는 배부른 다음의 여기로 여겨지곤 합니다. 다소 어휘의 사용감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냉정한 현실임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굶어 죽을 판에 무슨 문학이 있고 음악 미술이 있으며 차를 마시겠습니까!특히 맛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배고프면 쓴맛 단맛 가리지 않는 것이 당연지사이지요. 일단 이렇게 인정하고 차를 정의하자면 차는 배부른 다음에 쓴맛, 단맛 가리면서 마시는 음료가 됩니다. 그 속에서 개개인의 기호가 생겨나고 대중의 기호를 잘 맞춘 차가 인기 있는 차가되어 그 차의 문화와 함께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중의 기호는 어떻게 수렴될 수 있을까요? 어떤 한 사람이 차를 마시고 맛있다고 하게 되면 맛있게 전파되고! 맛없다고 하게 되면 맛없게 전파된다. 두 사람이 마시고 한사람은 맛있다고 하고 한사람은 맛없다고 하면 영향력이 큰사람의 뜻대로 맛은 전파된다. 세 사람 이상이 마시게 되면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맛이 전파된다. 그렇게 전파된 맛이 하나의 영향력 있는 문화가 되고 이러한 문화를 견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경주되어 오늘날의 차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정답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형성되었고 우리는 그 문화를 좇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문화의 속성입니다.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지금 당장 누구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물론 가능합니다. 다만 그 영향력을 얼마나 확대 재생산해낼 수 있느냐가 문화로서의 가치와 지속성을 결정짓는 요건입니다. 오운산의 시작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기회가 주어졌고 저희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오운산의 문화를 형성하고자합니다. 이것은 차업에 몸담은 제 인생 마지막 꿈입니다. 그렇다면 오운산이 만들고자 하는 문화는 무엇이고 어떤 차맛으로 대중에게 접근할 것인가? 오운산의 경영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당년호차(當年好茶) 경년신차(經年新茶)입니다

 

- 그해에 만들어 그해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차, 세월이 흐르면 새로운 맛으로 다시 태어나는  - 현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보이차의 맛은 햇차 보다는 묵혀야만 진짜 좋은 맛이 된다는 인식입니다. 즉 그해에 만든 차는 맛있게 먹을 수 없기에 묵혀 두었다가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견 지금에 와서는 당연해보이기까지 한 논리지만 오운산은 당년호차 즉 보이차는 원래 그해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차라는 이념으로 현제 시장의 견고한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합니다.보이차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백 수천년 동안 보이차는 원래 그해에 만들어서 그해에 먹었던 차였음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몇 년이 지나면 버리는 차였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량 생산 체제가 도입되었습니다. 더불어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이 발발하고 가진 자들의 고상한 취미쯤으로만 여겨졌던 차 문화는 지하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이 오히려 노차의 가치를 발견하고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차 산업은 다른 모든 산업과 더불어 대중화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따라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고수 차밭은 생산성을 이유로 파괴되고 경제 작물로 전환되었습니다. 80년대로 들어서면서 차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면서부터는 찻잎의 발아 개체수가 높은 품종이 개발되고, 공산당의 주도로 생산성이 높은 소수차 위주의 차밭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찻잎은 차성이 강하여 특히 맹고 대엽종 등 보이차 원료들은 그해에 맛있게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보이숙차가 개발되고 대중적 소비자의 기호와 눈높이에 맞춘 차들이 대량으로 개발 출시되어 시장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이차들은 원료가 가진 질적인 한계 때문에 묵혀야만 좋은 차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 된 것입니다.

 

모든 차는 출시될 때의 맛이 기준이 됩니다.홍차는 홍차 맛이 있고, 녹차는 녹차의 원래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이 변하면 변질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이차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시될 때의 맛이 전부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 가는 맛을 오히려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년신차(經年新茶) 세월이 흐르면 매년 새로운 맛으로 다시 태어나는 보이차의 특징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고수 순료를 사용하여 원래 보이차가 가진 참 가치를 살린 당년호차(當年好茶) 즉 그해에 당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차를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만든 차라야만 세월이 흘러서 결국 역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장은 어쩌면 변해가는 맛에 종속되어 원래 보이차가 가진 가치에 조금은 충실하지 못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옳고 그름은 없지만 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오운산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소중한 자원인 고수 차밭을 무작정 개발할 것이 아니라 저희의 경영이념에 따라 보호하고 이념에 맞게 되살리고자합니다. 매년 계획을 수립하고 적절한 시기에 한잎한잎 진정한 고수 원료를 수확하고 전통 가공 기법으로 생산하여 보이차 원래의 개념인 그해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차에 집중할 것이며, 나아가 경년신차 즉 매년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보이차의 특성을 살려 훗날 진정한 명차의 맥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운산의 대리상 조건 첫째는 인품입니다. 사업의 성공 여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유사 이래 모든 문화는 사람에 의해 창조되어진 것입니다. 대리상 계약 조건에서 설사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사람이 진실하다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고수차를 정성으로 만들고 전세계의 진실한 다우들과 나누며 함께 오운산의 문화를 열어가려합니다.

 

* 513일 잠시 귀국해서 518일부터 개최되는 대구박람회에 참가합니다. 5월 말 다시 윈난 쿤밍의 저희 차창으로 가서 제품 생산을 감독하고 68일 다시 서울로 귀국합니다. 68일부터 개최되는 서울박람회에 참가한 후 6월말 또다시 출국하여 중국 각 지역의 차박람회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다소 빠듯한 일정이지만 제가 평생 꿈꾸던 일들을 하는 것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는 분들은 박람회 장에서나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저희 가게로 오시면 잠시라도 제가 직접 만든 차 한 잔 올리겠습니다.

 

멍하이 일기는 30편으로 잠시 중단하고 31편부터는 이후 시간이 허락하는 데로 틈틈이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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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공신짜이(回貢新寨)에 초재소 공사중일때

 

멍하이 일기 25 - 초제소( 初制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 마을인 후이공신짜이(回貢新寨)에 초재소를 하나 지었습니다. 초재소란 보이차를 일차 가공하는 장소로 찻잎을 가까운 시간에 운반할 수 있는 곳, 주로 차밭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에 짓습니다. 반펀, 파사, 뿌랑산, 징마이 등에 차농과 협조 관계에 있는 초재소가 있지만 자주 이용하기엔 거리가 멀고 바쁜 철엔 자유롭게 사용하기에도 불편함이 있어 고민 끝에 준공하게 된 것입니다.

 

일층엔 위조실과 유념기계를 설치하고 바깥쪽엔 살청하는 가마솥을 두 개 걸었습니다. 이층은 창고, 삼층은 투명한 지붕을 덮어 흐린 날이나 비가 올 때도 일정부분 쇄청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을 주변의 산에 고수차는 없지만 50년 전후의 생태차밭이 제법 있고 멍하이 가게 점장 직원 집에도 차밭이 2000평가량 있어서 원료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올해부터 일정량 오운산 생태차라는 이름으로 생산하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모든 가공 과정을 꽤 부리지 않고 착한 초등학생 글자 배우듯이 해서 그런지 가격대비 아주 정직한 맛이라고 덕담들을 하십니다...물론 모든 차의 기본은 원료입니다. 원료의 가치가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이지만 가공 또한 중요합니다. 차는 일종의 종합 문화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차의 정신을 담은 적절한 가공을 통해 새로운 맛의 문화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채엽하는 과정도 그렇지만 위조나 살청 유념 건조까지 그냥 곁에서 보고 배우는 것과 실제로 해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초재소를 직접 지어면서 또한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살청 가마솥을 설치하면서 높이와 각도를 맞춘다거나 연통의 위치와 길이 등을 조절하는 것도 직접해보지 않으면 감을 잡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직원 친척 중에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 믿고 공사를 맡겼는데 이분이 도대체 완전 오리지날 중국판 만만디라서 2월에 시작하여 보름이면 된다던 공사를 3월 말에야 대충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한 날자는 실제로 보름정도인데 운전면허 시험 치러 간다고 아니 오고!

친구 생일이라고 쉬고!

모심는다고 아니 오고!

 

햇차는 솟아져 들어오는데 일은 주구장창이고 제 속이 다 새까맣게 탔습니다. 직원 친척이라서 심하게 뭐라 하기도 그렇고 좋은 말로 몇 마디 하면 하여튼 보름만 일하면 된답니다. 한국씩으로 날짜 계산을 한 내가 잘못한 것도 깨닫게 되었답니다...

 

철골 구조로 비교적 간단하게 지었는데 바닥 면적이 100평방미터 정도니까 3층까지 300평방미터 한국 평수로는 100평정도 됩니다. 건축비용은 만만디 인건비까지 다 포함해서 삼천만원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아주 저렴하게 지었습니다. 현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멍하이의 직원 평균 월급은 보통 2000위안 한국돈 35만원 정도로 아직은 낮은 편입니다.

 

한국과 현지의 쌀값이나 고기 값을 비교하면 다섯 배정도 차이가 납니다. 생활비 지출을 생각하면 주거 환경은 한국이나 별 차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희 직원들에겐 이보다 두 배를 주고 있습니다. 금전으로 직원의 마음까지 살 수야 없겠지만 외국인 회사니까 보람을 가지고 하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한.중 관계가 좋지 않다보니까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은데도 솔선해서 너무도 열심히 하는 직원들의 고마운 노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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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해에 있는 석가명차

 

멍하이 일기 18 - 윈난 차여행 마무리 -

 

약 이주일 동안 린창으로 오신팀과 멍하이로 오신팀을 모시고 유명 차산지를 돌았습니다. 이번에 다닌 곳 이외에도 한국엔 아직 덜 알려졌지만 좋은 고수차가 나오는 지역은 많습니다.

 

멍하이 차취의 대표적인 곳은 멍송(勐宋)의 나카(那佧), 따멍롱(大勐龍)의 멍송(勐宋), 포랑산(布郞山)의 빠카롱(패카롱壩佧龍).파량(帕亮), 빠달(巴達)의 장랑(章朗).만마이(曼邁) 등이 있고 린창차취의 샤오후샤이(小戶, 동궈(동과懂過), 빠누어(패나壩糯), 샤오멍어(小勐峨), 바이엥샨(白鶯山), 따챠오샨(大朝山), 용더(永德) 이무차취의 만송(曼松), 부허탕(薄荷塘), 통칭허(同慶河), 완공짜이(만궁채彎弓寨), 이산무어(일선마一扇磨) 푸얼 차취의 쿤루샨(困鹿山), 미디(迷帝), 우량샨(無量山), 치엔지아짜이(千家寨), 샤오징구(小景谷) 등이 있습니다.

 

최근엔 변경 지대인 미얀마, 라오스, 태국 등의 차산들도 활발히 개발되고 있습니다. 현제 저희 가게에 전시되어 있는 고수차는 236가지입니다. 아직도 제가 모르는 산지도 있을 것이므로 현제 고수차가 생산되는 지역은 어림잡아 수백 군데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맛과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곳들도 탐방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론 몇 시간씩 산행을 해야 되고 심심산골의 차농집에서 숙박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막연히 별빛 찬란한 산골의 낭만적인 하룻밤을 생각하신다면 착각일 수 있습니다. 현장은 언제나 현실입니다. 때론 천 길 낭떠러지를 아슬아슬 건너야 되고 절벽도 기어 올라야합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산골에도 전기가 들어와 있지만 걸핏하면 정전이 될 수 있고, 차농의 집안으로 들어서면 대낮인데도 깜깜해서 잠시 눈동자의 초점 고르기를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일미터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별빛은 찬란하지만 소변이라도 볼라치면 북두칠성을 보고 방향잡기도 그렇고..아무튼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산골은 밤이 되면 조금 살살한데 아마도 일이년은 빨지 않은 것 같은 콤콤한 이불을 덮어쓰고 벼룩에 물려가면서 잠을 청하자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대부분 밤을 꼬박 새우기 일색인데 산골의 밤은 길고도 또 깁니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할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

 

그래도 경험해 보시고 싶은 분이 있다면 기꺼이 초대하겠습니다...무슨 일이든 친구가 있으면 훨씬 수월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여행오신 일행은 다행이? 한번도 비행기의 연착이 없었는데, 윈난은 비행기의 연착이나 결항이 비교적 자주 있음으로 만약을 대비한 일정을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숙박지는 반드시 사전에 예약해야합니다.

 

특히 멍하이의 삼사월은 3개월전에 모든 호텔이 예약 완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차량이나 식당도 최대한 미리 챙기고 점검하는 것도 있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일정 중에서도 쿤밍 공항에서 1시간 30분가량 버스가 오지 않아서 속을 태운 적이 있습니다. 멀리서 어렵게 시간을 내어 오신 손님들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음 일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다소 어수선한 중국이고 저희 또한 전문적인 여행사가 아닌지라 이해를 구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일 땐 좀 더 철저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좋은 님들과 함께 바삐 움직이다가 모두 귀국하시고 쿤밍 공항에 홀로 남아 있으면 약간은 쓸쓸합니다. 머나먼 고국에서 저를 믿고 찾아 주신 귀한님들 좀더 잘 모시고 잘 챙겨드릴걸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저는 또다시 멍하이로 향합니다. 일년중 가장 중요하고도 바뿐 철이라 잠시라도 쉴 틈이 없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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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도노채

 

멍하이 일기 10

 

석가명차가 어떻게 윈난에서 오운산이란 상표로 유한공사를 오픈 하게 되었는지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처음 윈난 땅을 밟은 것은 2002년경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강육발교수 대구의 오상윤교수님 등과 쿤밍에서 보이차 관련 세미나에 우연히 참석하면서 부터입니다.

 

막 보이차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던 시기에 구미의 다랑무역 사장이 동행을 권유해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시장을 둘러보면서 이차 저차 닥치는 대로 시음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후에 고객들의 요구가 있어 조금씩 보이차를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징의 마렌다오, 광조우의 팡춘시장 등을 기회 닿는 데로 오가면서 따이공이라고 부르는 보따리상을 통해 제품을 들여오곤 했습니다.

 

고객들의 믿음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물량이 늘어나고 2009년 노반장으로 유명한 진승차창의 한국 총대리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보이차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미호’ ‘해만차창’ ‘하관차창등의 한국 총대리를 겸업하면서 자주 중국 윈난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봄 진미호 대리상 회의에 참석차 멍하이에 왔다가 진미호에서 잡아 준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강상무주점이란 호텔인데 당시 봄차철이라 멍하이에서 가장 큰 호텔인 국위호텔에 방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묵게 된 호텔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당시엔 몰랐습니다...호텔 1층 상가에 제법 규모가 큰 모차 판매점이 있어서 시간 있을 때마다 내려가 각 지역의 모차들을 시음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곳에서 우연히 란창고차라는 중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고수차 브랜드의 심천 대리상을 운영하는 젊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허지라는 친구인데 저희가 한국의 명은아트 은제품을 중국에 소개하면서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아직 어린 친구인데 차업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라 보여서 몇 가지 은제품을 특별 가격에 공급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마웠는지 이후 종종 연락이 와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저의 사정도 비교적 상세히 알게 되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나이를 떠나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몇 년 만에 윈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모차상을 운영하는 위잉빙이라는 태족 여인의 오랜 고객이었습니다. 가게에서 오랜만에 만난 정담을 나누고 다음 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다시 멍하이를 찾게 되었는데 봄에 묵었던 호텔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여전히 1층 모차 가게에 들러 이런 저런 차들을 시음 했는데 전에 왔을 때보다 대접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귀한 모차들만 골라서 우려주고 식사 대접까지 해줍니다. 아침까지 챙겨 놓고 올 때까지 안 먹고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며칠간 극진히 대접해주고 친지 결혼식에 초대까지 합니다. 결혼식에 참석하여 그동안 대접 받은 것이 미안하고 고맙기도 해서 홍빠오’(좋은 날에 조금씩 돈을 넣어 전달하는 빨간 종이봉투)1000위안을 넣어서 전달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녁 늦게 가게에서 다시 보았으면 하는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내려갔더니 봄에 가게에서 만났던 심천의 젊은 친구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뜸 가게를 그냥 주고 모든 원료를 제공할 테니 같이 브랜드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정식으로 제의를 합니다. 처음엔 저의 중국어 실력이 아직 시원치 않아서 뭘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귀를 의심했습니다. 당시 곁에서 내 일을 도와주던 상하이의 형님에게 다시 묻고 나서야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호텔의 건물주이자 모차 가게의 주인이기도 한 위잉빙은 이천년 초부터 모차 장사를 시작하여 멍하이 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성공한 모차상입니다. 징마이 근처에 경익이란 차창이 있고 멍혼에는 대형 창고 그리고 징마이, 파사, 반펀, 포랑산에 초재소(찻잎을 따서 가공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민족 대부분이 그렇듯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아서 글을 잘 모릅니다.

 

돈은 어느 정도 벌었고 남들처럼 자기도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던 중에 몇 년 전 대만 상인을 만나 모차를 제공하고 합작 제의를 했었답니다. 그런데 이 대만 상인이 모차만 가져가고 소식이 없답니다. 그래서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용케 제가 당첨된 것입니다...제가 어딜가나 인복이 있는 편이지만 이번일은 순전히 심천의 젊은 친구가 만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차업을 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수 있는 자기 브랜드를 큰 비용 들이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경영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여 저의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초재소와 가게, 공장 등은 이미 준비 되어 있는 시설을 이용하기로 하고 모차도 제공 받기로 했습니다. 다만 박람회 참가비용 및 홍보비용, 홈페이지 구축 등 기타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허가의 편리를 위해 회사의 명의는 위잉빙의 이름으로 하고 브랜드의 지분은 반반씩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운영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제가 가지기로 했습니다.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합의하고 운남의 차산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오운산고차라는 회사를 창업하였습니다. 201510개 지역의 고수 순료로만 만든 첫 제품을 출시하고 의욕적으로 중국 대도시 대부분의 박람회에 참가하며 홍보 활동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동안 위잉빙으로부터 모차를 수매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던 업체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남는 모차를 조금씩 제품으로 만들어 출시하는 것은 괜찮지만 정식으로 브랜드 홍보를 하며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은 자기들 하고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위잉빙의 모차를 수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일년 모차 판매량만 한화로 백억이 훨씬 넘는 위잉빙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차 판매를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제품 생산에만 전념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고 그동안 다져온 세월과 고객들을 자칫 전부 잃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저 또한 방관할 수만은 없는 문제라서 고민 끝에 위잉빙은 그냥 모차 판매상으로 남고 제 명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합작 제의를 위잉빙이 했고 발생한 문제도 위잉빙의 문제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위잉빙은 미안한 마음에 모든 조건을 저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해 주었습니다.

 

한국 석가명차 최정민 실장과 함께

 

각 지역의 초제소를 내가 필요할 땐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현제의 가게도 거의 무료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저로서도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지라 합리적은 방법으로 모든 것은 정리하였습니다. 회사 이름은 한국과 같이 석가명차차업유한공사로 바꾸고 로고는 오운산으로 이미 많은 홍보를 해 왔으므로 제 명의로 이전한 다음 계속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위잉빙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이 모든 과정을 정리하는데 약 2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담당 공무원들마다 윈난성 시솽반나 멍하이 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최초로 설립되는 차업 관련 유한공사라서 모든 것이 생소한 업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 여권 공정 및 중국대사관 인증서, 은행잔고 증명서 등의 서류와 중국에서 이력서 등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60여 가지의 서류를 준비해서 영업집조’(사업자등록증)을 내려 받기까지 정말이지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드문제까지 겹쳐서 될 일도 미루는 지라 속이 새까맣게 탔습니다. 멍하이 공상은행에서 한국인 명의의 회사 통장도 처음 만드는 일이라 하고 국세, 지방세 등의 처리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모든 것이 운명처럼 정리 되었고 앞으로는 오로지 저의 노력만으로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됩니다. 한편으로 힘은 들지만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정신을 담은 차를 만들기에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동안의 과정을 쭉 서술하다보니 마치 한편의 단편소설을 쓰는 것 같습니다...

늘 바쁘게 살다보니 때론 장자의 호접몽처럼 현실 속의 내가 마치 꿈속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멍하이의 나른한 저녁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의 일기를 마칩니다.

 

*내일부터 한국 손님들 일곱 분을 모시고 빙도와 봉경 향죽청 차왕수 친견 등의 일정을 함께합니다. 멍하이 에서 빙도까지 자동차로 여덟시간 거리입니다. 향죽청까지 다시 세시간 손님들 잘 모시고 일주일 쯤 후에 다시 멍하이 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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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이 일기 6

며칠 광조우를 다녀왔습니다. 광조우 팡춘 차엽성에 있는 저희 가게도 둘러보고 쿤밍에서 알게 된 지인이 근처인 동관에서 오운산 대리상을 오픈하는 관계로 두루두루 다녀왔습니다. 현제 팡춘 시장의 가게 수는 약 만개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불황이라고들 하지만 팡춘의 가게 수는 신기하게도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부분 보이차를 판매하는 가게들이고 더러 철관음이나 차용품, 홍차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도 있습니다. 팡춘도 이천년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 철관음이나 대홍포, 녹차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었습니다. 이천년 중반부터 보이차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보이차의 비중이 점점 높아져서 이제는 명실공이 세계 보이차의 수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원료 산지와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멍하이를 중심으로 한 보이차 햇차 시장과 음용 인구의 밀도가 높고 교통이 편리한 방촌을 중심으로 한 노차 시장으로 양분될 것 같습니다.

 

그 시장의 한복판에 차엽성이 있는데 방촌시장의 렌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 3월에 이곳 3층에 저희 가게를 오픈했습니다. 일층은 권리금만 일억씩 달라고 하고 월세 또한 너무 비싸서 형편에 맞춘 것입니다.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많은 업체들이 차엽성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시장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제 석가명차의 중국 상표인 오운산은 멍하이에 본부가 있고 광조우, 상하이, 쿤밍에 빤스추”(총판겸 직영점)이 설립되었습니다. 빼이징은 지금 준비 중에 있고 기타 여러 지역에 주안마이띠엔”(다른 제품과 같이 저희 제품도 전시 판매 하는 곳)이 개설 되었습니다. 중국의 4대 거점 도시에 직영점을 설립하고 기타 지역을 관리하는 방식입니다. 2015년 첫 제품을 출시하고 중국 전역의 대도시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대리상 모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중국 시장이 열리지는 않았습니다. 몇 군데 대리상을 오픈하였지만 판매 실적이 저조하여 결국 저희가 자진 철수 하였습니다. 저희가 정한 대리상의 첫째 조건이 인품인데 좋은 사람들에게 괜한 부담만 주는 것 같아서 모든 제품을 환수하고 이후는 원하는 제품만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근년에 차시장이 불황인데다가 아직은 오운산의 홍보 부족으로 쉽게 소비자에게 다가가지 못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멍하이에서는 각 차산의 길목마다 작은 간판을 세워 오운산 이미지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멍하이에 내려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저희 간판을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러 곳에 이미지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수백 수천억의 거대 자본으로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기존 세력과 새롭게 진입하는 수만은 신생 업체들 속에서 보이차의 변방인 한국의 석가명차는 그저 신기하게 비춰질 뿐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만들어도 마셔보지 않으면 그 차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품질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저희로서는 오운산 차를 마셔볼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늘려 나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생산지인 멍하이에서 진정으로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차농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고 차근차근 전 세계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다행히 한국에서 오랜 지인들과 고객들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신 덕분으로 올해로 3년째 오운산 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차시장의 불황 사드문제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만만치 안치만 저는 늘 위기가 기회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더 바닥을 다져서 굳건한 내일은 준비하겠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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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같이 지내는 거위

 

멍하이 일기 5

오늘은 짐승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산길을 오르다보면 종종 작은 돼지 새끼들을 만납니다. 소수민족 집에서 기르는 것들인데 거의 방목입니다. 멍하이 대로에서도 소나 염소 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엔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소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중국 특유의 여유로움이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돼지 풀 뜯는 소리하지마라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실제로 멍하이 에서는 돼지가 풀을 뜯어 먹고 삽니다...길가의 잡초나 흙, 뿌리 등을 닥치는 대로 먹고 나대지 등에서 뒹굴고 있는 동과주라고 부르는 체형이 작은 돼지입니다. 육질이 졸깃해서 수육을 하면 좋고, 숯불에 구워 먹어도 아주 맛있습니다.

 

후이꽁신짜이(回貢新寨)”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차산을 다니다보면 흔히 신짜이(新寨), 라오짜이(老寨)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말 그대로 이해하면 노채(老寨)가 원래부터 있었던 마을이고 신채(新寨)는 나중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일 것입니다. 노반장도 마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원래는 반장이라는 마을이었는데 후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 지역 근처에 새로운 마을이 생기고 이름을 달리할 필요성이 있어서 신반장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원래부터 있었던 반장마을은 노반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한가롭고도 평화로운 이 마을에 오두막을 짓고 들어온 후에 모든 상황들이 마음에 들었는데 다만 한가지 이놈의 닭울음소리 때문에 종종 귀한 새벽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지금은 적응이 되어 (니는 울어라 나는 잔다)지만 한 때는 신경이 예민해 져서 이놈의 달구새끼들 새벽 안와도 좋으니 매가지를 팍 비틀어 가지고 패대기를 쳐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예상 못한 복병을 만났던 셈이지요! 거의 매일 아침 일곱 시에 나가서 이산 저산 헤매다가 밤 열두시가 되어서 들어오는 일정이라 새벽잠이 보약인데 촌닭들의 합창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이생각 저생각 하다보면 만사가 괴롭기도 했답니다.

 

어릴 때 외갓집에서 우연히 목격한 돼지 도살하는 장면이 꿈자리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공포가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이지요. 능숙한 도살 꾼은 숟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돼지를 기절시키고 기타 작업을 하는데 그때 그 무식한 도살 꾼은 헴머로 도대체 몇 번이나 돼지 대가리를 후려치는지 나중엔 자기도 지치고 구경꾼도 지칠 때 쯤 더 이상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더이다.

 

여기서는 아예 기절시키지도 않고 그냥 송곳 같은 걸로 목을 땁니다. 돼지는 당연히 죽는다고 꿱꿱거리고 곁에서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세숫대야 같은 걸로 피를 받아 냅니다. 잔인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렇게 기른 짐승이므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새벽네시 어스름하게 그리운 닭울음소리가 들립니다...더불어 오리, 거위, 돼지들도 함께 꼬끼오~끼오끼오, 꽉꽉, 꿱꿱, 꿀꿀... 이놈들의 합창은 밥 때가되면 더욱 요란합니다. 주인이 먹이를 주고나면 좀 잠잠하다가 다 먹고 나면 또 한바탕 패악을 부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절이나 큰일이 있고 나면 이놈들이 비교적 조용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이 제일 시끄러운 놈부터 ...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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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357g 긴압 과정

 

멍하이 일기2

 

한국에서 보이차를 직접 생산하고 싶어 하는 의욕에 찬 젊은이가 있습니다. 원료를 윈난에서 전부 한국으로 운송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한국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보이차를 생산한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제작에 필요한 각종 설비들을 주문해 와서 자세히 알아보고 있습니다.

 

먼저 보이차를 찍는 압병 기계인데 한번에 한개, 두개, 세개 씩 찍을 수 있는 기계로 나뉩니다. 가격은 한국 돈으로 이백, 삼백, 사백만원 정도 합니다. 숙련공이 작업하면 한개짜리로도 하루에 천편이상 압병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부 석모로 제작했습니다.

 

맷돌같이 생긴 석모

 

맷돌처럼 생긴 돌인데 위에 손잡이가 있고 아래쪽 중앙이 약간 움푹합니다. 그곳에 수분을 적당히 공급하여 포대기로 감싼 보이 모차를 넣고 눌러서 압병하는 것입니다. 석모의 무게는 일반적으로 30kg 전후이며 너비는 33센티 높이는 15센티 정도 됩니다. 가격은 석모 한개에 대략 4만원정도 합니다만 윈난에서 보내자면 운송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압력이 모자라면 사람이 올라타서 꼰들꼰들 좌우로 밟아줍니다. 흡사 춤을 추는 듯한데, 차산 여행길에 한국 아주머님들에게 올라가서 시연해보시라고 하면 아주 좋아 하십니다. (모두 올라가 내려오질 않아서 다음일정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리고 각종 병차의 크기에 맞는 스텐통이 필요합니다. 아래에 구멍이 송송 뚫려서 증기가 통과 될 수 있도록 제작한 것인데 가격은 357g 병차용이 5만원정도입니다. 선별한 모차는 스텐통에 담아서 증기를 올린 다음 압병용 마대에 담습니다. 그리고 모차를 담아두는 포대입니다.

 

일반적으로 25kg용 마대를 많이 사용합니다. 압병 할 때 병차의 크기에 따라 357g,200g,100g,50g 등으로 나누어 담는 마대가 있습니다. 가격은 25kg 마대 8000, 병차용 마대는 1000원정도 합니다. 그리고 모차에 증기를 공급하는 기계입니다. 바짝 마른 모차는 수분 함수율이 12%전후 됩니다. 압병하기 전에 충분한 습기를 공급해야만 모차가 손상되지 않습니다.

 

생차의 경우 357g기준 20g정도의 수분을 공급하고 숙차의 경우에는 먼저 숙차 원료에 15% 정도의 수분을 뿌린 후 잘 섞고 압병 당시에 10g 정도의 증기를 다시 공급합니다. 그러면 생차는 압병 당시에 377g, 숙차는 420g 정도가 됩니다. 압병이 끝난 후에는 간이 건조대에서 건조한 후 홍방이라는 고온 건조실로 옮겨집니다. (온도는 대략 50도 전후)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 애초의 357그램에 도달하면 포장실로 옮겨 포장하면 완성입니다.

 

증기 공급 기계의 가격은 60만원 정도입니다. 그 외에 건조대, 선별대, 저울 등은 꼭 필요합니다. 기타 모자, 장갑, 마스크 등의 자잘한 소품들도 필요한데 만약 한국에서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이 있다면 꼭 필요한 기계제품 이외의 부피가 크거나 한국에서 간단하게 제작 가능한 것들은 국내에서 준비하는 것이 운송비 부담과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조만간 보이차가 출시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멍하이 현지의 생엽을 바로 가공하여 차창에서 생산하는 것 보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커피나 홍차의 경우를 보면 원료 생산지보다 음용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서 더욱 발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욕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젊은 친구에게 경의를 표하며 저는 멍하이 일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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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오두막집

 

멍하이 일기1

 

멍하이의 겨울 아침은 자욱한 안개 속에 밝아옵니다. 침대를 박차고 커튼을 젖히니 희뿌연 장막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멍하이가 고향인 직원 집이 가게에서 자동차로 십분 거리에 있습니다.

 

2년 전 처음 방문했을 때 평화롭고 조용한 전원의 풍경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후 직원 친지의 도움으로 따이족이 살던 목조건물을 허문 재료들을 헐값에 구해 와서 얼기설기 역어서 마음대로 지은 조그마한 나만의 오두막집ᆢ! 곁에는 아담한 연못이 있고 그 너머 직원 집이 있습니다. 네 살배기 아들 하나를 키우며 오순도순 꿈을 키워가는 두사람은 멍하이에서는 보기 드문 대학출신 엘리트 부부입니다?


남편은 부지런한 초등학교 선생님 스타일이고 부인은 그야말로 천사표입니다.
지난밤에도 거실에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시솽반나 심심산골의 과실들을 멍하이 특산 백주에 담가서 갖가지 향기로 우려낸 약주를 한두잔씩 했습니다. 따이족 부엌을 개량하여 무릎 높이로 적당히 올리고 중앙엔 불지피는 자리 가장자리엔 술잔 찻잔과 접시들을 놓을 수 있도록 고목 널판지를 덧댄 소박한 거실! 그래도 열 명 정도는 언제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오두막집 너머 직원집

 

아들 교육 문제로 늘 토닥토닥합니다. 아빠는 일찌감치 틀을 잡아야 한다며 열쭝쉇 차렷을 호령하지만 엄마는 그저 안아줄 뿐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큰소리로 다툰적이 없었다는!ᆢ 쌍둥이로 유명한 고장 므쟝의 여인, 어려서 누군가 야단치면 울었고 나이 들어서는 그저 웃을 뿐이라는 애기엄마의 잔잔한 미소를 바라보며 중간에서 종종  달갑잖은 오십대 할아버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날  축구공 선물이 들어와서 발차기 기술을 일부 전수했는데 이 녀석이 어떤 날은 새벽부터 방문을 두드리는 통에 귀한 새벽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방문을 나서니 아직 이른 아침인데 지난밤 열기로 가득 찼던 장작들의 흔적과 내려앉은 거스름의 흔적 또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자오샹 하오 " 안개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꼬맹이를 보듬고 있는 아빠의 아침인사가 들려오고 "츠판바" 아침을 준비하는 아낙의 밝은 미소가 다가옵니다.

 

출근길 아직도 안개는 자욱합니다. 도로변의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줄에 새하얀 물방울들이 매달려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합니다. 오후가 되면 햇볕에 금방 사라지지만 햇살에 반짝이는 영롱한 물방울과 연녹색 찻잎의 조화는 그자체로 한복의 그림입니다. 조그마한 고개만 넘으면 바로 도착하는 가게인데 자동차로 안개를 헤치며 15분 만에 도착했습니다. 찻물을 올리고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운남의 골짝골짝에서 조금씩 구해온 이백여 가지의 모차들을 살피며 오늘 시음할 차들을 몇 가지 고릅니다. 겨울이지만 한가하지만은 않습니다.

 

재차 삼차 지난해의 차들을 관찰하고 맛의 특징들을 분류하고 기록합니다. 또한 병배의 적합성 등을 실험하고 올해의 계획을 수립합니다. 지난해 비교적 만족스러운 원료를 제공한 차농들과 연락하여 봄차 선 구매 계약을 하고 오운산만의 가공법을 설명하며 언제나 초심으로 좋은 원료를 제공해 줄 것을 당부하고 또 부탁합니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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