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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차(푸얼차 puer tea) 마시는 찻자리로 전국에 알려진 자연주의 마지막 찻자리는 예상된 일이었지만 수 많은 말과 풍문을 남기며 한국에서의 첫 번째 명차 순례(골동보이차 품다) 총 10회를 마지막으로 대장정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이른바 전설의 차들을 앞에 두고 펼쳐 졌던 행사였으며, 특히 운영해 나가는 가운데 주인의 배려와 큰 마음이 없었다면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가의 차를 할애하여 이루어졌던 행사였다. 이에 마지막 기록을 남겨 향후 아류의 차회와 그 운영의 범례로 삼고자 한다. (회비 10만원은 마시는 차의 원가에도 미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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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인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복원창)’ 6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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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 접수 받은 찻자리다. 7시 10분전의 탁자 상태이다. 이 때 주인은 자리에 착석하면 바로 식사를할 수 있는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다.

지난 10개월 주인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앞으로 전설로 남을 만한 이 시대의 귀한 찻자리로 기억되고 기록될 골동보이차의 원형(진품)을 감상하고 맛을 확인하고 음미 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회에서는 그동안 참석하신 분들에게 먼저 예약 우선권을 주고 선착순 17명까지 접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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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기 전에 영양식인 잣죽과 궁중떡볶이를 겸한 음식과 와인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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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오신 분이 혼마구로(참다랑어) 옆구리 살을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오후 7시 정각 17명 참석 예정자의 중 14명이 참석을 하였다. 먼저 찻자리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자연주의 특유의 맛을 가진 궁중 떡복기와 잣죽이다. 셀러드와 멸치조림 등으로 식사하는 가운데 부산에서 한 분이 참석하셨다. 손에는 혼마구로(참다랑어) 옆구리살을 가지고 오셨다. 비록 간단한 식사이지만, 채소, 육류, 어류를 최고급으로 육질의 깊이를 음미하면서 앞으로 마실 차에 대한 기대도 크게 가질 수 있었다. 한 시간 뒤 나머지 두 분이 참석하여 17명 전원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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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져온 녹차 신양모첨 1등급을 마시기 위한 예열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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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을 예열하는 동작

맛의 원형을 탐구하고, 그에 관련한 시간을 가진 것에 감사한다. 이 자리로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후 다른 곳에서 달근 매니아 들의 다른 차회가 생겨날 수 있으며 또 다른 새로운 차꾼들이 이루어 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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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모첨을 찻잔에 따른다, 옆에서 보조하는 분은 차를 우려내는 팽주와 부부이다.

주인은 시작에 앞서 '매달 개최해온 골동 보이차 품다의 찻 자리를 회향하고자 합니다. 해서 특별히 보이차의 왕으로 불려지는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를 품다하는 <回向의 찻 자리>라고'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오프닝 차로서 중국 녹차인 신양모첨을 마셨다.

녹차는 유리 숙우를 두개 사용하여 나누어 마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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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는 유리 숙우를 두개 사용하여 나누어 마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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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소타차(맛으로는 20년 정도 되었다고 할 수 있는 품성이 좋은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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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호를 감상하는 참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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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호 원편을 감상하는 손님,  경주 아사가 주인도 참석하였다.(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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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이 차를 가지고 있다면, 남의 차를 보게 되면 비교하는 습관이 생긴다.
           외형이 다를 수 있는 여러가지 복합된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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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호는 자사차호에 넣어 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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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주인공인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복원창)’을 61g 저울 달고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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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복원창)’를 은 탕관에 넣고 우렸다.
                  이런 대범함은 신차든 노차든 다양한 차들을 많이마시고 연구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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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다옹 주인 안재한 선생은 차 맛에 대한 좋은 말씀을 주셨다. 마주 보고 앉은 우나이찌(가게이름)선생에게 옛날 7편 한 통으로 준비하고 마신 경험담을 이야기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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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찻자리에 모인 손님 가운데 상인이 아니면서 골동보이차를 통으로 준비하고 마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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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찻집 주인인 수선행님(왼쪽 첫번째), 대단한 마음이 아니면 이런 통큰 일을 벌리지 못한다.

누가 이런 분 앞에서 골동 보이차 운운하겠는가?  보이차 한 편에 시가 500만원, 800만원, 1000만원 하는 차들을 손으로 툭 잘라 차호에 넣겠는가?

일시: 2007년 7월 21일(토) 오후 7시 - 11시 종결 / 22일 02시 최종 종결

장소: 대구 수성구 지산동 1054-1 <자연주의> 찻집

 (TBC 방송국 건너편)


한국에서 이러한 찻자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역사다. 다시 한 번 주인 부부(죽천향, 수선행)의 배려와 큰 마음에 감사드린다. 2007년 7월22일 02시 종결, 사진 기록  / 석우(石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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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마신차는 신양모첨, 동창호, 아포차,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황문흥동차

참석자는 부산, 서울, 안양, 울진, 대구, 김천에서 모인 17명이다.

나는 10번 중 9번을 참석하였다. 이 기록을 한국의 현대 찻자리에 기록을 남기고자 처음부터 사진 작업을 하기 위해 참석하게 되었다. 혹시 저의 사진 작업이 참석자에게 누가 되었다면 용서를 바란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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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 2007년 3월 찻자리

일시: 2007년 3월 17일(토) 오후 6시 - 12시(공식 6-10시)
장소: 대구 수성구 지산동 찻집 <자연주의>
인원: 15명 (손님 13명, 운영자 부부)


찻자리의 전체적인 분위기

보이차란 과연 무엇인가? 골동 보이차엔 어떤 마력이 있길래 전국적으로 보이차 열풍이 생기는가? 최근들어서 경기가 많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도 차 상인들은 보이차의 판매가 급증하고 보이차를 찾는 손님이 늘어나는 것을 실감한다고 한다. 드물게 공개적으로 10만원의 참석비를 내고 마시는 찻자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만큼 골동 보이차의 참 맛을 즐기고자 하는 분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마니아 층은 많은 인구가 아닌 극 소수라고 하더라도 그 여파는 큰 것이다.


이날은 보이차가 큰 화두였다. 오른쪽 두번째 짱유화 교수의 열강

국내에서 2002년 만해도 중국에서 보이 청병을 만들어 와서 국내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려고 하는 상인을 보고 그런 것은 보이차도 아니다 하면서 그 차를 부정하는 상인들이 이제는 누가 더 진짜라고 우기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중국에서 차를 주문하여 국내에 들여오고 있다. 이러한 작금의 현실속에 자연주의 찻집에서 오래전에 준비해둔 품질이 극 상품으로 보유한 차를 한 달에 한 번 신청한 접수 순으로 짜르고 찻자리를 만든다. 벌써부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찻자리를 만드는 것이 벤치 마킹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김천에서 올라 오신 최길동 선생님, 80년대 차이야기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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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팽주 역을 한 박창식 선생님



서울에서 내려오신 보이차 마니아, 김해준 전무


한국인과 똑같은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짱유화 교수 - 차 이야기


차를 마신 후 자차로 마시기 전에 차의 옆저를 돌려가면서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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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생활이 보편화 되어 있는 대만의 경우, 술이 아니라 차로써 축하를 하고 차(茶)에 대해 큰 돈을 지출한다. 만약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연한 일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겨우 일반화 되는 차생활에 입문하는 단계가 아닐까 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차생활이 위와 같은 찻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일반적인 찻자리와 마니아의 찻자리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보편적, 발전적인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 자차법으로 차를 끓이고 있다>


 버섯과 쇠고기


행사내용

2006년 10월부터 가진 ‘자연주의 찻자리’가 벌써 6회째가 되었다. 첫모임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3째 주 토요일을 기다렸고, 그 날이 오면 KTX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대구로 내려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번 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 학기부터 서울에서 차도구학 강의가 있는데 그 학교는 토요일에 수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5시에 수업을 마치고 6시 동대구행 KTX를 타고 내려서 택시로 수성구에 위치한 자연주의 찻집에 도착하니까 8시가 되었다.


 왼쪽 첫번째 <자연주의 주인> 이정미 씨. 오른쪽 남자 6회 연속 참석자

문을 열고 들어서니 팽주는 이집의 바같 주인인 박창식 선생이 맡아 있었고, 무언가 열심히 보이차에 대한 해설을 하시는 분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알고 보니 고천 짱유화 교수가 아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팽주 오른 쪽 상석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차인’ 편집장, 그 옆 자리에도 서울에서 내려온 김해준 전무님이 함께 하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 없다. 골동 보이차를 마시는 찻자리가 이제 많이 알려졌다. 이번 모임에서 새롭게 만난 분은 또 있다.

지방에서 오셨다고 하는 치과의사였는데 심오한 얼굴을 하고 보이차에 대한 또다른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 같았다. 그 외는 늘 오시는 분들과 최근 연속으로 오시는 분들이다. 가장 어른이신 매다옹 주인 안재한 선생님, 경주에서 찻집을 경영하시는 ‘아사가’ 주인과 김천에서 수학 학원을 하시는 최길동 선생님,  인터넷상에서 활동을 많이 하시는 율리님, 직장 생활을 충실하게 하시면서 보이차를 알고자 수업료(?)를 많이 낸 (?)님 등등이 참석하였다.


오른쪽, 율리님의 와인 따르기 와인을 받는 사람은 찻자리 단골 참석자

18시 - 18시 20분 / 차회 시작을 기다리며
18시 20분 - 19시 20분 / 잣죽으로 요기하고 등심구이와 함께 와인 한잔 나누며
(간단한 자기소개로 서로 인사)
19시 20분 - 20시 20분 / 대만 청차 (2006년 목책 철관음 동차 특등) 품다

짱유화 교수의 오룡차 이야기는 오늘 마신 일등급 목책 철관음을 마신 후 목책철관음 만이오늘날에도 옛날 전통 방식으로 고수하고 만드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대우령 차인 경우 실제로 대우령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정도이기 때문에 고산오룡으로 대우령 30년 40년된 차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 말에 참석자들의 눈은 더욱 커져갔다. 오룡차 이야기를 하다가도 보이차에 대한 역사적 접근 방법이 상당히 학자적인 면모로 다가갔기 때문에 우수한 논문을 발표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대구 매다옹 주인 안재한 선생님

처음 참석하신 손님인데, 차향을 음미하고 즐기는 수준

그 다음으로 필자는 매번 15분~20분 정도 ‘차도구 이야기’라고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에는 우리나라 대나무로 만든 말차 숟가락인 차시와 그 차시를 만들고 마무리하는 시점에 억세풀을 이용하여 완성한 차시(茶匙). 소나무를 소재로 요즘 같으면 로구로 같은 방식으로 조선시대 김홍도의 그림에도 나오는 나무 깍는 것을 물레를 이용하여 만들고 생옻칠을 한 다식 그릇을 가지고 간략하게 설명을 하는 시간을 가져다.


소나무를 물레로 깍아 만든 것임.

20시 20분 - 22시 / 1935년 이전 老 동흥원차 품다하며
(2개의 자사호에 각각 40g의 차를 넣고 2개의 숙우에 우려내어 음다)
12회 우려내고 난 찻잎을 감상하고 하나의 은주전자로 자차 4회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에 대한 이야기

22시 - 23시 30분 / 동창황기 남원차 품다
(2개의 자사호에 각각 30g 을 넣고 8회 음다)
동흥자차에 황기남원차의 찻잎을 같이 넣고 다시 4회 자차 음다 후 공식적인 찻자 리를 마침

23시30분 - 01 30분 / 보이차에 대한 의문과 질문에 짱유화 교수의 해설은 최근들어 차에 관한 강의로는 최고 수준의 강의를 듣고 입과 귀가 호사한 하루였다.

금일 행사는 차와 함께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충족한 시간이었고, 차의 이름만으로 마무리 되지 않고 깊은 지식과 함께 이해를 도운 찻자리였다. 그야말로 차꾼들이 진정한 찻자리를 만들어 냈다.

석우.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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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홍인과 와인의 만남은 2006년 10월21일 처음으로 참가인원 전원 회비 10만원을 내고
차맛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인터넷으로 공지하고 신청받은 최초의
찻자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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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인급 보이차 홍인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차 꾼으로서는 복이었다. 평범한 찻자리에서 벗어나 이름난 명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茶人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그러한 명차들을 순례하며 그 자리를 만들어 가질 수 있는 첫모임이 대구 수성구에 있는 자연주의에서 만들어졌다.

지금껏 무엇을 보았네, 어떤 것을 마셔 보았네, 어디에서 그런 자리가 있었네 하는 마치 전설같은 말들이 있어 왔다. 차인중에 유독 그 깊은 세계에 빠져 궁극의 차를 좇아 매진하는 이들을 흔히 차꾼이라 하는데 바로 그와 같은 애호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진정한 차의 세계에 빠져보았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찻자리가 다수 있어 매니아들의 순례가 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찻자리가 자리매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같은 모임과 차후 정례적인 운영이 약속된다면 유한한 세상사의 가장큰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줄 차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우리도 이런 찻자리가 만들어 질 때가 되었으며 일반을 넘어서기에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시대는 지났다. 국제적으로도 접하기 힘든 이러한 찻자리가 만들어 진다는 것은 우리 차꾼들도 만만치 않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까?


찻자리를 마치고 주인의 후기


2006년 10월 21일 오후 6시 20분부터 시작된 <자연주의>에서의 찻 자리는 분명 새로운 시도였다. 10여명 정도의 참석을 예정하고 기획된 찻 자리였으나 의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21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규모의 찻 자리가 되어 주관하신 분들이 꽤나 땀을 흘리셨다. 

5시 30분부터 한분, 두 분 모이신 참석자들은 행사의 시작을 앞두고 몇 가지 건강약초를 넣어 달인 우리토종 대추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셨다. 멀리 서울과 경기도 광주에서 그리고 부산에서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행사의 시작은 예정보다 조금 늦은 6시 20분부터 잣죽과 궁중떡복기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로 시작 되었다. 식사후 찻 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참석하신 분들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보이차 관련 영상물을 30분정도 관람하였는데 이 영상물은 2002년 10월경 국내에서 촬영된 것으로 복원창을 포함한 100여편의  호자급 인자급과 중다패 번체 칠자병자 까지 국내의 모 소장가가 가지고 계셨던 보이차를 통채로 개봉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으로 이제 국내에서 두 번 다시는 찍을 기회를 가질 수가 없는 희귀 자료이다. 정식 찻 자리는 대만 청차인 ‘대우령’  2가지를 같이 우려서 그 맛과 향의 차이를 느껴보며 입안의 침샘을 개운하게 자극시켜 놓고 드디어 오늘 찻 자리의 주인공인 50년대 인급 푸얼차, 홍인을 우리기 시작하였다.

팽주로 앉으신 광덕사 주지, 경원스님께서 차에 대한 좋은 말씀을 하시면서 홍인 70g을 커다란 은주전자에 넣어 우려내셨고  우려진 홍인은 그야말로 인급차의 왕자답게 웅장한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 주전자 속에서 우려진 홍인은 4개의 숙우에 옮겨져 참석자들의 찻잔에 담겨졌다. 홍인의 맛과 향은 참석한 모든 이들 의 입 안 가득, 마음 가득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다.(참고로 2004년 3월 13일 홍콩 신성다장의 보이차 음다회 에서는 참석인원 120명에 람인 철병(50년대) 반편(180g가량)이 쓰여 졌다.)

홍인의 향기가 아직 입안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경원스님께서 다음 찻 자리에서 품다할 차로 1930년대의 조기 경창호를 주최자에게 요구하시며 오늘 가볍게 맛보야 되지않느냐고 강한  압력을(?) 가하신 덕분에 한편의 완벽한 상태의 온전한 경창호가 찻 자리에 등장하였고 그 한편에서 뜯어진 30g의 경창호는 은주전자로 들어갔다. 첫잔을 마시자 홍인의 장중함이 남아있는 입안에서 경창의 깊은 은은함이 느껴지며 순간 시원함이 목 줄기를 타고 흘렀다. 참석한 분들은 경창의 오묘한 맛과 향을 칭찬하며 홍인과 경창을 함께한 오늘의 이 찻 자리는 이젠 전설과 역사라고 하신 어느 분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차를 품다하는 동안 경원스님은 ‘차는 건강에 도움을 주는 작용을 하지만 결코 약이 아니며 심신의 수련에도 분명하게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차는 차일뿐 이지 결코 약이나 특수한 물질이 아니다. 이것은 보이차도 마찬가지이다. 차의 본질은 덤덤한 가운데 오미를 품고 있는 차의 성품이다. 우리는 오미를 모두 담은 차의 성품을 통해 수신하고 수심하기위해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다.’ 하시며 차를 마시면서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들에 대한 지적을 해 주셨다.


 10시가 조금 넘어 보이차 품다를 마치고 주최 측 안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다구들 중, 다관중심으로 진열된 전시품과 호자급, 인급 보이차들의 내표와 내비가 한권 가득 담겨진 스크랩북과 함께 10여 편의 보이차를 감상하는 동안  와인 테이블이 셋팅 되었고  매다옹 선생님의 건배로 잔을 부딪히며 치즈와 함께 홍인처럼 붉은 와인을 가볍게들 나누었다. 어느 듯 11시가 훌쩍 넘어서자 멀리서 오신 분들은 한분 두 분 다음번 찻  자리를 기약하시며 일어 나셨고 아쉬움의 끝을 끝까지 붙잡은 최후의 일곱 분이 산정무한에서 제다한 청유차 산·정·무·한 으로 깊은 가을밤 속 풋풋한 봄의 향기를 맡음으로 즐겁고 건강한 차 문화를 만들어 가는 그 첫 걸음인 찻집, ‘자연주의’의 <홍인과 와인의 향기>를 마시며... 라는 주제를 가진 가을밤  찻 자리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그렇게 끝을 맺었다.




홍인紅印 이란?  ----------<다른 방식으로 구분하여 정리 박스 처리해도 됩니다>


푸얼차(보이차)가 오늘날까지 신드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홍인과 같은 인자급 보이차의 공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인자(印字)’란 보이차 겉 포장지에 글자를 인쇄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소위 호자급의 골동보이차 에는 포장지 자체가 없었습니다. ‘호자(号字)’란 개인 차 상점의 상호를 뜻하는 것으로 차 상점들은 자신들의 상호와 제품에 관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새겨 찻잎과 함께 압제하였으며, 이러한 종이를 가리켜 ‘내비(內飛)’라고 합니다. 내비와 함께 7편 1통의 대나무 껍질 포장에 넣는 ‘내표(內표)’는 모두 차 상점의 선전물로 사용됐으며 때로는 차의 진위를 살피는 징표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만약 당시 보이차에 이러한 내비와 내표 마저 없었다면 보이차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이차가 겉 포장지에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52년부터로, 중국이 공산화된 후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 재산의 공유를 실현하여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이상이자 신념에서 시작된 것으로 차를 관장하는 각 지방의 국영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중국차를 대표할 수 있는 심벌마크를 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1950년 보이차를 관장하는 회사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 개명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 조승후(趙承煦)라는 사람이 설계한 도안인 ‘팔중차(八中茶)’가 중국내의 모든 차상품의 공식로고로 등재됩니다.


상표 등록된 이 도안은 8개의 붉은 ‘중(中)’자로 둥근 원을 만들고 그 중앙에 녹색 ‘차(茶)’자를 새긴 마크로 되어있는데 여기서의 ‘중’자는 중국을 말하고, ‘팔(八)’이란 발(發)의 음을 빌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색상에 있어 ‘중’자를 붉은 색으로 택한 것은 공산당의 상징적 빛깔과 길상(吉祥)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차’자를 녹색으로 쓴 것은 찻잎의 원색에서 비롯된 발상입니다.


(그런데 홍인은 ’차‘자를 비롯한 포장지 전체가 붉은색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의 낙후한 인쇄술과 작업자의 나태한 자세에서 비롯된 합작 탓으로 그렇게 몇 년간 ’차‘자도 홍색으로 인쇄된 포장지의 차가 후일 홍인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이후 등록 도안대로 ’차‘자가 정상적으로 녹색인쇄 되어 포장된 차는 녹인 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차제품의 특성상 그 생산 년대가 다르기에 당연히 홍인과 녹인의 맛은 다릅니다)


‘팔중차’ 로고가 탄생된 후 보이차는 모두 개별 포장되어 출하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개인 차 상점의 무포장지 보이차 제품(호자급)의 근거지가 이무(易武)였다면 공산화 이후 국영업체의 포장지 있는 보이차 제품(인자급)의 중심지는 맹해 라는 점입니다. 중국의 공산화는 보이차에 있어 포장지의 유무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기점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인자급 보이차의 하나인  홍인은 근대 신기술(쾌속발효공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완전한 의미의 전통적 보이차입니다. 즉 악퇴(고온다습한 곳에 쌓아두어 발효를 촉진하기)라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것이 홍인이며, 철저하게 건창(乾倉)으로 보관된 것이 홍인인 것입니다. 홍인은 그래서 보이차의 전통적 맛을 상징하는 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 맛은 매우 시원하며! 달고 부드럽습니다. 또한 악퇴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50년이 넘게 흘렀어도 우리고 난 차의 찌꺼기가 왠 만큼 맑은 풀빛을 띱니다. 따라서 오늘날 홍인은  많은 이들이 현대 보이차의 기준으로 삼기도하는 매우 귀한 차 가운데 하나로 그 년대가 이미 50년을 훌쩍 넘어서 이제는 골동급의 차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참고자료: 고천(孤荈) 짱유화(姜育發)  <보이차속  인자  보이차> **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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