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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에서 헌향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한국향도협회(회장 정진단) 회원들과 4일간의 취재를 겸한 여행을 하였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특히 서울에서 내려온 모 다회의 회원들과 잠시나마 찻자리를 함께 하면서 녹차와 프랑스 에디아르 데 에프트눈을 마셨다. 그리고 11시경 일지암 대웅전에서 헌향이 있었다.

차회 회원들이 헌향 하는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았으며, 부처님께 헌향을 한후 법인 스님은 손님들께 법당안의 부처님 전에 있는 향을 품향 할 수 있도록 허락 주어서 관심있는 분들은 줄을 지어 품향을 하였다.

 


일지암 헌향(석우미디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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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동훈(柳東勳)
출생 : 1969년 7월 4일
학력 : 국립목포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협동과정 석사과정 졸업
         국립목포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졸업
현재 : 국립목포대학교 국제차문화 · 산업연구소 연구원
         국립목포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협동과정 출강
논문 : 茶山 黃茶의 特徵과 傳承 考察 (韓國茶文化 제2집)
         文緯世의 茶賦를 통해 본 장흥지역 음다풍속 고찰 - 固形茶를 중심으로 - (韓國 茶文化 제3집)
         東醫寶鑑을 통해 본 조선시대 음다풍속 고찰 - 藥用을 중심으로 - (韓國茶文化 제5집)
         조선시대 황차(黃茶)의 음용 양상과 전승 연구 (석사학위논문)
        조선시대 文獻에 나타난 茶의 약리적 활용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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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文獻에 나타난 茶의 약리적
활용에 관한 연구 
유 동 훈

목포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 협동과정 (지도교수 조 기 정) 

<국문초록>

차(茶)는 중국에서 처음 음용되면서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밀접한 위치로 인하여 동시대의 차문화가 직접 전래되었다. 중국 차문화의 영향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유사하게 발전하였지만 조선시대 음다문화는 조금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명대에 들어와서 주원장의 단차폐지령으로 인해 주로 산차를 중심으로 음용되고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동시대였던 조선시대 음다문화는 중국과 달리 산차(散茶)와 고형차(固形茶)가 공존하면서 전개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음다문화에서 나타나는 또 한 가지 특징은 차를 약용으로도 음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조선시대에 저술된 많은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차를 소재로 창작된 시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고형차와 약용으로 음용하는 음다풍속은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조선시대의 특징적인 음다문화를 조선시대에 저술된 문헌을 고찰하여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먼저 중국 명대에 저술된 다서(茶書)를 통해서 제다법과 음다법의 변화를 살펴본 후에 조선시대 차와 관련된 문헌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중국 음다문화와 구별되는 조선시대 음다문화의 특징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중국은 명대에 들어와서 초청법(炒靑法)으로 산차가 만들어 지면서 음다법도 산차를 원형 그대로 우려마시는 포차법(泡茶法)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중국과는 달리 여전히 증청법(蒸靑法)으로 고형차가 만들어지고 음용되었다.

조선시대 차를 소재로 한 시문가운데 고형차의 음다풍속을 알 수 있는 시문들을 수집하여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고형차의 음다풍속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만불차(萬佛茶)’, ‘죽로차(竹露茶)’, ‘보림백모(寶林白茅)’ 등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고형차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명대에 들어와서 송대의 점차법(點茶法)이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는 가례(家禮)에서 차를 올리는 헌다(獻茶)의식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고형차의 음다풍속이 여전히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가례에서 점차하여 차를 올리는 풍속은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었는데, 차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헌다의식에서 끓인 물에 숟가락으로 밥알을 풀어서 올리는 것으로 점차의 형식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풍속이 오늘날 까지도 계속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헌다의식에서 점차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차를 약용으로 음용하는 음다풍속은 이목(李穆)의 『다부(茶賦)』, 이운해(李運海)의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 이덕리(李德履)의 『기다(記茶)』 등의 다서와 허준(許浚)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 그리고 차를 소재로 한 시문의 내용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기다』에서는 작설차를 약재로 사용하는 것이 풍속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동의보감』의 편찬은 당시 조선에서 재배되고 생산되는 약재인 향약을 백성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동의보감』에서는 향약으로서 차의 활용이 잘 나타나 있는데, 차를 복약 · 처방 · 단방 · 외용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동의보감』에서 약재로 활용한 차가 고형차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고형차를 약재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고형차의 음다풍속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기에 고형차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차를 약용으로 음용하는 음다풍속이 성행하였던 이유는 차가 약재로 사용될 만큼 약리적인 효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으며, 국가적으로도 차를 향약으로 인식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차의 약리적 활용 사례들을 수집하여 오늘날 과학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서 밝혀진 효능과 비교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선현들은 오랜 시간동안 경험적인 체험을 통해서 차의 약리적인 효능을 체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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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계사 내 전시장에서 법심스님 소장품 전시가 있었다. 근데 단순히 소장품 전시가 아니라 다기 판매 전으로 보였다. 판매전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재화의 가치품은 구입도 할 수 있고 판매로 가능하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첫 번째 전시대에 놓인 김정옥 무형문화재 정호다완은 500만원, 길송 다완은 5억이라고 적혀있다.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다. 그 라인에 신정희 다완도 500만원, 길성의 다른 다완은 1억이라 표기되었다. 문경에서 작업하는 S 사기장 다완 작품도 1억을 붙혀놓았다.

필자가 법심스님께 물었다. 5억이라는 돈은 어떤 가치로?

다완의 가치가 1000만원이라면 나머지 49천은 그 다완을 취급하고 마신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그만한 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다. S다완의 1억 평가는 한국 중국 일본의 어떤 작가도 시도해 보지 못한 형태의 다완이기에 그만한 가치를 준다고 한다. 정말 이해되지 않은 일이지만 다완의 수집가로 이름난 스님의 이런 모습이 결국 한국 다완 시장에 어떤 의미를 던져 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이런 전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시장 입구에는 오동나무 상자를 가득 준비해 놓고 신작 다기 세트를 포장하기 위한 준비물도 많이 진설되어 있었다.

예술품은 가치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예술품이야말로 사람들이 정하는 가치이다. 문외한이 보기에 그저 캔버스에 덕지덕지 물감발린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을 수천억을 호가하는 것을 보고 이해가 된다라는 사람과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는 것부터 생각하면, 다완 하나에 5, 1억이라는 가치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작가와 소장자 그리고 그에 대한 공인된 가치가 유지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도 처음부터 그런 물질적, 문화적 가치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즉 소장자들도 한몫을 했으며 그에 대한 미술사적, 공예적, 예술적인 평가들이 수많은 시간동안 검증되어 내려오면서 형성된 가치라고 할 때, 시도는 필요하지만 일반적인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선 기준은 자칫 의아한 현상이라고 규정될 수도 있다.

5억도 좋고, 1억도 좋다. 실감나게 100억도 좋을 것이다.

시도는 언제나 있어왔고, 그러한 시도와 함께 그에 대한 가치를 높여 나가는 사건도 언제나 함께 했다. 실제로 펜 한자루가 수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그들의 업적과 더불어 수십만불을 호가하는 경우가 이미 있어왔고, 지금도 펜컬렉션의 리에디션 갈래로 존재한다. 부디 역사적, 사회적, 예술적인 보편적인 평가와 함께 작가의 존재, 그리고 그의 예술성을 입증하는 일생의 작업, 더불어 소장자의 사회적인 위치와 평가 등이 어우러져 새로운 예술적인 작품의 가치가 형성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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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암차 품음회와 찻잎연주에서 시음할 차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행사의 대표적인 내용은 중국차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무이암차에 대한 관심은 많으나 실제 차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다
. 대부분 대홍포라는 붉은 색 포장지에 의존해서 마셨기 때문이다. 특히 대홍포와 수선, 육계의 품질좋은 차를 마셔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차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행사에서 시음하는 본질적인 가치는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마셔보기 어려운 차를 한 자리에서 비교해서 마셔보는 것이다. 이번에 시음하는 대홍포가 3종류가 되는데 이것은 손향, 농향, 차왕 대홍포로 구분한 것이다.

순향 대홍포(醇香 大红袍)-자연대사(自然大师) - 엄격한 유기생태의 재배 준칙을 지켜 자연이 주는 따뜻한 천연의 화밀향(花蜜香)의 대홍포이다. 생산지역:무이산 구룡과 유기다원

농향 대홍포(浓香 大红袍)-(记忆大师) - 성숙된 명인의 기억으로부터 맥을 이어 전통의 불의 따뜻한  맛과, 전통제다의 비법을 고수하고 계승한 농향 대홍포이다. 생산지역:무이산시 차엽과학연구소

수선차왕(水仙茶王) - 대홍포 모수(母树)가 있는 무이(武夷) 삼갱양간(三坑两涧)의 핵심인 구룡과(九龙窠)에서 생산된 수선은 청향의 난꽃 향이 풍부하고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따뜻하게 천천히 산발한.

육계차왕(肉桂茶王) - 무이산시 차엽과학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는 천유봉(天游峰) 기슭과 구곡계(九曲溪) 부근에서 생산된 육계는 특유의 계피 향과 일곱번을 우려도 차향이 남아 있는 차이다.

차왕대홍포(茶王大红袍) - 무이산시 차엽과학연구소와 천유봉 기슭, 구곡계 부근에서 생산된 대홍포이며 향(), (), (), ()을 느낄수 있는 무이산 최고의 대홍포이다.

일시 : 20141115() 11~15시
장소 : 롯데호텔(소공동)
행사내용 : 중찬, 힐링음악, 다예표연, 품다
참가인원 : 100(선착순 마감)
주최 : 명운당, 국제발효차연구소, 중국 무이성유한공사, 중국다예연구중심
품다용 차는 변경될수 있습니다.
문의 : 전화 02-741-5766 010-8670-6650
주소 :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북촌로 33번지

무이암차 품음회 행사관련 지난 기사
2014/10/03 - 제2회 무이암차 품음회와 김기종 찻잎연주
2013/12/14 - 무이암차 세미나 및 품음회 성황리에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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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창자사호

일창자사호의 탄생과 변화 -
오운근(吴云根), 배석민(裴石民), 임간정(任淦庭), 왕인춘(王寅春), 주가심(朱可心), 고경주(顾景州), 장용(蒋蓉)

자사호를 애호하는 차인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이름들일 것이다. 이들은 현대 자사호의 근간을 만들어낸 당대의 거물급 7대 예인(七大艺人) 자사호 작가들이다.

중국정부는 고급 자사호를 생산하기 위해 1955년 국영공장을 설립하였는데 그게 바로 일창자사(一厂紫砂)이다. 이 공장은 중국의 최고 자사 니료(泥料: 자사호를 만드는 흙)를 최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원료로 사용하였고 당대 7대 예인들을 위시(爲始)하여 그들로 인해 중국의 뛰어난 도공들을 모아 체계적 교육을 통해 최고의 자사도공들을 양성 하였다. 최고의 원료와 기술자들로 구성되었다. 일창자사는 40여 년 동안 수많은 국가대사급과 성급대사 그리고 고급 공예미술대사의 인재를 키웠으며 1997년까지 국가 경영을 마치고 민영체제로 바뀌었다.

일반 사람들은 자사호의 니료에 대해 가장 중요시하면서도 가장 혼란스러워한다. 시중에 수많은 지사호들 중에 어떤 자사호가 좋은 니료를 써서 만든 자사호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우선 근현대의 정통한 자사니료는 4호정의 니료를 위주로 채굴하여 만들었다. 황용산 4호정의 니료는 황석암층아래 깊숙이 분포하여 있어서 광석의 광물 성분을 분석해 보면 수운모와 일정치 않은 고령석, 석영, 철분 등이 있다.

이 성분의 분포는 다른 광산에서 찾아 볼수 없는
4호정 광산 니료의 특징이다. 이렇게 좋은 4호정의 자사 니료 특징 때문에 채굴을 너무 많이 하여 급기야 광산속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정부는 채굴을 불허하고 90년대 후반 4호정 광산을 폐쇄하기 시작하여 2003년에는 완전 폐쇄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수많은 자사의 니료가 의흥 흙이 아닌 다른 지방에서 사온 가짜 자사흙이 많다.

자사호는 차를 우려내는 도구이다. 차의 맛을 제대로 우려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니료는 자사호의 핵심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품질이 좋은 니료의 자사호는 차의 향기와 맛, 회감이나 회첨, 그리고 차의 운미를 잘 표현할 수 있다.

일창자사호

이번 전시는 니료에 대한 많은 혼돈 속에서 자사일창의 작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지만 작품을 한 번에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점에서 전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월간다도 창간 15주년 기념 희락다사(喜樂茶事)” 소장 일창자사호 초대전
일시 : 20141119()~25()
장소 : 인사갤러리
주최 : 월간다도(月刊茶道)
주관 : 다몽(茶夢)
문의 : 02-722-7777
인사갤러리:서울 종로구 인사동1010.종로구 관훈동 29-23.전화 02-735-2655)
대중교통 (지하철 안국역, 종로3가역. 버스 109, 151, 162, 171,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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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회가 시작되면서 고쟁을 연주하는 모습

한국향도협회(회장 정진단)가 설립된 이후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맞이한 가을 품향회다. 전국에서 모였다. 처음에는 방명록에 붓으로 이름 하나를 쓰는 것이 어렵게만 여겼는데 이제는 좌중이 그러한 부담에서 자유롭다. 이번에는 만년필을 준비해서 인지 품향회에 자리하는 방법에 대해 익숙해진 탓이다. 또 품향을 마치고 향기에 대한 소감을 적을 때도 상당히 어려움을 느꼈는데 이제 그동안 집에서 또는 향실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서 그런지 조금은 익숙한 것으로 보였다.

한국향도협회 정진단 회장

익숙하지 않은 만년필을 잡았지만 편하게 향을 접한 마음을 적기도 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향도문화를 개척해나가는 협회 회원들의 품향회는 비록 작은 보폭이지만 차공부를 많이 한 선생들 덕분에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속도가 빠른 것으로 보인다.

대금연주(도현 선생)

향실의 분위기가 새롭다. 고쟁을 연주하는 연주자 앞에 그물망처럼 길게 늘어져서 악기가 가려지고 있다. 이번에는 대금과 고금연주에 '태백 선도' 도현선생을 초청하여 품향회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향을 맞이할 준비의 명상, 기다림

품향회는 이제 시작합니다 하면, 참석한 이들은 방명록을 작성한다. 그 시간 고쟁 연주가 있다. 참석자는 그 아름다운 선율에 모두 이름을 적으면서 품향에 대한 마음자리를 잡고 새로운 시선이 신선하게 보였다. 첫 번째 침향은 ‘해남 생결’로 덩어리를 부셔서 훈향하였는데 맑은 단맛과 굵고 깊은 향이 난다. 두 번째는 베트남 충루로서 그윽한 꽃향기가 나는 듯, 시원한 맛이 나다가 우유 단맛이 나는 덧 한 향이 특별하였다. 세 번째는 해남 생결을 한 번 더 하였다.

고금연주(도현선생)
 
중국향도 책에서 볼 수 없는 부족한 부분을 교육자용 교안을 만든 것을 향도교육센터를 등록한 참석자 에게 모두 지급하였다. 이번 품향회에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춘천 다심원 이경숙 선생의 최근 ‘품향다사’에 대한 이야기를 필자가 대신 전하였는데 모두 그 품향다사의 운영 기획에 대해서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당 지역에서 응용하여 사용될 수 있는 점에 있어서 서로 좋은 정보를 얻게 된 것에도 만족해 했다. 차회나 향회의 기본이 바로 서로간의 교감이고, 그에 대한 가장 수준 높은 자리까지 가는 것이 바로 시회라는 형식이다. 왕희지의 난정서에 차와 향, 술이 없었겠는가.

해남 침향

베트남 충루

흠향하는 시간

향을 맞이할 준비의 명상, 기다림. 석우미디어(동영상)

이처럼 차가 먼저랄 것도 없고 향이 먼저랄 것도 없는 것이 같은 자리에서 지녀오던 문화적인 소양이기에 이제사 겨우 향도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차회의 기본이 되는 순서와 설정을 겪에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듯 하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선인들의 찻자리는 과연 어떠하였을까에 대한 의문도 같이 생긴다. 그저 소박하기만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과 순서, 그리고 구색이 못지 않았을 것인가에 대한 것은 앞으로 점점 더 큰 숙제로 우리 앞에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품향일지 지난 글 보기
2014/10/05 - 품향일지(01) 침향나무가 있다 없다의 흑백논리
2014/09/27 - 품향회, '품향일지'를 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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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나 무이암차에서 완성품 출시 이전에 다양한 공정에서 블렌딩이 이루어진다. 보이차는 처음부터 차 맛을 좋게 하거나 차의 성질에서 서로 보완관계로 맛을 위해 블랜딩하는 올바른 경우와 실제보다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 등등의 사정으로 눈속임 블랜딩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차꾼들은 이미 완성되어 시판되고 있는 차들을 마실 때도 블랜딩하면 더 깊은 맛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마시기도 한다. 이런 블랜딩은 이미 명대부터 있어왔다. 청대에는 아예 여러 종류의 차를 한 번에 넣고 같이 우려 마시는 다관이 분리되고 물부리가 두 개 혹은 통합된 형상의 다호도 존재한다. 이미 그렇게 마시는 주변의 분들도 꽤 존재한다.

대부분 차성이 비슷한 경우로 중차를 하거나 섞어 마시게 되는데, 숙차는 숙차류대로, 생차는 생차류대로, 향은 마무리에 가미하는 형식으로 화차나 진년귤피 등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 순서대로 겹치거나 섞이는 것이 숙차와 생차의 조합일 때 묘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

2014년 10월 12일 김경 씨와 늘 일요일이면 만나게 되는 k선생과 함께 오랜만의 찻자리에서 1990년대 7542와 90년대 황인숙차를 함께 자사호에 넣고 우렸다. 우리 세 사람이 모두 농하게 마시는데 익숙한 사람이라서 그랬는지 호에 차가 가득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차 향기는 생차인 7542의 강한 맛이 두드러지고 네 번째 부터는 황인숙차 맛이 더 강하게 나온다. 이런 맛의 결과는 두 차의 조합이겠지만 기본적으로 황인숙차는 다른 차들과 섞어서 마실 때 더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래서 숙차 중에서도 생차와 어울릴 수 있는 차인 황인숙차는 매력이 있다.

강한 7542의 맛이 여려질 무렵 두툼하게 치고 나오는 황인의 중후한 베이스는 생차의 맛을 더욱 살려주면서 부드럽게 완충해준다. 이렇게 마신다면 생차의 강한 맛에 취하면서도 여기에 다른 조합을 구상하게 되는 여유로움까지 더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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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향이라는 것이 우리 시대에 화두가 되고 있다.  무슨 현상일까? 아마도 향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침향에 대한 어마어마한 가격, 그것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등이 침향에 대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듯하다.

 

향이라고 하면 인류가 사용하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 향유이다. 아마도 종교적인 입장이 먼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절대 생활적인 이유에서 발생이 되었으며, 해충을 쫓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이 되었다. 다만 그 당시에도 가격이 비싼 것이니 아주 좋은 것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바이블에 나타나는 향유는 바로 그러한 특권계층의 호사였으며, 사회적으로 보면 성인에 대한 가장 최고의 대접이었다.

그런데 지금 베트남의 침향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지 않고 왜 서남아시아의 중동지방 민속을 먼저 말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향유가 바로 침향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이다. 침향을 불살라 버린다면 그것은 없어지는 소비재이다. 그것을 오랫동안 보관하고 용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향유라는 생활의 지혜이다.

베트남에서의 침향은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또 수출을 위한 대표적인 천연자원이다. 왜 그럴까? 그 나라는 언제부터 침향이라는 고형수지가 많은 목물을 수출까지 염두에 두면서 관리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나라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곳에서 많이 소비를 한다. 바로 동남아지역에서의 방충과 해로운 동물을 쫓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침향이라는 것을 보면 추출되는 수종이 다양하다. 침향나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여러 종이다. 그러나 침향나무라고 지정한 것은 누군가의 작위적인 명명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올리브 나무가 침향나무라고 하면 누군가는 화를 낼까? 궁금하다.

세상은 기원전과 기원후로 쉽게 구분한다. 하지만 그 세월과 관계없이 지구는 기후가 무척 많이 변해왔다. 기원전에는 서남아시아의 사막이 젖과 꿀이 흘렀던 지구상에서 최상의 비옥한 토지를 가진 지역이었다. 지금 열대우림과 농사하기에 최적의 기후를 가진 동남아시아처럼 말이다.

삼국지에 언급이 되는 남만정벌에서 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재갈공명의 일화는 거짓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방충에 사용되는 향이 침향이었으며 그 형태는 기름으로 되어 있었다. 남방지역의 침향이 북방으로 전파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소설이니 신빙성은 없지만 근원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침향이라고 하는 것이 중국이라고 없었을까?

 

자연환경이 허락한다면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침향이다. 다만 지금 품질 좋은 침향의 대표적인 산지라고 말하는 곳이 베트남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전쟁 때문이기도 하다. 나무들이 훼손되어 고사목이 많아졌고, 자연적으로 부식되어 침향재료들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던 것도 직간접적인 이유가 된다. 이밖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에도 침향은 생산이 된다. 미얀마도 만만치 않고, 태국에서도 보인다. 하지만 각국 모두 나무 수종이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누군가 침향나무가 없다 있다라는 흑백논리로 글이 온라인에 올라 온 것을 보고 혹시 그에 대한 판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글을 적어 보았다.

품향일지 지난 기사

2014/09/27 - 품향회, '품향일지'를 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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