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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만원에서 2,000만원 호가로 나온 것이 1,250만에 낙찰]

서울옥션 경매에서 다도(茶道) 분야 카테고리가 생겼다. 이때까지는 중국이나 홍콩에서 낙찰 받은 결과만을 보고 감을 잡은 입장이라면 이제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거래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보이차나 차도구 소장가라면 매우 반가운 일이다.
2012
116일 서울옥션 부산지점에서 주관한 경매에서 가장 최고가로 경매된 보이차는 람인철병으로 한 편에 1,250만원에 거래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황인 500만원, 0737542400만원으로 거래가 되었다.

[2001년 왕복군 작 자사호]

서울옥션에서 자사호를 다도 카테고리로 나온다면 가장 위험한 부분은 진위여부이다. 그 부분에서는 보이차에서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보이차는 처음부터 한국이나 중국에서 대단한 안목을 가진 분들이나 대수장가들이 그동안의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일정 부분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자사호 부분은 또 다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유명 자사호 작가의 작품을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과 처음부터 보관해온 것이다. 처음부터 방품이 존재해온 입장에서 사용을 하고 있는 것도 많이 있다. 이번 서울옥션 다도 부분 경매를 통해서 좀더 현실적인 수집 풍토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날 경매에서 자사호 부분
최고가는 왕복군
(Wangfuiun) 2001년 작품으로 270만원이다. 그 외 오개허 1999년 작품은 230만원, 장춘금 2006년 작품은 95만으로 거래가 형성되었다. 자사 1창에 제작한 자사호 4점은 240만원에 거래되었다.
그 외 국내 차도구 작가의 작품으로 정재효의 다기와 접시, 신경균의 다기와 단품으로 출품된 숙우 등은 거래가 형성되지 못했다.

다미향담(56) 아사가, 제1회 인급 보이차(남인철병) 차회 후기 http://www.seoku.com/553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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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구주도자문화관(九州陶磁文化館) 특별기회전]

일본 구주도자문화관(九州陶磁文化館)에서 도쿠가와 쇼군에 헌상(獻上)한 것 가운데 나베시아, 히라도, 카라츠에서 생산된 차도구 특별전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특별기획전 취지를 보면, 에도시대에 도쿠가와 쇼군을 정점으로 한 막번 체계의 유지를 위하여 참근교대가 제도화 되어 있을 때, 전국의 다이묘에는 여러 가지 각 나라의 산물등을 쇼군가에 헌상하는 예년헌상(例年獻上)이 의무로 부가 되었다.

[도쿠가와 쇼군에 헌상한 품목은 차도구외에도 당시 도자기로서는 최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년헌상한 것은 대명가(大名家)의 도자기로 나베시아, 히라도, 카라츠에서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당시에 만든 최고의 연구성과로 평가 받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카라츠에서 생산된 다완은 일본 차도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중요문화재 수준에 비중을 두었다면 이번 전시에는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중요문화재와 개인 소장품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헌상품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장 내부,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통제하며, 특히 다완 사진은 절대 불가하여 아쉬움을 가졌다]

차도구외 그 당시에 도자기로 만든 화병, 술병, 접시 류와 술을 따르는 용도로 만든 것으로 오늘날 다관의 형태에 술을 부리 부분이 길게 몸통의 두배 이상 되는 것으로 매우 특이하면서도 조형성이 빼어난 기물도 전시되었다.  

전시기간: 평성24년(2012년) 10월6일-11월25일

장       소: 구주도자문화관(일본 큐슈 사가현 아리타에 위치)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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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와 함께 마셨지만 정말 건강한 생차의 맛을 볼 수 있는 찻자리]

필자는 차에 대해서는 복이 참 많은 편이다
. 국내외 적으로 유통되는 다양한 차들을 시음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것이 현지에서 만나고 취급되는 차들 또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과분한 차들을 만나게 된다.

 

무진 선생의 차실 송관조에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일전에 촬영한 사진 작업을 다시 해야하는 일이 있어서 그 작업을 마친 후에 찻자리에 앉았다. 마침 차실 송관조에서 만날 때마다 뵙게 되는 신선생님도 함께 하게 되었는데, 무진 선생은 이제 차 한 잔 합시다고 잠시 차를 준비할 때 신 선생님은 저녁 식사 전이라서 그런지 신선한 포도를 꺼내어 찻상위에 올렸다.

한 번 세차 한 뒤에 마신 차 맛은 오랜 세월을 보낸 전형적인 건강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차였다. 풍부한 고삽미가 동반되는 차였기에, 나의 첫 마디가 오랜만에 귀한 차 맛을 보게 되어 고맙습니다고 했다. 무진 선생은 차 맛을 알아주니 좋다고 하며, 보이차 황인이다고 하며 포장된 상태의 차를 보여주었다. 보이차의 이름이 주는 맛보다는 아주 건강하게 잘 익은 차 맛이다.

얼마 만에 마시는 차 맛이던가
, 흔히 건강한 차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냥 값만 비싼 차를 마시면서 대단한 차를 마시는 것 처럼 하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스스로 알기에는 힘들 것이다. 이 차는 참 잘만든 차이지만 그동안 보관도 잘 되었다. 좋은 조건을 가진 차의 조합이라고 할까. 차 마다 맛의 깊이는 다를 것인데, 송관조에서 마신 황차는 그런 류의 차에서 상위 등급으로 구분 될 수 있는 차다.

최근 일주일간의 피로가 한 두 잔의 차로 눈이 확 열리는 것 같았다. 자사호 안에서 찻잎이 풀어지는 간극의 차이에 따라서 맛은 미묘하게 다르고 함께 나눈 신선생의 눈 맛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건강한 보이생차(보이청병)의 맛, 이런 맛으로 마시게 된다.

20대의 아이들이 무슨 차 맛을 알까? http://seoku.com/541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http://seoku.com/442
차도구의 이해
국내도서
저자 : 박홍관
출판 : 형설출판사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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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회째를 맞이하는 TOPIC 전시 <을 즐긴다>

규수국립박물관에서는 2012년(평성 24년) 가을 전시회에 발원지 구주(九州)가 있는 가마()을 특집으로 전시한다. 또한 구주박물관 소장품외에도 전시회의 목적에 부합하는 차도구의 기탁품도 함께 전시하여 심오한 차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앞으로는 일본 전시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에는 무쇠 탕관과 차 솥으로 사용할 무쇠 솥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 차인들의 수집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을 볼 때 무조건 구매하는 것이 유행인 것 같다.

절대 권장할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광풍은 어쩔 수 없다. 일본에서도 좋은 탕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 전차도에 사용된 질이 잘 난 탕관은 차도구 경매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중요 차도구에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기회가 없는 편이다.
박물관 전시기간 9월 12일 ㅡ 12월 9일

오늘날 우리나라의 차문화 현상은 중국 차문화에 너무 치우친 점이 있어서 차를 처음 접하는 상황에서 는 혼돈이 올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중국 차의 접근이 쉬운 반면 일본 차와 차도구 문화는 그 깊이가 얼마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심오한 차의 세계가 있다. 앞으로는 석우연담에서 일본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의 차도구 특별전을 알리고자 한다
.

일본에서 4번째로 설립된 국립박물관으로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満宮] 뒤의 구릉지에 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도쿄[東京], 교토[京都], 나라[奈良]의 국립박물관이 미술 관련 박물관인 것에 비해 이곳은 역사 관련 박물관이다. 규슈[九州] 지역은 아시아 문화와의 교류에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박물관은 일본문화의 형성을 아시아사(史)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출처] 규슈국립박물관 | 두산백과

 

규수국립박물관은 일본에서 4번째로 설립된 국립박물관으로 '다자이후텐만구'뒤의 구릉지에 있다. 일본문화의 형성을 아시아사(史) 관점에서 보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満宮] 뒤의 구릉지에 있다.
[출처] 규슈국립박물관 | 두산백과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 http://seoku.com/523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 http://seoku.com/442

규슈국립박물관 [ Kyushu National Museum , 九州国立博物館(구주국립박물관) ]
[출처] 규슈국립박물관 | 두산백과
규슈국립박물관 [ Kyushu National Museum , 九州国立博物館(구주국립박물관) ]
[출처] 규슈국립박물관 | 두산백과


 

일본에서 4번째로 설립된 국립박물관으로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満宮] 뒤의 구릉지에 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도쿄[東京], 교토[京都], 나라[奈良]의 국립박물관이 미술 관련 박물관인 것에 비해 이곳은 역사 관련 박물관이다. 규슈[九州] 지역은 아시아 문화와의 교류에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박물관은 일본문화의 형성을 아시아사(史)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출처] 규슈국립박물관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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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차를 마셔온 정은희 선생(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에서)]

짱유화보이차연구소 소장은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를 읽고나서 이 책은 20대부터 70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차를 사서먹는 사람들의 기호를 통계로 정교하게 분석하였기 때문에 학술지에 사용할 수 있는 원천자료를 만든 것에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는 지금껏 한국에서의 차문화 자료 중에서 통계라는 학술적 분류를 통하여 연령별 데이터가 나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현재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인 데이터작업을 통하여 새롭게 변모되는 차음용 실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 유학생활에서 차를 경험하고 다경도설을 번역한 김봉건 교수(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에서)]
특히 책 속의 인물 선별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20대를 선별한 것이 아니라 차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고, 그에 대한 지식적인 무장을 거친 이들의 차생활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부모님대부터 차를 마셔 온 가족력을 염두에 두고 선별한 이들이기에 오히려 새대별 차에 대한 의미는 이미 내재하고 있는 이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그들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설문에 응답한 160명에게 책을 보내고 처음으로 받은 전화는 대구에 사시는 70대의 하오명 선생님이다. 의외의 말씀을 주셨다. 저를 2030대가 함께 나오는 자리에 넣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한다. 앞으로 차의 세계도 세대교체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다음 세대의 차인들과 함께 나왔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고 했고 그러한 기획이 참신하다고 한다.

필자의 기획 의도를 너무나도 정확히 꿰뚫어 말씀해 주신지라 감사한 마음 그지 없었다. 그런데 부산에서 몇몇분의 의견이 이와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20대 아이들이 무슨 차 맛을 안다고 2030대 젊은이 때문에 이 책의 격이 좀 낮아 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선 차의 맛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여기에서 20대로 등장하는 젊은 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차를 마셔왔던 사람들이다. 사실이 그러하니 혀의 경험, 즉 미각의 원초적인 경험은 어릴 때에 완성이 된다. 이미 어린 친구들의 혀끝에서 맛이 있다, 없다, 그리고 향이 어떻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자리잡아 버린다.

누구나 공감하듯 처음 차를 맛보았고, 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차를 찾는 것이 진리처럼 결과가 나온 바, 그 당시의 기억으로 차를 찾은 사람들이 세월이 오래되었다고 해도 어찌 그맛을 잊을 수 있을까? 또 그것은 오래된 차생활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순수한 차 맛을 자연스럽게 마셔왔다는 점은 기성세대에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그냥 비싼 차만 마시거나, 골동보이차 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흑차류를 마셔온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지금껏 차를 많이 마셔 온 사람들 보다도 많은 데이터가 잠재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참여자 160명 대부분이 차를 마시는 찻자리에서 촬영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세상을 등지면 이제 차츰 그 아래 연령대들이 최고의 경험자가 된다. 더 세월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20대 청춘들은 5060대를 넘어 최고령층에서 가장 풍부한 경험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한정된 시장, 극히 작은 기회를 가진 우리 기성세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차문화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지금껏 차를 마셔 온 차꾼들보다 많은 차를 접하는 진실로 부러운 세대임은 말 할 나위도 없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의 입장은 무엇이 될까?

오랜 차생활을 해온 어느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네 세상에서는 어떤 맛이 나올지 모르겠구나 하면서 흔쾌히 던져주는 오래된 보이차 한 편의 의미는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 될 것이다.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 http://seoku.com/523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 http://seoku.com/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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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차문화연구회는 2012년 10월 20일 부산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사당에서 회원들과 함께 발표회가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는 회원 개개인의 사정이 많아서 참석 인원은 적었지만 부산 해동 저수지 부근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사당에서 돌로 만든 둥근 차석에 둘러 앉아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발표문 첫 번째는 김봉건 회장의 방외지사(方外之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유학사상을 중심으로 연구한 내용이며, 두 번째는 필자로서 이번에 출간한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에서  16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기록을 엮은 책에서 참가자 전원 혈액으로 구분하여 차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와 차를 마시는 이유, 즐겨마시는 차 등등을 통계학적으로 분류한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저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이유와 결과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아래 발표문의 전체 원문은 향후 간행될 연구지를 통해 보급될 예정이다.

방외지사(方外之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김봉건

<동양차문화연구회 회장>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하였으면서도 또 가장 불우한 생애를 보낸 선비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세종(世宗) 임금으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아 다음에 크게 쓰일 것이라는 전지(箋紙)를 받고 오세(五歲)라는 호로 불리었을 정도의 천재였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목도한 후 무도한 세상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방외(方外)의 길로 접어든 인물이다.

때로는 승려의 행색으로 팔도를 유람하는가 하면, 세상이 바뀌자 다시 관직에 진출하고자 경전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불경을 가르친 일로 탄핵을 받고 끝내 사환(仕宦)의 길은 좌절되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자(儒者)였지만 때로는 산수에 묻혀 차나무를 기르는 유인(幽人)이 되었다가, 다시 환속하여 결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가의 양생술에 심취하여 도교의 내단(內丹)과 외단(外丹)을 닦기도 했다.


그의 한 평생은 도무지 대요를 파악하기 힘든 회오리 같은 생애였으나 지조는 오히려 뚜렷하여 후세인들에 의해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다. 그의 시문(詩文)을 접해보면 뛰어난 시재(詩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얼마나 경서(經書)에 해박한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끝내 조정의 동량이 되지는 못했지만 유자로서의 비분강개는 조선 중기 이후 사림(士林)의 절의정신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산수에 묻혀 유유자적했던 삶의 자세는 걸릴 것 없는 진인(眞人)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매월당 김시습을 통해 난세에 처한 지식인의 자세에 대해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으며, 한 인간의 위대함은 반드시 세속적 목표의 달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 또한 유교다, 불교다, 도교다 하는 식의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침착(沈着)되었을 때라야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역설적이게도 김시습은 세속의 뜻이 좌절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인생을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시습의 신세


김시습은 조선 초 세종17년(1435년)에 태어나 성종24년(1493년)에 죽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일성(金日省),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설잠(雪岑), 동봉(東峯), 매월당(梅月堂) 등이 있다. 태어난 지 여덟달 만에 글을 알기 시작하여 집안 어른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비상함을 알아보고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그는 3세에 시를 짓기 시작하고 『유학』『소학』 등을 공부했다 하며, 5세(세종21년) 때에는 세종(世宗)이 승정원을 시켜 그를 시험한 뒤 능력을 칭찬하여 비단을 하사하였다 하여 오세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이후 모친의 정성으로 선비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를 가서 13세까지 이계전, 김반, 윤상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고 역사서와 제자백가를 독학했다 한다.

15세(세종31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른 뒤 18세(문종2년)에 훈련원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고 과거 공부를 했다. 그러나 19세(단종원년)에 과거에 낙방하고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던 중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단종(端宗)의 양위 사실을 전해 듣고는 통곡 끝에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후 방랑길에 올랐다.


22세(세조2년) 때에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묻었다. 24세(세조4년) 때에는 함께 어울리던 인사들과 더불어 정몽주, 이색, 길재의 초혼제를 지낸 장소인 공주 동학사(東鶴寺)를 찾아가 사육신을 위한 초혼제를 지냈다. 이후 수년간 승려 차림으로 팔도를 유람하면서 학문과 유교, 불교에 대해 토론했다. 김시습은 이때 관서, 관동,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백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등 우리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안목을 형성했다. 또 이때 직접 목도한 민초들의 생활에 대해 한없는 연민의 정을 품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많은 불경을 읽으며 여러 절을 전전하기도 했다.


28세(세조8년) 때에 경주에 이르러 정착할 결심을 하고 금오산(金鰲山) 중턱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렀다. 29세(세조9년) 때에는 경주의 유적을 돌아보는 한편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을 읽고 직접 차를 길렀다. 그리고 이 해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서울에 올라 가 열흘 동안 궁중의 내불당에 머물면서 『묘법연화경』의 언해 사업에도 참여했다. 이를 보면 그는 몸은 비록 낭인의 행색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왕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31세(세조11년) 때에는 경주 용장사 부근에 금오산실을 짓고 정착하여 살았다. 다시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석하였고, 세조의 환도(還都) 명령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37세 무렵까지 금오산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리고 38세(성종3년) 때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새 조정에서 임금을 보필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경전을 다시 익혔다. 그러나 관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꿈은 좌절되었고 수락산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41세 때에는 정업원(淨業院)에서 불경을 가르친 일로 탄핵을 받았다.


46세(성종11년) 때에는 『황정경(黃庭經)』을 읽는 등 도교의 내단, 외단 사상을 익히고,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가져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 주목했다.

47세(성종12년) 때에는 다시 머리를 기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환속 후 안씨의 딸과 혼인하나 이듬해 안씨부인이 죽고 조정에서는 폐비 윤씨의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 지방으로 방랑길을 떠났다.


53세(성종18년) 때에는 양양 부사 유자한(柳自漢)과 친밀하게 교유하다가 유자한의 청으로 구황책에 관한 상소문을 대신 짓고, 유자한에게 『장자(莊子)』를 가르쳤다. 이 무렵 유자한이 여인을 주선했으나 돌려보내고, 벼슬에 나가라는 권유도 사양했다.

59세(성종24년) 때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머물면서 절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에 발문을 썼다. 그리고 이곳에서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중종16년(1521) 이자(李耔)가 십 년에 걸쳐 자신이 수집한 김시습의 시문을 모아 책을 만들고,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를 썼다. 선조15년(1582)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집』이 편찬되었고 이이(李珥)가 왕명을 받아 『김시습전』을 지었다. 선조16년(1583) 이산해(李山海)가 「매월당집서」를 짓고, 이 무렵 운각(芸閣)에서 『매월당집』 시집 열다섯 권과 문집 여섯 권이 간행되었다.

정조6년(178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정조8년(1784) 청간공(淸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1927년 김시습의 후손 김봉기(金鳳起)가 『매월당집』 시집 15권 4책, 문집 6권 1책, 부록 2권 1책, 총 23권 6책을 신활자로 간행했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 충남 부여군 무량사 소장)


20대의 아이들이 무슨 차 맛을 알까? http://seoku.com/541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http://seoku.com/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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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도 보도 못한 차
흔히 차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마셔온 구력을 10년 단위로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20년 30년이 넘어가면 그 세월동안 그저 한, 두가지 차만 마셔본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80년대 초, 우리나라 하동과 보성 차 밭을 자주 다녔다. 봄에 새싹이 돋는 그 차밭이 너무나 아름다워 매년 5월이 되면 차 밭에서 하루 밤을 자고 와야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살았었다. 세월이 흘러 20년이 지나서는 중국의 차 밭과 차 제조 공정을 반복적으로 탐방 하면서 자연스럽게 절강성, 복건성, 운남성을 포함하여 14개의 성을 다녀보았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차를 접했겠나 싶다.

그런 과정 중에 <중국차 도감>, <중국차 견문록>을 책으로 내기도 했다. 만약 필자가 안마셔본 차라면 거의 없다 할 정도의 자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요즘은 <보이차 도감> 작업으로 중국 대부분의 차 산지에서 생산되는 보이생차를 마셔보고 있다. 특히 최근에 유행하는 ‘보이 대수차’는 재료가 일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전에 잘 못 만난 생차와는 확연히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지난날 중국차 도감 작업을 위해 녹차와 청차류에 집중적인 사진 작업이 있었다면 지금은 보이차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사진 작업을 하지만 결국 몇 종류로 압축되고 있는 시점에 마시는 차류는 더욱 늘어갔고 그간 몰랐던 차에 대한 신비감은 차츰 줄어든다. 비싼 차만 마시거나 ‘보이차에 투자’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이 마시는 차와는 분명다르다.

이런 상황에 지난 목요일 부산에서 흑차 뿐 아니라 청차에 있어서도 좋은 차를 마시는 해운대 C 씨의 집을 밤 11시에 찾아가게 되었다. 오랜 만에 왔다고 하시며 내는 차가 처음엔 세월이 많이 지난 대홍포를 마셨고 두 번째로 내는 차가, 차를 다호에 넣기 전의 모습을 볼 때도 처음 본 것 같고 마셔보면서는 더욱 처음 느끼는 맛과 향기였다.

그동안 참 많은 차를 접해본 나로선 약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잎과 줄기가 뚜렷한 엽저에는 윤기가 나고 있었다. 향기는 푹 삶은 채소에서 나오는 깊은 맛이다. 보이차로 비유할 수 도 없다. 주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호남성에서 오래전에 구입할 때 ‘흑모청차’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고 하며, 공식적으로 차의 이름이 거론하기 위해서는 좀더 자료를 찾아 보아야 된다고 한다.

이런 이름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처음 접한 차다. 더구나 세월도 60년이 훌쩍 넘은 차이다. 주인도 호남성에서 누군가 “이쪽 사람들은 옛날에 이런 차를 마셨다”고 해서 오래전에 우연히 구해놓은 차라고 한다. 요즘 좋은 차는 구하기 어렵고, 또 그 때의 차를 맛보고 싶어 보관한 곳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잠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신선한 경험이었고 또 무척 반성을 하게 되는, 아니 차라는 의미를 두고 다시 원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그런 충격과 찰나의 회고였다.

그동안 내가 먹어왔고 향기를 기억하는 차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사람들이 임의로 정해놓은 차를 가지고 그것만 바라보고 살고 또 그러한 이름에 끌려다니며 맛을 보니 그 맛은 하나같이 한결같았고 또 그 와중에 등급도 나눠졌던 것이다. 결국 누군가 정한 그 맛에 익숙할 뿐이다. 그렇다, 차는 사람들이 각기 근처에서 일구어 당시에 필요한 차를 만들어 마셨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덖어놓고 그들이 두고 두고 마시려했던 자연발생적인 음료일 수도있다. 그것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차문화요, 그 차생활 속에 지역의 특징이 그대로 묻어나는 생필품이었다.

다시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 검은 빛으로 윤기나는 찻잎을 바라보며 듣는 주인의 말, 그리고 개완에 가득 넣고 우려마시고 거꾸로 뚜껑에 담은 엽저에서 자신의 몸을 그대로 드러낸 찻잎은 자신만만하게 검은 빛에 윤기를 드러나며 사람들에게 세월과 차의 역사를 내비추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20대의 아이들이 무슨 차 맛을 알까? http://seoku.com/541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 http://www.seoku.com/523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http://seoku.com/442
차도구의 이해
국내도서
저자 : 박홍관
출판 : 형설출판사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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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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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상운작가 자사호 특별 초대전(惠祥雲作家 紫砂壺 特別 招待展) 개막식

10월 25일 대구 비채담에서 혜상운작가 자사호 특별 초대전(惠祥雲作家 紫砂壺 特別 招待展)의 오프닝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전시장을 보유한 비채담의 넓은 마당 덕분에 오랜만에 사물놀이 공연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개막식과 함께 보여준 사물놀이 공연은 중국 작가와 그 일행들에게 환영의 인사로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었다.
[비채담 마당에서 펼쳐진 사물놀이]

필자는 행사 시간을 안전하게 맞추기 위해서 하루전 심야버스로 도착하여 아침에 여유를 가지고 택시를 이용하였다. 동대구에서 네비게이션으로 도착한 택시가 ‘대익보이차전문점’ 표지가 나오는 자리에서 멈추었고 운전시가는 손님 다왔습니다고 한다. 자사호 특별전을 하는 비채담 표지보다 더 크게 만들어진 사각형의 입간판을 보면서 비채담의 신비로운 공간이 이날 더욱 신비롭게 여겨졌다.

[혜상운 작가 작품과 자사호 소장품]

           [어화룡을 들고 작품 설명하는 혜상운 작가]

개막식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 같은 분위기에서 1층 보이차 전용 바(Bar)와 테이블, 전시장을 지나서 2층으로 안내되어 접견실에 들어서니 혜상운 작가와 자사호 소장가 협회 회장 작가 메니저, 이 전시가 성사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공부차 박성채 대표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케이블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는 분주한 모습들을 보면서 대구 지역에서 보면 팔공산 쪽으로 외곽이지만 국제적인 전시가 진행되는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작품명, 세박정, 황룡산 자니]

도구로서의 의흥 자사호는 평생 차를 즐겨 마셨다던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도 의흥(宜興) 자사(紫砂)로 만든 차호(茶壺)를 가리켜 “세상 다기(茶器) 중에서 최고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자사호는 오랜 세월 다양하게 변천해 왔지만 결과적으로 차를 잘 우려마시는 역할과 예술품으로서의 소장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자사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자사호가 세계 여러 국가에서 개최한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여 입상을 받게 되면서 개별적으로 자연형, 근문형, 기하형 등의 문식(紋飾)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 마다 가장 잘 만드는 작품에 대해서 대외적인 평가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비채담에서 특별 초대한 혜상운 작가는 1968년생으로 의흥에서 태어났다. 중국 자사호 역사에서 "5대 명인(名人)"의 반열에 들어있는 혜맹신(惠孟臣)의 15대 계승자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이 작가의 모든 작품 세계를 다 볼 수는 없겠지만 그 유명한 혜맹신 작가의 후손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자사호 애호가들이 한 번 쯤은 관심가지고 볼 수 있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어화룡은 여러 작가들도 만들고 있지만 혜상운의 어화룡이 어떤 점에서 그의 대표작이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이번 전시에 얻을 수 있다면 관람객으로서의 안목도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유리관 내의 전시는 자사호 소장가 협회장의 소장품 10점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20대의 아이들이 무슨 차 맛을 알까? http://seoku.com/541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개정 증보판>http://seoku.com/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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