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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에 대한 담론은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만 보아도 더 이상의 특별한 모범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자료는 나올만큼 나왔다. 여기서 기존의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나는 보이차에 대한 자료적인 접근에 가능한 사람은 중국인으로서 전문 차학자이거나 언론만이 가능하리라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대만과 홍콩의 차시장에서 거래되는 차를 구매해서 마셔보지 않았다면 현실과는 [사진, 대만 보이차 전문점에서 차를 내는 모습] 동떨어진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실제 홍인을 차의 수준별로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동급의 다른 차들도 다양하게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과의 대화는 같을 수가 없다.

즉 흔히 골동보이차에 대해서는 죽천향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박창식 선생님의 의견을 믿고 있다. 위에 말한 인급, 호급의 모든 차들을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이고, 늘 중국의 실제 동향을 관찰하면서 우리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블로그에 여러사람의 글을 비교해서 올려진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석우여담에 올려본다.

아래 글의 원본 보기 http://blog.daum.net/36254598『푸얼차(普洱茶)』의 저자인 ㄷ교수의 설명. “찻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紅印)’이라 했고,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이를 ‘녹인(綠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붉은 차자(茶字)의 푸얼원차(普洱圓茶)는 맹랍의 제일 좋은 찻잎으로 만들어졌고 이무진(易武鎭)은 맹랍현(勐臘縣)에 속해있기에 붉은 색으로 찍힌 차자(茶字)의 찻잎은 가장 좋은 찻잎으로 인정받은 이무차산(易武茶山)의 대엽종 차나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곁들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홍인푸얼원차(紅印普洱圓茶)는 40년대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50년대 공산당정권(共産黨政權)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조기홍인은 이무차산(易武茶山)에서 생산된 최고품질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으로 품질면에서 조기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홍인에 대한 판별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인급차(홍인)에 대한 이야기 - 홍인에 대한 의혹 풀이는 먼저 제작연대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1950년대, 내란을 겪은 후의 중국은 전쟁의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맹해 지역은 중국의 변방이기에 그 참상은 더욱 심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맹해의 물품거래는 현금이 아닌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이곳에서의 화폐는 가치가 없으며 돈이란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 불해차창(佛海茶廠) 즉 지금의

맹해차창(勐海茶廠) 복원(復原)에 참여했던 탕렌량(湯仁良) 선생의 인터뷰 “1949년 중국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이곳에서 철수한 후 맹해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맹해차창의 경우 생산설비들이 모두 도난 또는 파괴가 되어 차 생산은 물론 기초 작업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었다. 당시 우리는 맹해차창의 복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차창(茶廠) 작업장의 복원에만 매진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맹해의 현황에 대해 “당시 맹해의 인구 구성원을 보면 소수민족이99%이며 이곳의 한족은 모두 외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뿐이다. 소수민족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건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생활하는데, 당시는 무척 빈곤했던 터라 모두들 곡물을 시장에 내놓아 교환할 처지이지 차를 만들어 내다 파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설사 있었더라도 그 양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맹해현 정부자료실을 들췄으나 당시 이곳의 차에 관한 그 어느 자료도 찾지 못했다. :현 운남성 서쌍판납 맹해현 차엽판공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까지 맹해는 무척 혼란하기에 차를 만들고 상품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운남성의차의제조 및 판매에 관한 유통은 모두국영형태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시는 모두주관 부서인‘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부터 받았다. 설령 생산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들이 만든 가정용 형태의 차일 뿐 상업제품은 아니다.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맹해에는 푸얼차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정확한 일기는 갖고 있지 않다.” 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운남성의 푸얼차에 관한 모든 자료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에 보관되고 있다. 필자는 현 중국운남성차엽협회(中國雲南省茶葉協會) 회장이신 쯔어우자쥐(鄒家駒)씨의 도움으로 당시의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다 .운남성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맹해차창은 1956년부터 푸얼차를 만들었으며 당시 출하했던 이 제품은 모두 광동성(廣東省)으로 갔는데, 이 제품이 바로 후일 ‘홍인’이라는 푸얼차다.

그럼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혹은 어떠한 연유로 정식으로 등록된 녹색‘ 차(茶)’자의 마크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출하된 것이냐의 문제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950년대 맹해는 무척 낙후된 지역이기에 인쇄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에 당시 맹해차창에서 출하한 모든 포장지는 가장 가까운 지역인 푸얼현(普洱縣)(보이현)에서 인쇄됐으며 이러한 작업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50년대 당시 푸얼현의 인쇄는 원시형태인 목판으로 이뤄졌다. 목판인쇄(木版印刷)란 목재의 엇결이나 절단면에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볼록하게 또는 오목하게 조각한 판목에 안료를 첨가한 수성잉크를 칠하고 인쇄지를 놓고 종이 뒷면을 문질러 인쇄하는 방법이다. 인쇄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잉크를 배합하는 과정에서 색상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다. 즉 사용된 색상의 배합비율의 정확성이 바로 인쇄의 품질을 좌우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얼차 포장지의 인쇄는 단순한 색감 즉 붉은 색과 녹색 등 2가지 색감의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보통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로 치부하고 있으나 필자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오늘날 인자급 푸얼차를 판별하는데 에 있어 포장지의 글씨체뿐만 아니라 인쇄된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즉 붉은 색의 진하고 엷음에 따라 도홍판(桃紅版)과 주홍판(朱紅版)로으 나뉜다. 여기서 말하는 ‘도(桃)’란 복숭아와 같은 엷은 붉은 색, ‘주(朱)’란 주사(朱砂)와 같은 짙은 붉은 색을 말하는데, 이러한 색상의 차이는 염료의 배합비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2가지의 색상 즉 녹색과 붉은 색을 한 가지의 색으로 통일되어 인쇄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업자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 운남성공사의 직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부각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운남성공사는 맹해차창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질책을 받은 맹해차창은 푸얼현의 인쇄소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포장지의 ‘차(茶)’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된다. 이 포장지로 출하한 제품이 바로 ‘녹인’이라는 푸얼차다. 이상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이 나온다.

홍인과 녹인의 구분은 찻잎 원료의 생산지 즉, ㄷ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홍인’은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며, ‘녹인’은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 라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러한 포장지의 차이는 단순한 인쇄상의 착오일 뿐 찻잎의 생산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맹해차창에서 ‘팔중차’ 로고로 출하한 첫 번째 푸얼차의 연도는 1956년도 이다. 글. 짱유화

죽천향의 첨언: 그럼 도대체 인급차 홍인은 몇 년도부터 생산된 차인가요! 첫째, ㄷ 교수의 말대로 1942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아니다” 입니다.

그 이유는 운남성 차엽 진출구공사<云南省茶叶进出口公司志>의 기록에 따르면 “云南中国茶叶贸易公司”는 1950년 9월 이름을 “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로 개명한 바,1942년-1949년 만들어진 소위 조기홍인의 포장지에 1950년 에 바뀐 이름인“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라는 명칭이 절대로 인쇄되어 찍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짱유화 교수의 말대로 홍인은 맹해차창에서 1956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인급차가 맹해차창에서 1956년 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사실은 위 여러분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맞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인급차는 1952년부터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가요 ........ 그것은 바로 맹해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으로 보내 하관차창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래 중국의 인터넷 자료를 보면 현 운남성서쌍판납맹해현차엽판공실(雲南省西雙版納勐海縣茶葉辦公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 중에 나와 있는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씀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중국 인터넷 자료중에서...   http://www.puertea8.com/html/259.html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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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생활을 하면서 늘 사용하는 것은 잎차를 우려마시는 도구인 다관과 찻잔이다. 그런데 말차(抹茶, 가루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다완은 차를 마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알고 싶고, 또 잘 고르는 법을 배우고 싶은 것이 차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하지만 생존하는 작가의 작품을 가지고 종류를 이야기하고 작품의 장단점을 논하기에는 사찰의 스님들과는 부담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국에서 소문난 다완 수집가인 청하사 법심 스님은 어떤 자리에서든 다완을 보면 그 자리에서 주변인들에게 설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현장을 여러번 목격한 김재환 학우님이 주선하여 서울․경기지역 학우님들이 마련한 그 의미 있는 자리에 동행하게 되었다. [사진]

한 달 전인 7월에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서울․경기지역 학생회에서, 다완(茶碗)에 대한 현장 학습을 위해서 경북 영천에 있는 청하사 법심스님께 가기로 되어 있는데, 학생들과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김춘희 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동행하겠다는 답변을 하고 내심 그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청하사 법심 스님의 다완 강의 모습] 청하사 법심 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다완은 2007년 방문하였을 때 스님이 출타중이라 스님은 뵙지 못했지만 전시장의 다완을 보고 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과 동행하는 그 날을 기다려지게 된 것은 다완 공부를 하고 싶은 학우님에게는 많은 종류의 다완을 한 자리에서 보고 설명을 듣는 좋은 기회이겠지만, 나는 그런 완에 대한 명칭 부여 방식에 있어서 스님께 나의 의견을 말씀 드리고 동행한 학우님들께 이제부터라도 차도구의 명칭에서 가장 기본적인 표기법의 대원칙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있기도 해서 모처럼의 동행이 반갑고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사진 위, 청하사] 3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려 도착한 일행은 청하사 법심 스님의 차실에 들어갔다. 스님은 기다리고 계셨고 모두 큰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자 스님은 우리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같이 처음부터 차와 다완에 대한 지론을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냥 마시면 되는 찻그릇에 일본인들은 다완에 미학을 도입하고 다도의 정립에는 차보다는 찻그릇 즉, 다완에 대한 공부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강한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 스님은 정호다완의 균형미를 보기위한 방법, 다완의 종류에 따른 굽의 형태, 교맥다완, 이라보다완 등에 대한 상세한 강의진행 그리고 다완 명칭에 있어서도

이도다완(井戶茶碗)을 정호다완(井戶茶碗)이라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는 말씀에, 나는 식사 시간을 통해서 차도구 명칭에 한문을 음독하는 방식을 제안한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스님은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한국 다완에 대한 실증을 서로 잘 알고 있는 처지로서의 진보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법신 스님의 소장품, 사방 벽면은 모두 다완으로 전시] 스님의 차탁에는 연린문으로 만든 청자 찻잔을 볼 수 있었는데, 추측하건데 스님이 개인잔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 잔을 사용하게 된 연유를 여쭈니 얼마 전 해강도자기 박물관에 갔을 때 최관장이 선물로 준 것인데 잘 만든 것 같아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시며, 이런 연린문 찻잔은 작고한 김응한 사기장과 기장에서 작업하는 김윤태 사기장이 잘 만든다고 하셔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스님의 열강에 모두 눈빛이 반짝임] 모두가 청자 하면 해강도자기를 거론하는 현실을 잘 알면서도 2시간 가량의 다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에 개인적으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 청자였다. 스님은 청자를 만드는 작가 가운데 다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답변으로 뜻밖에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아마도 청자 부분에서 1970년대 작가로서 황종구 씨의 청자와 해강 유근형 작품을 기억하고 그 완에 차를 마시면 어떤 맛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었다. 나는 그동안 법심 스님의 완에 대한 생각을 지난 몇 차례의 공적인 자리에서 일어난 말과 이번에 만나서 들어본 다완에 대한 이론을 종합해 볼 때 일본 차인들이 주장한 내용을 벗어나는 이론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1세대 황종구 사기장과 그의 동생 황종례의 가족을 알고 해강 청자 다완과 황종구 청자를 비교한 말을 듣게 되면서 오랜만에 정말 드물게 우리나라 1세대 다완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스님과 함께 기념 촬영] 스님은 이날 일본에서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정호다완, 이라보다완, 두두옥다완, 김해다완 웅천다완 등을 재현하는 사기장 보다는 독자적으로 이름을 만들어 선보인 설영진의 독도다완에 칭찬을 많이 하셨다. 독도다완이야 말로 가장 독창성을 가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부분에 있어서는 나의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 설영진 사기장의 독도다완이 독창성이 돋보이는 다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독창성을 가진 다완이라고 제시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 이런 문제는 다음에 다른 코너에서 언급하겠다.

전체 28명이 참석하여 서울에서 영천까지 한가지 목적으로 움직인 이번 현장 체험은 서울 경기 지역 회장과 운영진의 박진감 넘치는 추진력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9월, 10월 학생들을 위한 현장 교육이 좋은 결실을 맺기 바라는 마음이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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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앙동에서 중국차 전문점을 오랜 기간 운영해온 ‘다례헌’ 서재홍 대표를 만났다. 지난 6월에 다례헌에서 만났을 때 <시민시대>에 중국차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며, 중국차를 가장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천량차의 제조 과정 사진 한 장이 필요하다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에 나오는 천량차 부분에서 5명이 발로 굴리며 포장하는 사진 사용에 대한 허락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나는 즉석에서 하시라고 하였고, 필요하면 사진 데이터를 보내드리겠다고 했는데, 서 선생님은 웹상에서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즉시 전달할 수 없었다.

책에 나오는 사진을 사용하라고 하였기에 나는 생각하기를 내 책의 사진을 스캔해서 원고로 사용하지 않았겠나 하면서 이젠 책이 나왔을 텐데 어떻게 원고를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찾아뵙게 되었다.             [사진 위, 다례헌 서재홍 대표] 이제는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과거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료를 조금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데, 서 선생님은 1995년 이전의 책에서 원문을 번역하고 계셨기에 더욱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 사진은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화시켜서 사용하였고, 원고가 작성된 7월호 책을 한권 주셨다. 자연스럽게 천량차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사모님은 집에 보관된 차 중에서 가장 오래된 차를 가지고 있다고 하시며 보여주셨다. 차생산 년도를 보면 1950년대 차라고 할 수 있다. 좋은차를 맛볼 때면 꼭 꼬장꼬장한 봉지에서 나오는데 이 차도 비닐봉지에 담겨있었다.

[1950년대 천량차] 일단 외형으로 볼 때 입맛이 돌게 했다. 어떤 맛이 나올까를 예측할 수 있는 외형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동안 한국과 중국에서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많은 차를 접하였다. 중국 현지의 차 생산 과정을 촬영하면서 지금도 그 현장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차를 보고 시음해 보면 제조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량차로서는 노차라고 할 수 있는 그 차의 맛을 보면 이런 맛을 우리는 천량차라고 하는데 보통의 경우 이 맛을 모르기 때문에 등급으로 친다면 낮은 등급의 천량차를 표준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천량차의 참맛을 잘 모르고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례헌 사모님] 중국 호남성 백사계에서 작업자들이 몸에 땀이 범벅 되어 있는 상황에 잠시 목을 축이기 위해서 마시는 천량차의 맛을 보고 놀라워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이 한국에서와 같이 작은 다호에 천량차를 넣고 우려마시는 것이 아니라 끓여서 큰 통에 담아두고 수도꼭지 같은 것을 이용하여 틀어서 넓고 큰 찻잔에 차를 받아 마셨다. 나도 함께 마셨다. 시원스런 맛이며, 갈증을 순간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이날 마신 천량차는 세월이 주는 맛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차의 성질이 좋았던 것 같다. 좋은 조건에서 보관되어 차를 귀하게 다루는 집에서 관리되었기에 이런 맛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 선생님은 백사계 천량차와 천식방(天植坊) 천량차를 나란히 세워두었기에 두 개를 손으로 짚어가며 비교 설명을 하셨다. 같은 천량이라도 외형적으로 보면 천식방이 더 꽉 차고 긴압이 잘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달된 부분을 보면 천식방 천량차가 좀 더 짙은 갈색을 띄고 있다.

[사진 위, 백사계 천량차] 차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종류의 천량차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최근에 제조한 호남성 백사계(白沙溪) 천량차와 그 인근에서 만든 천식방 천량차의 외형을 비교하고 ‘천식방’차의 맛을 나누게 되었다. 서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3년 된 차를 비교하면 백사계 차는 먹을 수 없는 상태이나, 생솔 가지를 태워서 천량차를 만들 때 사용한 천식방차는 한약재로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금하여 한 번 마셔보고 싶다는 말에 즉석에서 긴압이 꽉 찬 느낌의 ‘천식방’을 조금 뜯어서 개완으로 마셨다.

개완에 넣기 전의 상태로 보면 노랑곰팡이 같은 것이 보였다. 서 선생은 부분적으로는 흰곰팡이 같이 보인다고 하였지만 내 눈엔 노랑곰팡이였다. 순간 5-6년 전 서울 인사동의 중국차 전문점에서는 천량차를 세워두고 노랑 곰팡이를 자랑하며 차를 팔았던 몇몇의 주인들과 당시 분위기가 잠시 떠올랐다. 그런데 이젠 그렇게 곰팡이를 자랑하며 마시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진 위, 천식방 천량차] 노랑 곰팡이라고하여 복전차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복전차는 오래되면 흔히 전문 용어로 ‘금화’(유익균으로서 독특한 균화 향기가 있으며, 국가표준의 금화균수까지 정해져 있다)가 핀다고 하여 양질의 흑모차를 원료로, 악퇴와 발효, 발화(發花) 공정을 정상적으로 거치면서 생기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차에서 보이는 노랑 곰팡이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달랐다. 어찌되었든 ‘천식방’이라고 하는 차는 차의 맛이 제조일이 3년 정도 지난 것으로 일반적인 천량차의 맛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순한 맛으로 마시는데 거부감이 없었다. 무엇이 작용하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한약재와 생솔가지를 태운 솔향기가 흡입되어서 그런 맛이 나는지는 모르지만, 백사계 천량차의 맛과는 다르다. 하지만 생산하고 3-4년 뒤에 마실 수 있다고 해서 좋은 차라고 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차인들이 좋아하는 차맛을 논하는 것은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차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사계 천량차와 천식방 천량차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잠시 생각할 수 있다. 차를 마시면서 엽저를 보니 백사계 차와 ‘천식방’ 차는 백사계 차에서 볼 수 있는 살청과 퇴적 과정이 고르게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천식방의 차 전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새로운 차들이 유통되면 좀 더 시간이 가면서 충분이 우열이 가려지는 인프라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역적으로 차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기도 하기에 낯선차일 수 있다. 3-4년 지난 백사계 천량차에서 나오는 강하면서 떫은맛보다 순한 맛이 난다고 하여 좋은 차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르다고 본다. 더 많은 종류의 천식방 천량차의 시음과 평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때가 올 것으로 본다.

다례헌 서재홍 대표는 1990년 부산 차계를 대표해서 [제1회 항주국제차문화연토회]참석을 위해 홍콩을 거쳐 항주로 갔다. 회의를 마치고 25박 26일간 중국 차산지를 견학하였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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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효능에 관심있는 분들은 보이차를 어떻게 마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많이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마시는가? 또한 어떤 종류의 보이차가 보이차로서의 효능을 가지는가? 등등으로 의문을 많이 가지게 된다. 본인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한국에서 누구도 그 부분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보이차에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에서 나보다 더 비싼 차를 마시는 사람이 수준이 높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어쩔 수 없이 ‘비싼 차가 좋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작용하면서 혼동 속의 보이차 시장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정작 보이차를 어떻게 마실 것인가에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과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말로 할 수 없기에 그냥 많이 마시면 되겠지 하는 초보자들의 공통된 심리가 보이차 시장의 왜곡을 함께 안고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산데파트 뒷길에 위치한 산다원(대표 김성진)이라고 하는 차와 차도구를 취급하는 전문점이 있다. 여기서 차라고 하면 일본 말차와 보이차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차도구를 취급한다. 일본 차도구는 보급품에서부터 높은 수준까지 취급하는 곳이다.

 

[사진 위, 삼다원은 10월 경에 이사를 간다]

항상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주인의 찻자리 앞에는 차가 담겨있는 자사호가 5-6개 있다. 보이차라도 같은 차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호 하나에 매일 같은 종류의 차를 새로 넣고 하루 2-3탕 우려 마신다. 마실 때도 당일 차를 마신 후 어제 넣고 마신 차 등으로 지난날에 마신 다호에 끓인 물을 넣고 음미한다. 토요일에는 한주 동안 마신 다호 안의 차를 큰 호에 가득 담아둔다. 또 그렇게 해서 하루 동안 그 차의 맛을 본다. 토요일 퇴근 때는 그 차의 찌꺼기를 담아서 집에 가지고 간다.

  월요일에는 또 새롭게 시작한다. 이렇게 마실 수 있는 차의 공통점은 차의 품성이나 성질이 좋다는 것이다. 즉, 좋은 차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맛과 향기를 간직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동안 하루 2-3탕씩 우려낼 것이 없다.

  이번 만남에서도 80년대 후반의 차, 98년도에 만든 차 등등을 시음하고 왔다. 마시는 차에도 선수들끼리 이야기하고 마시는 차가 있다. 포장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 자체를 두고 말한다. 이 차가 '야생보이차'니, '고산차'니 하는 말이 필요 없다. 사람이하는 말이 아니라 차가 말을 한다. 건강한 차의 공통점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차의 기운으로 말이다. 차를 담아내는 다호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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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정 김만수 作, 대나무로서 막힌 곳을 뜷어주는 도구]

차문화의 중심을 차(茶, tea)라고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차문화의 가장 중심은 사람이며, 그 사람들이 남기고 간 차도구들이 그 다음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음용후 없어져 버린 찻잎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넘어서서 차문화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차도구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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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세계녹차콘테스트가 일본 시즈오카에서 지난 8월7일 개최되었다. 한국에서 출품한 지리산차천지(대표 이수동)에서 출품한 ‘알가차’가 지난해 금상 수상에 이어 최고금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수상의 기쁨을 여러 사람과 나누지 못하고 있다가 필자와 19일 하동군 악양면 차밭 사진 작업관련해서 상의하는 과정에 지리산천지차에서 영광스런 일이 생긴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늘 중국차 일변도의 품평시스템에서 평가받아왔다.

필자가 2006년 안휘성 육안과편 생산공장에 갔을 때 사장은 자신의 차를 일본 차품평에 출품[사진 위, 일본, 프랑스, 중국에서 온 심사위원]하여 최고상을 수상한 이력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 것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출품한 차의 정식 명칭은[유기농하늘담은떡차 : 알가차]이며, 이번 수상 소식에 대한 공식적인 전달은 세계녹차협회 한국 담당인 ‘오사다 사치코’이다. 

이 콘테스트는 일반 차 차품평회와는 달리 차의 품질 뿐만 아니라 창조성 컨셉에 명확성, 기능성 등 차의 상품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함으로 세계의 녹차소비확대에 이바지하는 목적을 가진 콘테스트이고,올해 제3회를 맞이하게 된 이콘테스트에 대한 관심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올해는 일본, 한국,중국, 태국,스리랑카에서 117개가 출품되었다.

[심사위원들의 심사과정] 최고금상, 금상, 패키지상 등을 선정하고, 올해 출품차는 소비자들에게 알기 쉽고 명확한 컨셉을 가진 독특한 차상품이 많이 있었으며, 출품된 차들은 기존의 제다법으로부터 탈피하고 새로운 제다방법을 개발하여 소비자가 구매의 폭을 넓일 수 있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진 상품이 눈에 뛰었다고 전한다.

심사위원은 일본, 중국, 프랑스에서 차의 생산, 유통, 소비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되어 차의 품질뿐만이 아니라 창조성, 기능성, 컨셉의 명확성을 평가하였다. 이번 콘테스트에는 총17개가 최고금상을 수상했으며, 그 중 한국에서 2개의 차 상품이 최고금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총39개의 금상 중 한국에서 9개가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차가 세계로 비약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심사위원들에게 한국차의 우수성과 상품성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수상식은 2010년 1월 20일 일본 시즈오카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입상차는 앞으로 1년 동안 일본에서 개최되는 차,식품전시회 등에서 전시, 소개가 될 예정이다. - 아래 사진은 출품한 '알가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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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에 관한 책을 국내에서 발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울이나 지방에서는 보이차에 대한 깊은 식견을 나누고자 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내가 책을 한 권 낼거다’는 말도 하게 된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보이차에 대한 책은 전무하다. 물론 번역서 출간은 간간히 있어 왔다.

2007년 여름에 광주에 사시는 박용모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 보이차에 대한 책을 한 권 내시지요?” 하고 권유해 보았다. 박 선생님은 자신이 번역서로 출간이 되어 있고, 또한 보이차에 대한 책을 내기 위해서는 원천적으로 중국차를 번역해서 하는 일인데 굳이 나의 저서라는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럴 생각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일견 맞는 말이다.

이번에 개인의 저서 형태는 아니지만 ‘글을 읽다’에서 <보이차 수첩>이 발행되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참 잘 엮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공개하는데 약간 머뭇거리게 된 것은 이 책의 실제 저자가 누구인가가 궁금했고 약간의 실체가 드러날 때 밝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어제 그 출판사의 내용을 잘 아시는 건국대학교 정기웅 교수를 만나면서 실제 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신대학교 교수인데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기에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출판사 엮음으로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서문에서 밝힌 중문과 조재송 교수님으로 보인다.

이 책은 보이차의 역사, 보이차의 명칭, 분류, 보이차의 저장, 효능 등에 대해서 중국에서 발행된 책을 중심으로 번역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보이차를 좋아하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보이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각 단원마다 팁을 달아서 [보이차의 제다 과정], [보이차와 차의 성질], [녹차의 항암 작용, 카테킨], [보이차의 극품 ‘반장’] 등을 박스처리하여 편집되어 있다. 책의 판형이 작아서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내용에서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주관에서 올 수 있는 차이로 볼 수 있다. 보이차는 정답이 없다. 그 없는 정답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 진 것에 가치를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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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차도구 판매점으로 가장 규모 있는 곳이라면 대구의 청백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대구에 갔다가 우연히 요리하는 분들과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일행이 식기류를 고르고 있을 때, 나는 다기 부분을 보고 있었다. 청백원의 부분적인 리모델링은 보았지만 전체 리모델링 후로는 처음이다. 우선 새롭게 변화된 모습이 밝게 느껴진다. 진열 방식에서도 변화가 있으며 화이트톤으로 마무리된 벽면도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청백원이 새롭게 보였다. 작가의 작품 유형도 많이 변화된 모습인데, 내가 모르는 작가도 있었다. 그동안 다기 작가들이 많이 생겨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좋은 모습으로 시장에 등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관과 다반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시장에 나온 것도 눈여겨 볼 내용이다.

그런데 경남 지역의 낯익은 사기장의 이름 옆에 보이는 작품은 어쩜 저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일까. 그냥 장작가마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신진작가의 대두가 크게 보여서 그런지 50대 기성 작가의 분발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하루였다. 이제 차도구 시장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눈앞에 닥친 것 같으며 그들은 중국의 차도구가 수입되는 것과는 별개로 당당하게 우리나라의 정서로 물리칠 준비가 되어 보인다.

그동안 암울하게만 보인 한국 차도구 시장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 것 같아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는 것은 새롭게 보이는 작가와 작품들이 꼭 장작가마로 만든 것이 아니라도, 현대적 설비가마에서 나온 것이며 가격 대비 경쟁력이 갖추어졌다고 보기에 기대가 크다. 변화되고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의 세대교체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대적 설비 가마의 장점을 잘 살리고 그 특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장작가마로 만들었다고 소리 내어 보이는 한쪽의 다기가 측은하게 보이는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

Posted by 石愚(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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